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 - 1순위의 배우
2018-11-13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국민들은 지금 상황에 대해 최소한의 알 권리가 있는 겁니다!” IMF 외환위기 선고 일주일 전, 국가부도의 위기 앞에서 대책을 강구하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이권과 무능을 앞세운 차관, 경제수석, 심지어 대통령 앞에서도 제 잇속 차리지 않고 할 말 다 하던 전문가 한시현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바라는 히어로이자, 그래서 열망을 담은 판타지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40대, 여성, 전문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당당함…. 한시현이 가진 요소들을 열거해본다. 이성과 감정이 한치 흐트러짐 없이 공존하는 인물, 한시현을 캐스팅하라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 배우 김혜수 말고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왜 IMF 외환위기를 되돌아볼까, 라는 의문이 무색하게 그간 한국 사회에서 드러난 재난 대처 상황과 흡사해 보이더라.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밤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읽는데, 처음엔 편히 기대 보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더라. ‘헬조선’의 뿌리가 그때 다 생긴, 대한민국의 기반을 바꾼 굉장히 큰 기점이었는데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지난 거다. 나부터도 성인이었는데도 잘 몰랐다. 그런 안일한 대처가 어느 시기, 어느 정권의 문제일까. 너무 많은 사건을 겪어왔지만, 달라진 게 없었던 거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영화는 내가 하든 안 하든 반드시 만들어야 하고, 꼭 재밌게 만들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시현은 명분과 정의를 실행하고, 결정권자들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 히어로라는 측면에서도 지켜보게 되는 캐릭터다.

=당시 금융 사회, 공무원 사회는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고 숨막혔을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신념과 소신이 일치하는 인물, 누구도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상황에서 발언하는 인물, 그리고 위기를 끝까지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인물, 한시현은 그런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에 남자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그게 부자연스럽거나 애써서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한시현은 투사 같은 인물은 아니다. 자기 소신대로, 신념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 PD가 여성이어서 굳이 여성으로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 그 지점이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소신 있고, 당당하고, 전문 영역에 능통한 한시현은 시나리오만 봐도 배우 김혜수가 연상된다. 김혜수가 가진 상징성과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부쩍 높아지는 시대다.

=활동을 오래 하다보니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도 있고, 최근 10년 동안 쌓인 캐릭터의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김혜수’가 아니더라도 그런 열망을 수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다. 이 일을 하면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게 주가 되지는 않는데, 마음이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다른 걸 고려하지 않게 된다. 물론 나는 연기가 직업인 사람이니 작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어필하고 파장을 주는 게 훨씬 유리하기도 하고,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거침없는 첫 등장부터 걸음걸이, 외형, 말투 등, 한시현은 너무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되 한편으로는 전형적으로 기대되는 지점도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상식적으로 예측 가능한 인물인데, 또 생각해보면 당시 실제 고위공무원 중에 한시현 같은 여성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스탭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협업했다. 대사량도 상당했는데 전문적인 경제용어로만 채워졌다. 제작진한테 “경제 뉴스를 봐도 이해를 잘 못하는 성인 기준으로 설명을 해달라”고 특별 요청을 했다. 그래서 전문가한테 수업을 들으면서 따라갔다. 특히 지금껏 대사나 발음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발음이 안 되더라. (웃음) 매일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고, 보고서를 검토·작성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사람인데 발음이 안되는 건 말이 안 됐다. 정말 시험 보기 전에 단어 외우듯이 익혔다. 그런건 결국 쉽게 가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

-30년 넘는 연기생활에, 또 한편의 필모그래피가 더해졌다. 기대와 함께 책임감도 커져간다.

=최근에 한 후배가 진지하게 묻더라. 주인공의 무게를 안고 책임감을 느낄 때 어떻게 하냐고. 답변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모르겠더라. 연기를 오래 했는데도 솔직히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간 것도 많았다. 늘 내 것 하기에 너무 바빴다. 내가 송강호, 조우진 배우처럼 연기를 어마어마하게 잘해서 후배들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이제 선배가 됐지만, 뾰족한 수는 없더라. 조금 아는 걸로 급급하게 연기하던 시절을 보냈고, 이제는 매번 긴장하면서 하고, 후배들이 더 잘하면 바짝 긴장하고 그런다. 연기 잘하는 사람들 보면 눈물 나도록 부럽기도 하다. 오래 해도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많이 한다. 진짜로. (웃음) 다만 엄살떨지 않는다. 당연히 내 몫은 받아들이고 계속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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