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 있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모두가 위기라고 말할 때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 <국가부도의 날>의 윤정학은 그런 인물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철저하게 즉물적이면서도 결코 돈의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배우 유아인이 윤정학을 연기한다. 그는 전작 <버닝>(2018)이 “확장적 형태에서 영화예술에 대한 고민과 성취와 과제를 안겨준 영화”였다면, <국가부도의 날>은 “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세계의 형태를 탐구하고, 직업배우로서 상업영화의 현실적 성취를 관객에게 안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한 영화라고 말한다.
-IMF 외환위기 당시를 소회한다면.
=뚜렷한 기억은 없다. 당시 12살이었는데, 아버지가 고모부와 함께 대구에서 섬유사업을 하시다가 타격이 좀 있었던 것 같고. 다만 영화에 삽입된 뉴스 장면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기회 삼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윤정학은 참고한 실존 인물이 있을지 궁금한 인물이다.
=딱히 롤모델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IMF 당시 정학과 비슷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위기에 매몰되기보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호위호식하던 사람들. 그들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내면의 흐름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걸 상상하며 연기했다.
-금융맨을 연기하는 건 처음인데 캐릭터의 특징을 어떻게 만들어갔나.
=평범한 은행원을 상상하며 연기하지는 않았다. 위기를 감지한 뒤 은행문을 박차고 나올 정도의 감각을 가진 인물이라면 자기 나름의 개성이 있을 거란 판단에서다. 이 영화가 IMF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이전의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모습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멋이라는 게 폭발하던 시대 안에서 자기 멋을 가진 인물로 표현했다. 과감한 옐로 컬러의 옷이라든지 가죽 재킷 등을 입어 패셔너블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자신은 ‘국가부도’에 투자했음에도 베팅으로 돈을 번 자들에게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마”라고 쏘아붙이는 정학의 태도가 흥미롭다.
=그 대사가 주는 울림이 나에겐 굉장히 컸다. 단순히 악인으로, 기회주의자로 단언할 수 없는 정학의 복합적인 면모와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테랑>(2014)의 조태오 같은 캐릭터는 완전히 일그러진, 개념을 상실한 악인이었다. 하지만 정학은 행위 자체는 지탄받을 수 있겠으나 내면적인 복합성이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런 면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본다.
-<버닝>에 출연한 이후 바로 <국가부도의 날>에 합류했는데.
=그래서 첫 촬영 들어갈 때 현장에 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NG를 많이 냈다. 이창동 감독님의 현장은 완전히 모든 것들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곳이었다면, 여기는 완전히 중무장을 하고 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장이더라. 그러다보니 몸을 단단하게 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연습이 부족했던 것 같고,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극중에서 정학은 “살다보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 있고 지금이 그때”라는 말을 한다. 인간 유아인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다면.
=너무 뻔하고 재미없을 수 있지만, 매 순간인 것 같다. 다가오는 기회들, 사건들, 큼지막한 인생의 변곡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흘러가는 삶의 변화라는 건 그다지 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이 세속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변곡점이라는 것이 굉장히 정해진 듯 흘러간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요즘에는 최근 출연했던 <버닝>이 나에게 준 어마어마한 변화들을 생각하다가 외려 나의 역사를 더 앞질러 처음 집 밖으로 나서던 순간이 굉장히 선명하게 기억나더라. 재밌는 것 같다.
-얼마 전 도올 선생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로부터의 영향을 짐작하게 하는 답변이다.
=나는 한명의 배우이자 예술가이고, 선생님은 사상가이고 철학가다. 우리가 전혀 다른 영역에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세상을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의 하모니가 세상에 어떤 파장을 줄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며 시대정신과 대한민국에 대한 고찰을 새롭게 가져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