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이 3월 중순 한국 관객을 만난다. 올 3월 공개될 6편의 에피소드는 2018년 가을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방영된 방송판과 다양한 측면에서 차별화되는 감독판으로, 국내 VOD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플레이를 통해 전세계 최초로 공개될 예정이다. 왓챠플레이는 <리틀 드러머 걸>의 감독판을 국내에 선공개한 뒤 방송판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국 첩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유럽을 배경으로 평범한 영국 여배우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공작원으로 고용되며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을 다룬다.
무명 극단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여자배우, 찰리(플로렌스 퓨)가 주인공으로, 그녀는 모사드가 기획한 현실의 무대 속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테러리스트 미셸의 연인이 되어 유럽의 여러 장소를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현실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가상의 연극 속에서 찰리는 미셸을 연기하는 모사드 요원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실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가상의 역할을 연기하다가 상대배우와 사랑에 빠져버린 아이러니. 로맨스 드라마에서 많이 봤음직한 이 통속적인 설정은 음험하며 긴장감 넘치는 첩보 세계와 결합하며 새로운 정서를 가지게 된다. 한편 <리틀 드러머 걸>은 로맨스가 가미된 첩보물인 동시에 창작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가 담겨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찰리와 베커를 주연으로 하는 현실 속 가상의 무대를 기획한 모사드 요원, 쿠르츠는 스스로를 “이 쇼의 프로듀서이자 작가,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가상 세계를 진정성을 담아 디테일하게 구축하려 애쓰는 그의 모습은 원작 소설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유려하게 묘사되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이 쿠르츠라는 인물에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플랫폼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박찬욱 감독을 만나 <리틀 드러머 걸>의 제작 과정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핵심은 디테일에 있다’는 힌트에 주목하길 바란다.
-1년여간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작업했다.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건 언제인가.
=지난해 12월 30일이다. 요즘에는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송)강호씨와 류성희 미술감독이 마침 (박찬욱 감독의 집 인근) 파주 세트에 <나랏말싸미> 촬영을 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술을 마신 사람이 그 둘이었다. 조철현 감독과도 친한 사이라 <리틀 드러머 걸>을 함께 작업한 김우형 감독과 동행해 <나랏말싸미> 현장에서 오랜만에 밥차 밥을 먹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밖에 다른 친구들, 정서경 작가, 이경미 감독을 만나기도 했고.
-연초 극장가에서 박찬욱 감독을 봤다는 관객의 목격담이 들려오기도 했는데, 어떤 영화들을 보았는지 궁금하다.
=올해 가장 처음 본 영화는 하워드 혹스의 <몽키 비즈니스>(1952)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하워드 혹스 회고전에서 보았는데, 주연배우 진저 로저스가 사랑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쓰리 빌보드>(2018)를 보았고, 명필름아트센터에서 <로마>(2018)를 보았다. <로마>는 정말 명필름아트센터 상영 환경에서 봐야되는 영화더라.
-평소 영국 스파이 소설 작가 존 르 카레에 깊은 애정을 표해왔다. 그의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영화화할 생각도 있었으나 판권을 다른 쪽에서 먼저 구입해가는 바람에 영화화 계획이 무산됐다고 알고 있다. <리틀 드러머 걸>로 존 르 카레의 세계를 영상화하게 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판권을 알아본 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아니라 <리틀 드러머 걸>이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나에게 연출 제안이 왔으나 잘 안 된 거고. 나중에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영화를 너무 잘 만드는 바람에 부럽기도 하고 그 작품을 놓치지 말걸 후회도 됐다. 이후 내가 존 르 카레의 팬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작품과 관련된 많은 제안들이 왔지만 그중 딱히 하고 싶은 작품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빠서 <리틀 드러머 걸>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줄거리만 봤을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얘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르 카레 작품에서 좋아하는 건 프로페셔널한 스파이들의 세계였는데, <리틀 드러머 걸>은 보통 사람이 음모에 휘말리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와이프가 먼저 책을 읽고 르 카레의 진정한 걸작은 이 작품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읽어봤고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됐다. 나는 <리틀 드러머 걸>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능가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할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르 카레 팬덤에서 소수 의견이겠지만. 그래서 <아가씨>(2016)로 칸에 갔을 때 <리틀 드러머 걸>의 판권을 가진 잉크팩토리 대표이자 존 르 카레의 맏아들인 사이먼 콘웰과 약속을 잡아 만났고, 내가 이 작품의 각색과 연출을 맡았으면 한다며 덤벼들었다. 그게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시작이었다.
