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크루즈를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려준 <탑건>이 8월29일 재개봉했다. <탑건>은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동생, 토니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2년 8월20일 LA의 토마스 다리에서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020년 북미 개봉 예정인 속편 <탑건: 매버릭>도 원래는 그가 연출을 맡기로 했다. <탑건> 재개봉과 토니 스콧 감독의 기일(8월 19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그의 대표작을 돌아보며 그를 기억해보려 한다.
화가, 광고감독, 영화감독
영국 출신의 토니 스콧 감독은 7살 형인 리들리 스콧 감독이 수석으로 졸업한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졸업 직후 그는 화가로 활동했지만 이내 형의 영향으로 영화로 눈길을 돌린다.
1970년대 초까지 단편 영화를 만들던 그는 형이 운영하던 광고회사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광고를 제작했으며 칸국제광고제에서 수차례 입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3년, 다시 영화로 복귀해 뱀파이어 소재의 첫 장편 영화 <악마의 키스>를 연출한다. 토니 스콧은 미술학도 출신답게 <악마의 키스>에서 화려한 영상과 프로덕션 디자인을 자랑했다. 그러나 비주얼에만 치중한 영화는 평단의 혹평과 아쉬운 흥행을 기록했다.
<탑건>으로 스타덤
토니 스콧 감독은 화려한 데뷔에는 실패했지만 2년 뒤 미국의 영화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러브콜을 받는다. 현재는 영화계의 거물이 된 제리 브룩하이머는 당시에 <플래쉬댄스>, <비벌리힐즈 캅>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미다스의 손’이 되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그런 그와 토니 스콧이 함께 만든 첫 작품이 <탑건>이다. <탑건>은 제작비의 2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며 당대 최고의 히트작이 된다. 최초로 실제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땀 냄새 진동하는 젊은 파일럿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토니 스콧, 제리 브룩하이머는 이 작품으로 스타 감독, 제작자가 됐다.
<탑건>으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토니 스콧 감독은 이후에도 주로 대중성이 짙은 영화를 연출했다. 다시 제리 브룩하이머와 만나 에디 머피 주연의 코미디 영화 <비버리 힐스 캅 2>를 연출했다. <탑건>의 톰 크루즈가 비행기에서 자동차로 갈아탄 듯한 카레이싱 소재의 청춘 액션물 <폭풍의 질주>도 있다. 이외에도 <다이 하드> 시리즈로 입지를 다진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마지막 보이 스카웃>,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각본을 쓴 <트루 로맨스> 등을 연출했다. 대중적인 입맛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 토니 스콧 감독은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 감독 중 한 명이 됐다.
액션과 스릴러의 절묘한 조화
화려한 액션과 낙관적인 분위기를 보여줬던 그는 <크림슨 타이드>를 계기로 작품세계에 변화를 준다. 액션영화에 스릴러 요소를 더하기 시작했다. <크림슨 타이드>는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극한의 상황, 핵잠수함 속 인물들의 갈등을 그렸다. 영화는 그간 그의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쫄깃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잠수함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오는 압박감도 이를 극대화했다. 그전까지 관객들의 사랑은 받았지만, 평단으로부터는 외면당했던 토니 스콧 감독은 이 작품으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크림슨 타이드>는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덴젤 워싱턴과 처음 호흡을 맞춘 영화기도 하다.
이후 그는 스포츠와 스릴러를 결합한 로버트 드니로,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더 팬>을 연출한다. 그러나 역시 그의 스릴러 대표작은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일 듯하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감시’를 소재로 국가기관의 암행에 맞서는 인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공위성으로 지상을 내리꽂는 듯한 화면 구성 등 독특한 촬영기법을 선보였다. 액션을 위해 첩보를 소재로 쓴 것이 아니라 첩보라는 스토리에 집중한 채 액션을 적절히 곁들인 느낌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위기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역시 잃지 않았다. 토니 스콧 하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스릴 넘치는 액션영화가 떠오르는 것도 이 작품의 몫이 크다.
그의 페르소나, 덴젤 워싱턴
톰 크루즈, 로버트 드 니로, 윌 스미스 등 쟁쟁한 배우들과 협업한 토니 스콧 감독. 그중 그의 페르소나는 명실상부 덴젤 워싱턴일 듯하다. <크림슨 타이드>로 처음 협업한 두 사람은 이후 네 편의 영화에서 함께했다. 미국판 <아저씨>라고 불리는 <맨 온 파이어>도 두 사람의 작품이다. 사실 <맨 온 파이어>가 <아저씨> 보다 6년이나 일찍 나온 작품이다. <말콤 X>, <허리케인 카터> 등의 작품으로 이미 명배우로 자리매김한 덴젤 워싱턴과 토니 스콧 감독은 좋은 시너지를 냈다.
덴젤 워싱턴은 토니 스콧 감독의 연출 인생 막바지를 함께 했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맨 온 파이어> 후 토니 스콧 감독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도미노>를 제외하고 모든 작품을 덴젤 워싱턴과 함께 했다. <데자뷰>, <펠햄 123>, <언스토퍼블> 세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은 폭발, 열차 사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비록 큰 흥행을 거둔 작품은 없지만 그의 연기는 토니 스콧 영화 특유의 긴박한 호흡과 잘 어우러지며 액션 장르의 쾌감을 이끌어냈다.
2012년, 토니 스콧 감독의 죽음에 덴젤 워싱턴은 공식 성명서를 통해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토니 스콧은 훌륭한 감독이자 진정한 친구였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깊은 애도와 슬픔을 표한다”고 말했다.
연출자가 아닌 제작·기획자로
그는 2010년 <언스토퍼블>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형 리들리 스콧, 오랜 친구 제리 브룩하이머 등과 함께 주로 제작·기획자로 크래딧 이름을 올렸다. 1990년대부터 <웨어 더 머니 이즈>, <당신이 그녀라면> 등의 작품의 제작·기획을 맡아왔던 그는 2009년 드라마 <굿 와이프>, 2010년 <A-특공대>의 제작,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도 그가 제작·기획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그리고 2013년 개봉한 <아웃 오브 더 퍼니스>를 마지막으로 그의 영화 필모그래피는 끝이 난다.
2012년 갑작스레 자살로 생을 마감한 토니 스콧 감독. 그의 죽음은 많은 영화인,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앞서 언급한 덴젤 워싱턴을 비롯해 톰 크루즈,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등 많은 이들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의 자살이 앓고 있던 뇌종양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으며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토니 스콧 감독은 유서를 남겼지만 유족들의 요청으로 비공개됐다.
비평적인 성취보다는 주로 흥행작들을 남긴 토니 스콧 감독. 그러나 그는 독특한 촬영 기법,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스토리텔링 등으로 대중을 입맛을 저격한 감독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분명 그는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영화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의 <탑건> 속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대신 그가 선보였던 여러 영화들을 다시 꺼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킬링타임으로 즐겼던 영화들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