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단관 현장, '허스토리언'들이 모인 이유
2018-08-09
글 : 임수연 | 사진 : 최성열 |
<허스토리> 단관 현장, '허스토리언'들이 모인 이유
7월 28일, <허스토리> 3차 단관 현장.

“세상 힙한 김희애.” 지난 7월 28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배우 김희애가 ‘8비트 떠그 라이프 선글라스’라 불리는 안경을 끼고 머니건을 쏘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아이돌 팬 사인회 최신 유행 아이템을 두른 그의 모습은 최근 자체적으로 상영관을 마련하고 있는 <허스토리> 팬덤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날 저녁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20관에서 진행된 <허스토리> 3차 단체 관람(이하 단관)에 참석한 380여 관객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는데, 아이돌 그룹 혹은 젊은 배우 팬덤과 비슷한 모습으로 문정숙 역의 김희애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직접 플래카드를 만들어오고, 여기 저기서 “사장님 멋있어요”, “아! 귀여워!” 같은 사랑 고백이 쏟아지는 분위기에서 김희애는 영화 속 대사 “돈은 내 좋다고 따라다닙니더!”를 외치며 객석에 가짜 돈을 뿌린다든지, 극중 신 사장(김선영)에게 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키스를 해달라는 여성 팬을 꼭 안아주는 등 다양한 팬 서비스를 선보였다.



7월 28일, <허스토리> 3차 단관 현장.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적극적인 팬덤을 만든 작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신세계>(2012),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 등 이미 알려져 있던 중년 남성 배우의 새로운 매력을 발굴해준 작품이거나, 혹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아가씨>(2016), <연애담>(2016) 등으로 이어진 젊은 여성배우 주연 퀴어물이다. <허스토리>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허스토리>의 팬들은 기존 팬 문화의 방식으로 환호받는 대상이 남성, 젊은 여성이 아닌 중·장년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계에 부족했던 중·장년 여성 영화에 대한 지지가 영화 밖으로 확장된 결과다. 일명 ‘허스토리언’들은 <허스토리>가 여성영화로서 가진 가치, 특히 여성영화 카테고리 안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적 없었던 중·장년 여성의 이야기라는 희소성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허스토리> 단관 스탭으로 참여한 김효진씨는 “포스터에 여자가 많이 나오는 영화, 평평하지 않은 서사를 가진 여성 캐릭터에 목이 마르던 차에 <허스토리>를 만났다”고 전했다. 트위터리언 예스토리언은 “<허스토리>는 전쟁이 가장 잔혹한 형태의 ‘가부장적 폭력’이라는 점을 지적한 상업영화다. 또한 지금까지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장치로서만 기능했던 수많은 중·장년 여성 캐릭터들이 입체적인 주역으로 활약했다. 쟁쟁한 대배우들이 지금까지 작품에서 주인공 엄마 1, 2, 3… 역할만 맡아서 늘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그 갈증을 해소해줬다”며 영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특히 위안부 할머니 관부 재판을 돕는 여성 경제인 문정숙 캐릭터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다. <허스토리> 2, 3차 단관 총대 하현주씨는 “한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 캐릭터 설정에서 성별만 바뀌었는데도 되게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트위터리언 예스토리언은 “90년대 초·중반의 부산과 ‘부산 여자’의 기질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 똑같은 ‘내가 낸데!’ 정서라도 여자 가슴에 손 넣으면서 ‘살아 있네!’ 하는 남자 조폭보다는 ‘내가 손댄 것 중에서 실패한 게 있더나?’ 하며 관부 재판을 이끌어가는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행사 여사장님이 더 멋있지 않나”라며 문정숙을 여성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캐릭터에 비유했다.



7월 21일, 이설 배우(오른쪽)가 함께 한 <허스토리> 2차 단관 현장.