-원작의 어떤 점이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나.
=내가 원작에서 가장 매혹됐던 건 주인공 찰리가 스파이들이 만들어낸 픽션의 세계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설정이었다. 찰리는 현실 세계에서 그녀와 함께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모사드 요원 베커를 사랑한다. 하지만 모사드 요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상황에서 찰리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미셸을 사랑해야 한다. 찰리의 몰입을 돕기 위해, 베커는 찰리 앞에서 미셸인 척 연기한다. 이처럼 찰리가 리얼리티와 픽션을 오가며 혼란을 겪게 되는 상황이 재밌고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러한 <리틀 드러머 걸>의 설정은 인간이 사회에서 하나의 단일하고 완전한 인격으로 살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연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좋은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본능적으로 생겨난 마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와 베커는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아가씨>와 이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보나.
=그렇다. <아가씨>도 일종의 픽션과 리얼리티를 오가는 이야기니까. 내가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을 보니 서사의 큰 틀은 원작과 유사하지만 등장인물의 특징과 대사, 세부적인 디테일은 상당히 달랐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지향하고자 했던 원칙이나 방향성이 있었나.
=만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정체성을 바꾸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디테일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일례로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모사드 요원 쿠르츠는 다른 약속 장소에 나갈 때마다 안경을 바꿔 쓰고, 어떤 이름을 쓸지 고심하는 인물인데 이건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다. 또 현실뿐 아니라 픽션의 세계에서조차 각자가 맡은 역할을 진정성 있게 연기해야 한다는 투철한 원칙을 가진 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리틀 드러머 걸>이 드라마라는 점도 각색에 있어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 TV시리즈는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궁금증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프행어’라고 부르는 이 기법을 TV드라마의 얄팍한 기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클리프행어를 좋아하고,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꼭 해보고 싶었다. <리틀 드러머 걸>의 여섯 에피소드가 주인공 찰리의 여정에서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람 또는 사물과의 만남으로 끝맺는 건 그래서다.
-스파이물 장르의 세계에서 <리틀 드러머 걸>처럼 여성 캐릭터가 극의 중심에 놓인 작품은 드물다. 존 르 카레의 작품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친절한 금자씨>(2005), <스토커>(2013), <아가씨>(2016) 등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를 다수 연출해왔지만 스파이물 장르 안에서 여성 캐릭터를 재조명한다는 것의 의미와 도전이 있었을 법하다.
=그렇다. 여성주인공이 스파이물 장르로 대변되는 남성적인 대립과 폭력 세계에 휘말려든 뒤, 그 안에서 무엇을 관찰하고 배워나갈 것인지를 다뤄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리틀 드러머 걸>의 주인공 찰리의 롤모델이 따로 있었다. 존 르 카레 선생님의 여동생이 배우였다더라. 그분이 오랫동안 미국에 살다가 영국에 정착한다고 해서 한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여자주인공의 의상을 고민하던 시절이라 (극중 배경인) 1970년대 시절 실제로 어떤 옷을 입었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실망스럽게도 그냥 시커멓게 입었다고 하더라. (웃음) 소설의 주인공 찰리가 왜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배우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정과 충동과 모험 그리고 정의감과 분노.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가 지닌 감정을 ‘배우’라는 한마디로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원작의 찰리는 야성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인물인 반면에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는 귀엽고 당찬 느낌이다.
