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는 끝내 살아남은 할머니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생존시키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 다룬 성장영화다. (중략)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지금 현재 주목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고마운 영화다.” (변영주 감독) 12월 11일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변영주 감독이 묻고 민규동 감독이 답하는 <허스토리>의 스페셜 토크 행사가 열렸다.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작품은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중·장년층 베테랑 여성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허스토리언’이라 불리는 팬덤을 구축하며 여성영화를 소비하는 팬 문화의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한 2018년의 한국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허스토리>의 예고편이 상영되자 많은 관객이 주연배우들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각 캐릭터가 소개될 때마다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한편의 영화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연말 파티 같은 느낌이었다.
<허스토리> 스페셜 토크는 이 영화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감독의 오랜 인연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민규동 감독은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복잡한 과정이 담긴 제작 노트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며 본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로 변영주 감독의 영향을 언급했다. 그처럼 “<허스토리>는 <낮은 목소리>에서 파생된 작품”이기에, 민규동 감독은 변영주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싶어 초조했는데 변 감독에게서 ‘영화 좋다’는 문자를 받고 밤잠을 설쳤다고. 변영주 감독은 “<허스토리>가 지금처럼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첫 번째 발걸음은 ‘관부재판’이라는 스케일이 작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오랜 투쟁 과정에서 관부재판은 큰 심벌이 아니었다.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서 열린 재판이고, 위안부 피해자뿐만 아니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포함돼 있었기에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데 지역적인 전후 보상이 의미가 있냐는 얘기도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을 들려줬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소외됐던 소재를 선택했기에 <허스토리>의 이야기가 더욱 다채로운 결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변영주 감독은 <허스토리>의 각색 과정을 거쳐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캐릭터로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이라는 인물을 언급했다. 그는 “문 사장 캐릭터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유미향 대표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아주 오랫동안 싸워온 수많은 여성 활동가가 결합돼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문정숙뿐만 아니라 <허스토리>가 보여주는 다양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도 캐릭터 한명당 실존 여성 서너명이 겹쳐 보이는 복합적인 각색이 인상적이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에 민규동 감독은 “<허스토리>의 등장인물들에게 다양한 여성들이 응축된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이 영화가 관부재판이라는 소재에서 갑자기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5권의 증언집과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극화한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 영화 <피아니스트>와 <노예 12년>의 구조 등 <허스토리>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다양한 레퍼런스를 언급했다. 민규동 감독이 작업 과정에서 가장 어렵게 완성한 인물은 배정길(김해숙)이었다. “가장 극적인 인물이지만 그게 가짜처럼 보일까봐 고민이 컸다”는 그는 증언집에서 “매독에 걸린 아들의 폭력에 슬퍼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고 이러한 서사를 배정길이라는 캐릭터에 대입해 “증언 이상의 맥락을 가진 인물로” 완성하는 과정이 <허스토리>를 만들며 가장 어렵게 느끼고 공을 많이 들인 지점이라고 말했다.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작업하며 알게 된 다양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사례를 들려주며 예수정 배우가 연기하는 박순녀 할머니에게서는 실제로 관부재판의 주요 인물인 박두리 할머니와 몇몇 여성이, 이용녀 배우가 연기한 이옥주라는 캐릭터에게서는 일본군에게 폭행을 당해 트라우마를 갖게 된 실존 여성들이 겹쳐 보였다고 말했다. “이런 인물들을 보면서 민규동 감독이 할머니들의 증언집을 얼마나 많이 읽었을까 싶더라. 증언집의 내용을 캐릭터에 그대로 반영한 게 아니라 말이 되면서도 다양한 맥락을 가진 인물로 완성했다는 것, <허스토리>를 보면서 그런 부분이 참 좋았다.” (변영주 감독)
<허스토리>의 드라마를 이끈 배우들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가 반영하는 실존 인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뉴스 자료를 찾아보았는지 묻는 변영주 감독의 질문에 민규동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배우들에게 줄 자료를 잔뜩 모아놓고 준비했는데, 모든 배우가 캐릭터 앞에서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주춤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베테랑 배우들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 앞에서 지나치게 겸허한 자세를 보였다는 것. 하지만 배우 중에서 유일하게 <허스토리>에 앞서 <하나코>라는 연극을 공연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 예수정 배우는 “사투리부터 대사의 두음법칙까지, 담배를 피우는 순간부터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의 타이밍까지” 박순녀라는 인물의 모든 디테일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변영주 감독은 김희애 배우가 연기한 문정숙이라는 캐릭터가 “민규동 감독의 영화에서 처음 보는 유형의 인물”이라며 “지금까지 민규동 감독의 영화에는 염세적인 인물이 많았는데, 문정숙이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운동권 느낌의 캐릭터를 만났다”는 소감을 전했다. 민규동 감독은 “문정숙은 내 영화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마초 캐릭터”라고 답하며 “명예 남성이 아닌 방식으로, 돈과 권력과 자신감을 갖춘,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페미니스트였던 여성의 모습을 부산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 변영주 감독은 부산 지역에서 실제로 문정숙 같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며 “여성의 권리와 보수주의를 동시에 찬양하는 놀라운 분들의 이미지를 너무 잘 살린” 흥미로운 인물이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두 감독의 토크에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또한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허스토리>를 열심히 보러 다니느라 수능을 망쳤다”는 어느 허스토리언의 말에 민규동 감독은 “다음 영화 연출부로 들어오라”고 즉석에서 제안하기도 했다. 극중 한국 학생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고 증언하며 사과한 스기무라 선생, 일본인 후원 회장 하나부사 에미코 같은 일본인 캐릭터의 작명 원칙, 민규동 감독이 배우들에게 참고 자료로 추천한 책 등 구체적인 질문이 오갔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허스토리언들이 민규동 감독에게 ‘신인감독상’(한국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작품인 <허스토리>를 연출해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로)과 ‘함박웃음상’(평소 각종 행사에서 허스토리언들을 환한 미소로 맞아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의미에서)을 시상하는 깜짝 이벤트가 연출됐다. 변영주 감독이 수상을 도운 시상식에서는 민규동 감독의 이름과 똑같은 음식 규동이 부상으로 수여돼 큰 웃음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