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과 크리처가 만났을 때의 신선한 긴장감이 반가웠다.” 현빈의 말대로 <창궐>의 조선은 쇠약해진 왕권을 노리는 신하들과, 원인 모를 야귀떼의 공격으로 팽팽한 긴장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연기한 이청은 청나라에서 장안의 호걸로 이름을 날린 뒤 조선으로 돌아온 왕자다. <공조>(2016)에서 이미 그의 재능을 실감한 바 있던 김성훈 감독은 일찍부터 현빈을 적임자로 내다봤다. 그래서일까. <창궐> 속 이청은 현빈의 매력을 적재적소에서 영리하게 펼쳐 보인다. 역모를 꿈꾸는 김자준(장동건)에 대적하는 가운데, 이청은 능청스러운 입담과 함께 날렵한 액션을 선보이고, 이내 소명으로 일깨워진 반듯한 눈을 빛낸다. 피와 살점이 튀어오르는 전장 속에서도 조선의 왕자는 청초한 기운을 잃는 법이 없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역사가 다소 비극적이었던 것에 반해 <창궐>의 이청은 영웅적 인물이라 쾌감을 낳는다.
=정황상 인조 재위 시절을 떠올릴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창궐>은 왕의 이름을 ‘이조’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정했듯이, 역사적 재현보다는 야귀떼가 날뛰는 판타지적 세계에 집중한 작품이다. 나 역시 조선의 왕자인 이청이 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뒤 겪게 되는 변화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는 내적 활동에 보다 집중했다. 이야기 초반에 이청은 분명 왕위나 나라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는 냉소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야귀와 싸워나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성장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청나라의 신문물에 매혹된 풍운아이면서 반듯한 지도자의 이미지도 있는 등 이청의 다채로운 면모가 기대된다.
=인물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꼼꼼한 계산이 필요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선 다른 캐릭터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에서 조선까지 늘 동행하는 학수(정만식), 야귀떼에 맞서 함께 싸우는 박종사(조우진), 덕희(이선빈) 등 주변 인물들이 이청을 돋보이게 만들어줬다. 대체로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이 진행되어서 동료 배우들과의 교감이 편안하고 풍부하게 이뤄졌다. 찬찬히 퍼즐을 맞추듯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창궐>은 그동안 갈고닦은 액션 실력도 물오른 작품이 될 것 같은데.
=김성훈 감독님의 전작과 비교해보자면, <공조>의 액션은 살상 무술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반드시 가해해야 하는 과정에서 일대일로 붙는 밀착 액션이 많았다. 반면 <창궐>엔 확실히 색다른 화려함이 있다. 일반 칼보다 훨씬 길고 무거운 장검을 사용했는데, 한손으로 칼을 드는 동작도 많아서 훈련에 힘썼다. 힘이 느껴지면서도 칼선이 살아 있어야 했다. 막상 촬영장에선 야귀떼가 끝도 없이 나와서 힘들더라. 죽여도 죽여도, 이어지는 신마다 계속 나온다. (웃음)
-현장에서 만난 야귀들은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했나.
=생각했던 모습보다 훨씬 디테일이 살아 있더라. 야귀 분장에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연진 모두 특유의 몸짓이나 행동을 오래 연습해온 것이 느껴졌고, 극의 흐름에 맞추어서 점점 변이되어가는 야귀 분장의 강도가 세졌기 때문에 나로서도 훨씬 몰입이 수월했다.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장동건 배우와 작품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고보니 동건이 형을 알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들을 함께했지만, 배우로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라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하더라.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자랐는데, 어느덧 그와 같이 작업한다는 사실이 무척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김성훈 감독님이 김자준 캐스팅을 앞두고 내가 먼저 동건 선배에게 출연을 권유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선배가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뒷일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동건 선배가 감독님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뻤다.
-<역린>(2014) 이후 스크린에서 장르를 섭렵하며 배우로서 몸집을 불려왔다. 그즈음이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본인에게 지난 4년은 어떤 의미였나.
-20대엔 본의 아니게 영화와 드라마를 한편씩 번갈아가면서 작업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각각의 방식과 재미를 골고루 느꼈다. <역린> 이후로는 영화가 수적으로 많은데,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상업적인 혹은 오락적인 요소를 갖춘 작품들이 지니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긍정하게 됐다. 관객이 2시간 동안은 적어도 아무런 걱정 없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내 직업의 분명하고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슬슬 현빈의 정통 멜로 혹은 로맨틱 코미디를 기다린다는 팬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껏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일부러 강한 장르만 택해온 것은 아니다. 30대에서 보여드릴 수 있는 로맨스의 결은 이전과 또 다를 것 같아서, 나 역시 멜로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