=찰리가 좀더 지적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했다. 상대방의 말을 굉장히 재치 있게 받아치고, 한마디도 안 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하며 자기가 힘든 걸 극복해나가는 유형의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려는 모습을 부각하려 했다. 찰리를 연기한 플로렌스 퓨는 <레이디 맥베스>(2016)를 보고 좋아하게 됐다. <아가씨>로 런던영화제에 초청받아 갔을 때 함께 아침 식사를 한 적 있다. 영화에서 본 대로 정말 활발하고 솔직하고 의젓하더라. 언젠가 꼭 작품을 같이 하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는데, 이 작품에서 만나게 됐다. <리틀 드러머 걸>의 캐스팅을 처음으로 의논하려 <BBC>와 <AMC>, 잉크팩토리 대표들과 4자 통화를 한 자리에서 플로렌스 퓨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꺼냈더니 막 웃더라. 아직까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배우라 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했는데 그들도 플로렌스 퓨가 찰리 역에 잘 맞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캐스팅은 쉽게 진행됐다.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모사드 요원 쿠르츠 역시 소설 속 묘사와 다르다. 원작에서는 단단하고 투박한 이미지인 반면, 드라마에서는 훨씬 더 지적이고 특출난 수완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쿠르츠는 존 르 카레 소설의 인기 캐릭터인 조지 스마일리와 많이 다르다. 그는 스마일리처럼 뒤편으로 비껴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고, 적극적이며, 유머감각도 풍부한 사람이다. 많은 장면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느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에서 처음 보고 반한 뒤 제프 니콜스 영화를 보며 팬이 된 마이클 섀넌이 쿠르츠를 너무나 생동감 있게 연기해줬다. 그와 리허설을 하며 추가된 중요한 요소가 있다. 쿠르츠가 상대의 사적 공간을 잘 침범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극중 그가 누군가를 만지거나 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을 거다. 마이클 섀넌이 그처럼 불쾌감을 유발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을 너무나 멋지게 연기해줬다.
1970년대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뜻은
-원작에는 없으나 드라마에 추가된 중요한 대사가 있다. 쿠르츠가 찰리 앞에서 “나는 이 쇼의 프로듀서이자 작가, 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는 모사드 요원인 동시에 영국인 배우 찰리를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에 침투시키기 위해 거대한 가상의 상황극을 기획하는, 일종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감독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르츠라는 캐릭터가 특별하게 느껴지긴 했다. 프로듀서, 작가, 감독인 나로선 그에게 무척 공감이 갔다. 쿠르츠는 픽션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디테일을 추구하고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에만 국한할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아가씨>의 코우즈키(조진웅)와도 닮은 점이 있다고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쿠르츠야말로 이제까지 내가 다뤄보지 않았던 유형의 인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그와 닮은 점이 있다면.
=계획을 면밀하게 세우고, 실수 없이 실행하며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디테일을 사랑하는 족속이다.” “디테일,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되는 거야”라는 대사를 드라마 버전에서 새롭게 썼는데, 연출자로서 나의 원칙을 반영한 대사다.
-그 밖의 주요 등장인물 캐스팅 과정도 궁금하다.
=베커를 연기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스토커>를 준비할 당시 엉클 찰리 역으로 오디션을 본 배우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내가 생각하는 엉클 찰리의 모습보다 그가 너무 젊었기에 함께할 수 없었지만, 후에 미국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를 보며 그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걸 알게 됐고 이번 작품에서 함께하게 됐다. 영국 정보부 수장으로 나오는 찰스 댄스도 꼭 캐스팅하고 싶었던 배우다. <에이리언3>(1992)부터 그를 좋아해왔고, <BBC> 드라마 <핑거스미스>에서의 모습도 좋아한다. 그런데 찰스 댄스를 캐스팅하겠다고 했더니 영국인들은 반대하더라. 찰스 댄스가 영국 정보부 수장이라니, 그건 너무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라는 거다. 그래도 고집을 부려서 캐스팅했는데 드라마가 완성된 지금은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됐다. 찰스 댄스는 단어 하나하나에 재치와 뉘앙스를 담아 연기하는 데 너무나 능한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 모사드 요원을 연기하는 마이클 섀넌과 찰스 댄스가 대결하는 장면이 정말 멋지다.
-<리틀 드러머 걸>은 로맨스와 첩보 장르의 특성을 띠고 있는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 타인의 오랜 갈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를 보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연출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러한 연출은 어떻게 가능했나.
