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를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개봉 시기에 극장에서 관람을 마치면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 매체를 구입하거나 혹은 굿즈를 구입하거나 혹은 연말 각종 시상식을 꼭 챙겨 보는 것으로도 올해 관객과 만난 수많은 영화들을 되돌아볼 수 있다. 매년 연말이면 <씨네21>이 꼭 준비하는 ‘B컷으로 되돌아보는 한국영화 촬영현장’ 기사 역시 올해에 어떤 영화가 왜 관객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이 기사는 매번 준비할 때마다 기자들이 수시로 각 영화 제작사, 배급사 등에 전화를 돌리며 일일이 사진 요청을 하고, 또 요청을 받은 담당자들이 다른 담당자를 찾고, 또 찾아낸 그 담당자들이 자료를 찾고, 결국 그렇게 찾아낸 자료를 또다시 여러 담당자들에게 공유해서 최종 컨펌을 받는 등 기사에 관여하는 모든 담당자들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 수고를 매년 거치면서도 또 매번 그만두지 않고 숨은 B컷을 찾아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사진들에 한해 동안 영화를 만든 모든 이들의 수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87> <강철비> <소공녀> <곤지암> <리틀 포레스트> <버닝> <공작> <신과 함께-인과 연> <독전> <마녀> <허스토리> <인랑> <챔피언> <안시성> <명당> <암수살인> <미쓰백> 이상 17편의 영화 촬영 현장 사진을 보며 올 한해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이 영화들의 또 다른 A급 매력을 발견해보시길.
<독전>
영화에선 컨테이너 밖으로 나오면 부둣가지만 촬영은 부둣가가 아닌 공터에서 컨테이너를 쌓아두고 진행했다. “사진은 리허설 때 찍은 거다. 이해영 감독이 직접 컨테이너 문을 열고 나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 된다고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러자 조진웅 배우가 장난으로 만세를 했고, 그 모습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정재구 스틸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독전>은 “회차마다 새로운 비주얼이 가득해 사진 찍는 맛이 나는 현장”이었다. 다행히 현장 사진은 최근 <독전 포토북>으로 출간됐다. “조진웅, 류준열 두 배우에게 포토북에 꼭 사인받고 싶다고 했더니 조진웅 배우가 그러더라. ‘가족끼리 무슨 사인을 받냐’고. 그 말을 듣고 ‘그럼 가족이 된 건가?’ 싶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웃음)”
“<독전> 현장에서 처음 김주혁 선배님을 만났다. 낯가림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었다. 한번은 촬영 대기하다가 짧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팬이라고 고백했다. ‘기회가 되면 현장에서 진하림 캐릭터 컷을 찍고 싶다’고도 말씀드렸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선배님의 사고사 소식을 들었다.” 진하림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겠다면서도 정작 카메라가 돌아가면 진하림의 눈빛으로 돌변했던 김주혁 배우를 정재구 스틸작가는 “진정 프로페셔널한 배우”로 기억했다.
<1987>
87학번 새내기 연희(김태리)가 만화동아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아 밖으로 나온 상황. 이후 강동원과의 진지한 대화 신을 찍기 전 김태리가 혼자 벽을 바라보며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재혁 스틸작가는 “사진을 보면 스탭들은 모두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김태리 배우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다음에 찍을 장면과 그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 <아가씨> 현장에서도 비슷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고 감정에 집중하는 배우다.” 1987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는 이재혁 스틸작가는 <1987>의 현장 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의미 있는 영화에 참여한 것, 더불어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라이브’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리틀 포레스트>
더플코트를 입은 모습에서 눈치챘겠지만, 혜원(김태리)의 고등학생 시절 장면을 촬영하던 날이다. 눈 쌓인 월정사 길을 걸어가야 하는 배우 김태리는 감정에 집중하고 있고, 의상실장과 분장실장은 배우의 머리와 옷에 눈을 뿌리고 있다. 민성애 스틸작가는 “김태리는 정말 사랑스러운 배우다. 김태리라는 아름다운 배우의 사계절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했다. 더불어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의 사계절을 모두 찍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욕심과 부담이 충돌했던 작품”이며 “손 큰 푸드팀이 스탭들에게도 음식을 나눠줘서 배도 마음도 따뜻한 현장”이었다고 한다.
<챔피언>
팔씨름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마크(마동석)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서트컷. 카메라 앞에서 온 힘을 쏟기 위해 그리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배우들은 물론 스탭들조차 <챔피언> 촬영장에서 팔씨름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팔씨름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해서 스탭들끼리 비공식 팔씨름 대회를 열지 않을까, 했는데 일종의 팔씨름 금기령이 내려졌다. 팔씨름이 요령 없이 했다간 부상당하기 쉬운 스포츠라는 걸 미처 몰랐다.” 정재구 스틸작가의 설명이다. 마동석 배우는 연기는 물론이고 팔씨름에 관해서도 더없이 진지했다고 한다.
<미쓰백>
<미쓰백>의 3회차 촬영은 “말도 못하게 추운 겨울날” 월미도에서 진행됐다. 바다를 바라보던 어린 지은(김시아)이 상아(한지민)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온기를 느낀다. 임훈 작가는 이 사진이 손 잡는 장면을 찍고 나서 두 배우가 모니터를 확인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날은 너무 춥고, 바람은 많이 불고, 중요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인데 아직은 촬영 초반이라 두 배우가 충분히 교감하기에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으면서 두 배우가 진짜로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임훈 작가는 한지민 배우를 두고 “정의롭고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한지민 배우의 정의로운 마음과 이지원 감독의 열정과 스탭들의 노력 덕에 “흥행보다 더 큰 영화적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고 <미쓰백> 스틸 작업의 뿌듯함을 전했다.
<안시성>
“영화 속 병사들의 처지와 스탭들의 처지가 비슷했다. 찍어도 찍어도 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적군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웃음) 전투신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길고 고단한 현장에서 실제로 조인성 배우는 장군 같았다. 스탭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롱패딩도 쏘고. 다들 ‘갓인성’이라 불렀다. 조인성 배우에게 받은 롱패딩은 올겨울에도 잘 입고 있다.” 김설우 스틸작가의 <안시성> 현장 회고담이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영화답게 고가의 촬영장비인 로봇암도 사용됐다. <안시성>에는 액션 장면에서 슬로모션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다 로봇암으로 찍은 것이라 한다.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촬영장비가 로봇암이다. 워낙 비싼 기계라 “가까이 가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고.
<소공녀>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남자친구, 담배, 한잔의 위스키는 포기할 수 없는 미소(이솜). 그런데 <소공녀>의 바 장면에 미소와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던가? “아쉽게도 편집됐다.” 김순모 PD는 “미소와 한솔 커플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장면이었는데 영화엔 들어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덩달아 이 장면에 보조출연으로 동원된 광화문시네마의 김태곤, 이요섭 감독도 출연한 것에 의의를 둬야 했다. 많이 알려졌지만 영화 촬영은 광화문에 위치한 바 ‘코블러’에서 찍었다. <소공녀> 개봉 이후 코블러에서 글렌피딕 위스키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참고로 이날의 스틸은 <족구왕>(2013)의 우문기 감독이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