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7)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다큐멘터리 전반을 짚어보는 글과 김혜리 기자가 2017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감독과 만나 진행했던 인터뷰를 지면에 전한다.
<내셔널 갤러리>(2014)에 이어 국내 극장 개봉의 기회를 얻은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원제는 ‘아무개의 서가로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Ex Libris’다. 꽤 재치 있는 작명인데, 고풍스런 장서표의 글귀를 제목으로 선택한 이 다큐멘터리가 드러내는 현대 공공 도서관의 활동은 라이브러리 하면 떠오르는 열람실과 서고의 이미지를 훌쩍 넘어서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 공립 도서관은 장서를 관리하고 학자의 연구를 돕는 본연의 기능은 물론 어린이와 이민자를 위한 무상 기초교육 및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고속 랜선에서 소외된 300만 시민에게 인터넷 접근권을 제공한다. 창작자를 위해 세계 최대 무상 이미지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뉴욕 인구 1/16을 차지하는 다양한 장애 시민이 도서관의 리소스를 활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한다. 유수한 저자의 강연과 토론이 이뤄지는 동시에 부유한 개인의 후원을 독려하는 우아한 이벤트가 공적 기금과 사적 자본을 결합한 재정을 지속시킨다. 90여곳의 분관은 관할구역의 문화와 필요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95분에 걸친 지식과 정보를 둘러싼 인간 활동의 프레스코화를 관람하다보면 관객은 불현듯 도서관뿐 아니라 모든 계급과 인종을 아우르고 미국의 다양성과 포용력을 상징하는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테마는 특정 도서관의 이례적 우수성도 아니며 공공 도서관의 중요성도 아니다. 핵심은 자본과 기술을 활용해 교양을 공유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이고, 이는 1967년에 시작된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40여편 필모그래피를 관류하는 주제다.
예일대 법학과를 졸업한 와이즈먼은 파리에 체류하며 영화에 대한 관심을 단편 제작으로 실천했고 귀국해 보스턴 로스쿨 교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꿈꿨다. 와이즈먼 연대기의 시작은 법학도를 인솔해 방문한 매사추세츠 주립 범죄 정신병원을 찍은 <티티컷 폴리스>(1967)였다. 이후 와이즈먼은 학교(<하이스쿨>(1968), <하이스쿨2>(1994), <버클리에서>(2013)), 무용단(<발레>(1995), <라 당스>(2009), <크레이지 호스>(2011)), 지역(<벨파스트, 메인>(1999), <인 잭슨 하이츠>(2015))를 비롯해 체육관, 공원, 모델 에이전시, 미술관, 법정, 동물원 등 미국과 프랑스의 40여개 사회기관 및 공동체를 관찰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가히 영화로 이뤄진 백과전서라 칭할 만한 평생의 작업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은 자신의 거시적 주제를 “인간행위의 다양한 면모”라고 요약한다. 단, 와이즈먼 감독이 관심을 갖는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래서 와이즈먼 다큐멘터리는 단일 주인공이 없다. 1인칭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커녕 화면 속 인물의 이름과 직함을 표시하는 자막조차 없다. “경찰에 관한 다큐를 한명의 경찰관을 따라가며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인물은 과한 대표성을 갖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감독이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나 화면 밖 음악도 배제한다. “인터뷰는 영화로 보기보다 읽거나 듣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영화에서는 관객이 보고 듣는 것들 자체가 이해를 끌어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인위적으로 간추리고 결론을 내는 장치가 전무한 와이즈먼 영화의 러닝타임 평균은 3시간 언저리다.
과학자의 그것처럼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방법론은 엄격하다. 50년의 사회정치적 변화, 디지털 필름메이킹으로의 이행을 거치면서도 그의 메소드는 놀랄 만큼 변화가 없다. 첫걸음은 기관의 섭외다. 홍보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통제구역 없는 접근권과 감독의 완전한 편집권을 요구한다. 찍히기를 거부하는 개인의 요구는 수용한다. 섭외가 성사되면 6주에서 3개월 사이의 촬영이 시작된다. 건물 내 동선 파악과 일반인용 안내 팸플릿 정도가 사전 준비의 전부고 별도의 오리엔테이션도 받지 않는다. 찍는 과정이 곧 리서치이고 판단이라는 것이 와이즈먼의 신념이다. 자연사 다큐멘터리 경력이 있는 존 데이비 촬영감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만하면 오늘 이 자리는 다 찍었다 싶을 때 사인을 보내고 30분 더 찍을지 말지는 감독이 결정한다. 프레더릭에게는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관한 예지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프레더릭 와이즈먼 다큐멘터리의 정수가 오래 찍고 자세히 찍는 촬영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결정적 장소는 편집실이다. 10개월에서 1년에 달하는 편집과정은 다시 단계가 세분화된다(이어지는 인터뷰 참조). 와이즈먼에게 편집이 갖는 중요성은 본인의 영화를 ‘무비’라고 즐겨 부르는 그의 습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와이즈먼이 거듭 강조하는 극적 내러티브는 주인공이나 클라이맥스가 있는 스토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요소를 철저한 배제한 순수한 영화적 긴장과 리듬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편집은 자문의 과정이다. 다 마치고 나면 모든 장면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내가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는 전달하는 정보도 재미있지만 영화적으로도 매혹적이다. 주로 프레임의 아름다움보다 유려한 리듬이 원인이다. 음악을 쓰지 않지만 음악적이고 팩트만을 필름에 담지만 시적이다. 시퀀스 내부의 리듬과 시퀀스끼리 형성하는 외적 리듬을 찾아내는 편집 과정에서 와이즈먼 감독이 적극 활용하는 요소는 컷 어웨이 숏과 익명의 얼굴들이다. 토론과 대화의 장면 사이를 채우는 건물의 외경과 거리의 풍경들, 침묵과 소음의 인서트숏은 주도면밀하게 배치된 날숨의 공간이다. 예컨대 <내셔널 갤러리>를 여는 미술관 관리팀 노동자의 진공청소기 소리는 거대한 문화적 기관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영화 속 갤러리가 문 열기를 기다리는 관객에게 주어진 멋진 서주이기도 하다. 한편 강연과 회의 시퀀스에서 와이즈먼은 말하는 인물 못지않게 말없이 듣는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데에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만 봐도 다수의 장면이 화자가 아닌 듣는 이의 얼굴로 시작해 말하는 사람의 숏으로 옮아간다. 스피치의 내용이 아니라 해당 공간에서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가 와이즈먼 영화의 진짜 제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이 그토록 중시하는 이른바 드라마는 이 익명의 얼굴들에 의해 성립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간혹 관객은 청중의 표정과 공기만으로 영화의 제재인 기관과 공동체가 갖는 의미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몇몇 초기작은 병원, 군 훈련소 등을 다루며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폭력성을 공론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가 긍정적 사회 변화를 불러온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그것은 부산물일 뿐 영화를 만드는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시대와 지역의 태생적 조건에 의해 와이즈먼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은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요컨대 와이즈먼 감독을 움직이는 동기는 작품마다 특정한 단일 기관을 깊게 관찰함으로써 현대사회가 지탱되는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데뷔 50주년에 발표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도 집대성이 아니라 방대한 전집의 한권일 뿐이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가 나온 지 1년 만인 올해,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신작 <먼로비아, 인디애나>를 공개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주의 1천여명이 사는 소도시의 일상을 주시한 작품이라고 한다. 신작과 더불어 개봉되지 못한 와이즈먼의 작품들을 한국 스크린에서 열람할 기회를 기다리며, 2017년 가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프레더릭 와이즈먼과의 문답을 이어지는 지면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