=이 작품의 배경인 1979년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는 한국 관객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거다. 하지만 어찌 보면 한국인 역시 오랜 대립과 긴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군사적 행동에 대한 보복이 익숙한 세계에서 살아왔잖나. 그런 점이 나에겐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이 작품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을 들여다보아도 다 나름의 명분이 있는, 도무지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대립. 이러한 대립 양상을 균형감 있게 보여주는 것이 <리틀 드러머 걸>의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였다. 시나리오의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제작사 잉크팩토리가 섭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민들에게 단어 하나라도 거슬리는 점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배우를 고루 캐스팅한 까닭도 그런 이유다.
-이 작품은 당신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다양한 로케이션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찰리는 극중 첩보 임무를 수행하며 독일, 영국, 그리스, 이스라엘, 오스트리아, 레바논 등 다양한 국가를 유랑한다. 그간 박찬욱의 영화를 떠올리면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밀도 있게 탐구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보며 광활하게 펼쳐진 길 위에 놓인 박찬욱의 인물들을 지켜보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했다.
=원작의 설정상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드라마의 러닝타임인 6시간 동안 찰리라는 인물이 긴 여행을 한다는 느낌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극중 다양한 지명이 나왔으면 했다. 실제 촬영은 영국과 그리스, 체코, 세 나라에서 진행됐지만 주인공 찰리가 오스트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 다양한 장소에 가서 많은 사건과 인물을 마주하고, 위기에 처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했다.
-촬영 도중 특히 마음에 든 장소가 있었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체코에서 발견한 모텔이다. 극중에서는 독일의 ‘트랜스 모텔’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건물 구조와 벽의 색감이 너무나 기묘하고 흥미로웠다. 미술감독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마리아 듀코빅이 이 작품의 미술을 맡았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영국의 류성희’더라. (웃음) 이야기에 부합하는 컨셉을 구상하는 데 뛰어났고 그 컨셉을 구현하기 위한 로케이션을 너무나 잘 찾았다. 건축적인 측면에서도 1970년대의 브루탈리즘을 투영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그런 특징을 가진 건축물을 악착같이 잘 찾아냈다.
-첩보물 장르에서 보기 드문 색채를 사용했다. 찰리가 운전하는 붉은색 메르세데스 벤츠부터 그녀의 노란 드레스, 미셸의 초록 재킷 등 원색의 색감이 작품 내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 1970년대 당시의 자유롭고, 용감하고, 대담한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니까.
-오랫동안 정정훈 촬영감독과 작업해왔는데 김우형 촬영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어떤 계기로 협업하게 되었나.
=<도끼>를 준비할 때 프랑스인 프로듀서이자, 앞서 <도끼>를 영화화(2005년작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한 바 있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 미셸 가브라스가 영어를 잘하는 촬영감독을 요구했다. 그런 연유로 김우형 촬영감독과 함께 <도끼>를 준비하게 됐는데 도중에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말았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시간을 본의 아니게 많이 뺏었다는 미안함도 있고, 마침 정정훈 촬영감독도 다른 작품을 촬영하고 있어 <리틀 드러머 걸>을 함께하게 됐다. 이번에 작업해보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상상력은 굉장히 대담하고 과감하더라. ‘우쉬’(김우형 촬영감독의 영어 이름)는 영화를 이렇게 찍어도 되나 하는 식의 걱정이나 망설임이 없는, 창조적이고 와일드한 사람이었다.
-작품을 준비하며 김우형 촬영감독에게 특히 요구한 부분이 있다면.
=촬영 회차가 너무 타이트하고 빨리 찍어야 하니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두대의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이동숏을 많이 쓰자고 말을 맞췄다. 쉽게 말하면 단번에 많은 것들을 커버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롱테이크 숏을 많이 쓰려고 했다. 로케이션 촬영에 있어서는 최대한 장소가 가진 장점이나 개성을 파악해 극대화하는 촬영을 주문했다.
-<리틀 드러머 걸>을 애너모픽렌즈로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라 촬영 과정에서 다르게 느낀 점은 없었나.
