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북>은 제목 ‘그린 북’(흑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연출은 <덤 앤 더머>(1994)를 비롯해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 등 특유의 코미디영화 연출로 잘 알려진 피터 패럴리 감독이다. 그동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번 영화 <그린 북>은 그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의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성격(바른생활의 교양과 우아함을 갖춘 완벽한 천재 피아니스트/원칙보다 반칙이 우선인 주먹만 믿고 살아온 다혈질 운전기사)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인물 설정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백인 운전기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르텐슨)가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고용되어 8주 동안 동남부 콘서트 투어를 떠나는 로드무비이자 인종을 넘어선 두 남자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기존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무엇일까? 그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토니와 돈을 보여주는 장면들
먼저 영화의 도입부에서 토니가 돈을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살펴보자. 이 장면이 코믹하면서도 의외였던 것은 돈의 사무실에 있는 ‘높은 의자’ 때문이었다. 나이트클럽이 내부 수리에 들어가자 일자리를 잃게 된 토니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돈의 사무실에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간다.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장면과 마주한다. 흑인인 돈이 백인인 토니보다 더 높은 의자에 앉아 토니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질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감독은 왜 돈의 모습을 마치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의 이미지로 보여주는가? 물론 돈은 고용주의 입장이고 토니는 피고용인이기 때문에 고용주가 피고용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면접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미 우리가 사전에 알고 있는 돈의 ‘품위와 교양을 갖춘’ 인물 소개와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다. 또한 앞으로의 영화 전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절대로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돈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반면에 토니의 첫 등장을 떠올려보자. 그는 우리가 예상했던 ‘반칙이 우선이고 주먹을 앞세우는’ 인물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토니가 흑인을 대하는 태도는 주방의 개수대에 놓여 있던 흑인 노동자가 마신 음료수컵을 마치 오염된 물건을 만지듯 엄지와 검지만 이용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토니와 돈을 보여주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일까? 이런 예외적인 돈의 모습은 우리가 예상했던 그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장면에서 감독이 평범한 돈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토니와의 첫 만남에서 인상적인 느낌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돈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가진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하면서 흥미로운,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농부들을 보여주는 장면을 살펴보기 전에 전날의 상황을 보자. 토니와 돈은 켄터키주의 루이빌에 도착한다. 처음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그린 북의 유색인종 전용 숙소는 허름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지금까지 품위를 유지해온 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돈이 콘서트 투어를 떠난 후 이 마을의 술집에서 백인들에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다음날 연주회를 마치면서 그는 “모두의 환대에 감사하다”라는 인사를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엔진 과열로 멈추게 된다. 이제부터 문제의 장면이 시작된다. 감독은 멈춰 선 자동차의 유리창을 통해 희미하게 사람의 실루엣만 보여준다. 토니는 물을 부어 엔진의 열을 식히고 돈은 자동차에서 잠시 내려 주변을 둘러본다. 이때 감독은 도로 건너편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농부들의 모습을 천천히 보여준다. 여기서 왜 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줄까? 이는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농부들을 현실의 상황이 아닌 비현실적인 인물들처럼 느껴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 장면은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 때문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느린 동작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농부들의 시선과 그런 농부들을 바라보는 돈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돈은 서둘러서 자동차의 뒷좌석에 올라타지만 의자에 편하게 앉지 못하고 어색하게 한쪽 모퉁이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장면을, 전날 돈이 술집에서 백인들에게 집단 구타와 모욕을 당하고 백인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하고 난 후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는 이 장면을 통해 돈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의자는 낮아졌다
끝으로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돈이 집에 돌아와 의자에 앉는 장면을 살펴보자. 돈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공연할 버밍햄의 한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사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공연을 취소한 후 토니와 함께 떠난다. 토니가 지금까지 어떤 수모에도 품위를 지켜온 돈의 태도에 놀라자 그는 “이렇게 틀을 깨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토니는 쏟아지는 눈 속에서 운전을 하다 지치고 돈은 그런 토니를 대신해 눈길을 뚫고 직접 운전한다. 토니를 집에 데려다준 돈은 같이 집에 들어가자는 토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의 집에 돌아와 사무실의 ‘보통 의자’에 앉는다. 이때 감독은 영화 초반에서 보여준 ‘높은 의자’를 다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토니의 면접을 보던 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돈이 높은 의자가 아닌 보통 의자에 앉는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영화의 도입부에서 높은 의자에 앉아 토니를 내려다보는 돈의 장면을 설정한 것 아닐까.
이처럼 감독은 영화 초반에 카네기홀의 위층에서 부유하게 사는 흑인 돈이 백인처럼 살고 싶었던 강렬한 욕망을 높은 의자에 앉은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 반대로 결말에서는 콘서트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돈이 예전의 의자가 아닌 평범한 의자에 앉는 모습을 통해 변화된 돈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의자 하나로 흑인 피아니스트 돈이라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감독이 돈의 말을 통해 전한 ‘틀을 깨는 것’, 즉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움을 보여주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