때문에 <허스토리> 팬덤 활동이 페미니즘적 연대의 성격을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1, 2차 단관 때는 문정숙의 실제 인물인 김문숙 대표가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및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위한 모금을 추진해 약 273만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무엇보다 좋은 여성영화를 더 많은 여성과 공유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개봉 2일차에 홍대쪽에서도 아침과 새벽 시간대밖에 없을 만큼”(하현주씨) 극심했던 상영관 부족은 ‘권하고 나누는’ 릴레이 단관 문화로 이어졌다. 지난 7월 15일부터 시작된 <허스토리> 단관은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주말마다 열리고 있고, 3차 단관의 경우 1시간 만에 380여 좌석이 마감됐다. 하현주씨는 “1차 단관 때만 해도 좌석이 마지막까지 채워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SNS에 알리자 많은 분이 자체적으로 다른 여초 커뮤니티에 홍보를 해줘서 결국 단관이 성사됐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팬들이 많고, 일정이 맞지 않는 경우 ‘영혼 참석’이라며 돈만 내거나 시간 되는 사람은 누구나 가서 작품을 보라며 무료로 표를 나누기도 한다”면서 단관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여기에 <허스토리>의 세계에 레즈비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후일담은 일부 팬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성 소수자의 연대까지 끌어내고 있다. 지난 7월 15일 롯데시네마 은평에서 진행된 <허스토리> 1차 단관 현장에서 민규동 감독은 문정숙의 딸 혜수(이설)와 선생님(한지민)에 얽힌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민규동 감독의 동명의 단편 <허스토리>(1995)와 연결된 설정으로, 선생님은 과거 학창 시절 친구와 키스를 했다가 강제전학을 갔고 ‘후회하지 말자’는 급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혜수의 자퇴 이유에 그가 선생님에게 갖는 특별한 마음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날 객석에서 가장 반갑고도 뜨거운 반응이 쏟아진 순간이었다.



7월 28일, <허스토리> 3차 단관 현장.

엄마 혹은 고모 말고 다른 배역이 필요한 이유



영화 팬으로 시작해 주연배우의 열성 팬이 된 수많은 사례는 <허스토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허스토리>의 팬들 역시 “김해숙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80년대 작품까지 찾아봤다”(김효진씨)거나 “예수정 배우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다. 이번에 개봉한 <행복의 나라>도 바로 극장에 가서 봤다”(트위터리언 예스토리언)며 배우 자체를 응원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 연대에 뿌리를 둔 ‘덕질’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계의 한계를 투명하게 비춘다는 점이다. 트위터리언 예스토리언은 “그동안 광고 이미지 때문에 김희애 배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송강호, 최민식 같은 배우들만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인생을 혁명에 꼴아박으며 성장하는 소시민’ 서사를 충분히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배우다. 다들 정말 뛰어난 배우들인데 오로지 여성, 혹은 ‘중·장년 여성’이라는 이유로 판에 박힌 역으로만 만나야 하는 게 너무 답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정 배우님이 꼭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처럼 건조한 화이트칼라 고학력 살인마 같은 역할을 맡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팬덤 내의 자각은 바깥세상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앞서 언급한 김희애의 ‘세상 힙한’ 사진은 <허스토리>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중년 여배우가 얼마나 뻔한 이미지로만 노출됐는지 역으로 깨닫게 하고, 그것을 깨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는지 증명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적 소비를 넘어서서 영화계 전체의 선입견에 딴죽을 거는 <허스토리> 팬덤은 보다 직접적인 행동도 취하고 있다. 민진수 수필름 대표는 “개봉 2주차에 상영관이 턱없이 줄어든 것에 대해 제작사나 다른 영화인보다 먼저 반응하더라. 극장에 문의를 하고,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와 왜 이리 영화를 보기 힘드냐며 항의를 했다”고 전했다. 해외에서 개인적으로 단관을 추진하고 싶다는 문의도 들어온다. 그리고 지금 <허스토리>의 팬덤은 ‘재개봉’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 투자·배급사 NEW 메일 계정이나 SNS계정에 이를 요청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영화를 통해 여성 연대를 도모하고, 여성 연대를 통해 영화를 사랑하고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팬덤이 탄생했다.

이어지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