=나는 언제나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고수해왔는데, <BBC>는 보수적인 방송사라 16대 9의 화면 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더라. 촬영 과정에서 애너모픽렌즈를 썼기 때문에 좌우로 굉장히 넓게 찍혔는데, 그걸 다 잘라내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현장에서 모니터는 처음부터 16 대 9 비율로 맞춰놓고 봤다. 그래야 정확한 구도를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후반작업을 할 때 좌우 화면에 무엇이 담겼는지를 보며 프레임을 조정하려는 의도로 풀 프레임을 화면에 띄워놓고 볼 때마다 ‘아, 저건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이 아름다웠다. 다음에 TV시리즈를 한다면 꼭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찍고 싶다.
감독판은 무엇이 다를까
-여섯 에피소드를 총 81회차에 걸쳐 완성했다고 들었다. 제작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우선 6시간 분량을 81회에 찍으려니 체력이 달렸다. (웃음) 얼마 전 이경미 감독이 신작 <보건교사 안은영>을 몇십회차에 찍어야 한다고 하길래 “너는 한 동네에서 찍잖아. 나는 도시가 몇개였는지 알아?”라고 말했다. 스토리보드를 미리 디테일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현장이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 역시 스튜디오의 편집권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국에서의 제작 환경은 어땠나.
=미국과 특별히 다른 차이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스토커>를 찍으며 스튜디오와의 논쟁을 통해 내 작품이 더 좋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경험했다. 내가 주도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긴 하지만 스튜디오의 자극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을 보고 결론적으로는 만족했다. 그래서 다음에 또 해외에서 작품을 만들게 된다면 스튜디오나 방송국의 반대가 있더라도 그들을 잘 설득하거나 더 좋은 제3의 아이디어를 내서 그들도 만족할 수 있는 편집을 만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스토커>는 반년 정도 작업했는데 TV는 그러기가 힘들더라. 그 결과 방송판과 감독판이라는 두 가지 버전이 나오게 됐다. 누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물론 매번 상황을 봐야 알겠지만, 너무 하고 싶어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하고 싶은 기획이 아니라면 파이널컷 권리를 가지고 싶다. 파이널컷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 작품은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감독판은 방송판과 어떤 점이 다른가.
=정말 많은 것이 다르다. 먼저 제작사 잉크팩토리와의 창조적 견해 차이에 의해 방송판에 포함되지 못했던 장면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매 에피소드 러닝타임도 다르고, 음악도 많이 덜어냈다. 설명적인 ADR을 뺐고 색보정과 믹싱도 보완했다. <리틀 드러머 걸>을 방영하는 영국 <BBC>와 미국 <AMC>의 심의 기준에 걸리는 장면들도 감독판에 포함되어 있다. <BBC>는 폭력 묘사에 엄격하고, <AMC>는 노출과 욕설에 엄격하더라.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웃음) 감독판은 3월 중순 왓챠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할 예정이다.
-극장에서의 상영 계획도 있나.
=그렇다. 이벤트 상영을 하려고 한다. 6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드라마를 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플레인아카이브에서 블루레이도 출시할 계획이다. 아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을 세계에서 블루레이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미국 회사와 서부극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시나리오도 좀 고쳐야 하고 캐스팅도 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관행적으로 예산 승인이 나야 프로젝트에 그린 라이트가 켜지는 것이라 확정짓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첫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제작을 마쳤다. 새로운 플랫폼으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일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루에도 몇번씩 생각은 바뀐다. <리틀 드러머 걸>을 연출하며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편 조연들까지 다 보살펴가며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TV가 좋은 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런던영화제에서 특별상영 형식으로 에피소드1, 2편을 극장 상영했는데 큰 화면으로 내 작품을 보니 ‘아, 젠장, 이거구나’ 싶더라. 색보정하고 사운드도 매만지며 열심히 작업했는데 그걸 스마트폰으로밖에 볼 수 없다니. ‘큰 화면은 못 잃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로마>를 보니 저 비영어권, 흑백, 아는 배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영화에 1500만달러를 투자하는 스튜디오가 또 있을까 싶더라. 넷플릭스가 아니라면 저 영화엔 누구라도 700만~800만달러 이상은 안 쓸걸 하는 생각이 들고. 과연 700만, 800만달러로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거는 게 좋은가, 아니면 원하는 예산으로 새로운 플랫폼에서 작업하는 게 좋은가. 이건 나뿐만 아니라 마블 영화를 찍지 않는, 전세계 모든 감독들의 고민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