[스페셜2]
<공작> 북핵에 대한 불안은 어떻게 정치에 이용되었나
2018-08-09
글 : 김성훈
‘흑금성 사건’ 실화와 윤종빈 감독의 <공작>, 한국현대사의 가장 긴박했던 시간의 이면에서 벌어진 일을 말하는 방식

북쪽에서 바람이 불면 집권당에 표가 더 몰렸다. 지금은 약발이 많이 떨어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군가에게 ‘북풍’(北風) 재미는 쏠쏠했다. ‘북한 변수’를 뜻하는 북풍은 선거철 단골손님이다. 국민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해 선거에 슬그머니 개입한 북풍 의혹은 항상 있었다. 1987년 대선 전 일어났던 KAL 858 폭발사건, 선거 전날 연출된 폭파범 김현희의 압송 입국, 1996년 4·11 총선을 엿새 앞두고 판문점에서 이상하게 벌어진 북한군 무력시위 사건(영화 <공작>에도 언급된다) 등이 떠오른다. 남한의 보수정권에 북풍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권 시절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부장이 주도한 북풍사건을 수사했다. 수사 과정에서 ‘이대성 파일’(이대성 안기부 해외공작실장(영화에선 조진웅이 연기한 최학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권영해 안기부장 시절의 북풍 공작 문건)에 잠자고 있던 ‘흑금성 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흑금성(黑金星). 무협소설 속 등장인물을 연상케 하는 이 이름은 안기부 대북공작원 박채서의 암호명이다. 정작 박채서는 공작 활동 당시 자신의 이름표가 흑금성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풍을 장풍 쏘듯 남발했던 1990년대, ‘흑금성’ 박채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오가며 공작 활동을 했다. 블록버스터 <군도: 민란의 시대>(2013) 이후 윤종빈 감독이 약 5년 만에 내놓은 <공작>은 한국 첩보 역사상 최초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의 방패를 뚫고 적의 심장부(평양)까지 침투한 스파이 흑금성을 스크린에 불러낸 첩보영화다.

흑금성이 스파이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그 순간을 향하여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하며 ‘장군’을 부르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멍군’으로 응수했던 1993년이 <공작>의 배경이다. 남한은 북한이 핵이 있는지, 아니면 개발하고 있는지, 개발하고 있다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다. 정보사 소령 출신인 안기부 요원 박석영(황정민)은 상부인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으로부터 북의 핵개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마산 출신의 대북사업가로 위장해 중국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서울무역’이라는 무역 회사를 차린 뒤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대외경제위와 끈이 닿은 재일동포 기요하라(김인우)로부터 북한 상품을 사들이며, 수개월 동안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러면서 북 고위직에 포섭당하려고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어느 날, 박석영은 베이징에 주재하는 북한 대외경제위 리명운 처장(이성민)을 만나면서 그의 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리명운은 박석영이 접근할 수 있는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독대가 가능한 거물이다. 하지만 리명운은 군 정보사 소령 출신인 박석영을 쉽게 믿지 못하고 계속 테스트한다. 박석영은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한다.

영화 <공작>은 십수년간 이어진 흑금성 박채서의 공작 활동을 2시간으로 압축했다. 박채서의 수기를 바탕으로 기자의 취재기를 녹여내 1, 2권으로 출간된 책 <공작>(김당 지음)에서 절반에 해당되는 이야기다(나머지 절반은 박채서가 노무현, 이명박 정권에서 대북 비선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이다). 국군정보사령부 대북공작원 시절, 엘리트였던 박채서는 북한 정보기관(과 남한에서 활동하는 고정간첩)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진급과 인사에 불만을 품은 군 부적응자로 위장했다. 군 동료들에게 빌린 돈을 제때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부동산 투자를 빌미로 각종 사기행위를 저질러 전과자가 됐다. 자신의 존재를 점점 지워나가면서 주변을 속인 그는 1995년 안기부 소속 국가공작원으로 채용됐다.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북한산 상품을 사들여 남한에 파는 대북사업가로 위장했다. 베이징 루프트한자 센터에 위치한 캠핀스키 호텔(영화에선 밀레니엄 호텔. 독일인이 운영하는 독일식 호텔로 방음 시설이 좋고, 중국 공안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 까닭에 박채서와 북한 고위직은 항상 이곳에서만 만났다.-편집자)에서 북한 대외경제위 리철 처장을 만나 그의 신뢰를 얻었고, 평양에 들어가 김정일 북방위원장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 사업까지 성사시킨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지 않은가. 윤종빈 감독이 이 사건을 첩보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지점이다.

첩보영화로서 <공작>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본 시리즈’처럼 액션 신도 총격 신도 폭파 신도 없다. 프락치로 의심받는 영국 정보국 관료 네명의 물고 물리는 이야기를 통해 윤리성과 양심을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스파이들의 서늘함을 그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2)와도 다르다. 냉정하고 차가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달리 흑금성이 스파이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순간 서사가 부글부글 끓는다는 점에서 <공작>은 뜨거운 영화다(<공작>을 두고 존 르 카레의 소설이나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특히 ‘무드’)가 연상된다는 평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오히려 주인공이 공작(혹은 협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속내(혹은 손에 쥔 협상 카드)를 감춘 채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신뢰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작>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스파이 브릿지>(2015)와 닮은 구석이 많다. <공작>은 (공작원의) 접근과 (상대방의) 의심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는 이야기다.

박석영과 리명운 처장, 정무택 보위부 과장(주지훈) 세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은 총성 없는 전쟁터다. 여기서 공작 선수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공작>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그들은 말과 말 사이에 온갖 덫과 함정을 놓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이 과정에서 박석영은 막다른 길에 몰릴 때마다 도리어 큰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는 등 과장된 행동을 하는데 그 모습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어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따라잡기 벅찰 만큼 많은 정보량을 담고 있는 이들의 대화는 각자의 상황과 서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서사에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배를 채웠나

남북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로서 <공작>은 이제껏 한국영화가 보여준 북한 풍경과 다른 스펙터클을 전시한다. 남북 정상회담 뉴스로만 접했던 평양 순안국제공항부터 하늘 위에서 바라본 대동강 전경,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광복거리, 흑금성이 탄 차의 창밖으로 넌지시 보이는 평양 시내, 평양 대성산에 있다는 주석궁까지 영화 속 평양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평양과 반대로 영화의 중반부 흑금성이 찾아가는 영변의 장마당은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이 쓰러져 있고, 몇몇 사람들은 산처럼 쌓인 시체를 뒤지는,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을 펼쳐낸다. 흑금성의 눈에 비친 장마당은 북한이 개혁·개방을 위해 시도한 시장경제체제치고는 초라하다 못해 처참한데, 그래서 더욱 외화벌이에 골몰해야 하는 리명운의 딜레마를 상징하는 듯하다.

윤종빈 감독은 흑금성의 공작을 통해 적을 무력화하는 데서 발생하는 장르적 쾌감에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인다. 공작의 목표가 흐릿해지는 순간 스파이로서 흑금성의 정체성도 덩달아 흔들리는데, <공작>은 이 변화를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북핵의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북핵을 어떻게 이용했나, 한반도의 냉전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배를 채웠나, 스파이 흑금성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작을 했나. 20년 전 일이지만,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연달아 열리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지금, <공작>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기사에서 실화와 관련된 내용은 <공작> 1권(김당 지음), <시크릿 파일 반역의 국정원>(김당 지음), <신동아> 기사 ‘공작원 흑금성! 北 보위부 침투, 김정일 만나다’,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흑금성 특집’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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