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이 어땠는지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다시 만났다.” 2018년 배우 김향기는 그야말로 부지런히 한해를 보냈다. 그는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 <영주>에 이어 <증인>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소녀 지우 역을 맡아 또 한번 새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우연히 범죄 현장을 목격한 소녀가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과정을 그린 <증인>은 배우 김향기가 10대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향기는 그런 숫자나 구분을 의식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항상 오늘에 충실한 배우의 얼굴은 무르익은 계절처럼 점점 깊어간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는 많지만 <증인>처럼 자폐 청소년의 시점에 눈높이를 맞추는 영화는 드물다. 어떤 계기로 출연을 결심했나.
=감독님이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다’고 연락을 주셨다. 처음에는 이번에도 이한 감독님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따뜻한 영화라는 정도의 인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생각이 났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점차 뚜렷해지는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오해하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차별 아닌 차별들을 얼마나 자주 겪는지를 꼼꼼히 짚어주는 이야기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 하나씩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따뜻한 감성도 좋았지만 보시는 분들에게도 의미 있는 작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한 감독과 인연이 각별하다. <우아한 거짓말>(2013)에 이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는데.
=이한 감독님은 한결같은 분이다. 심지어 머리 모양이나 스타일 같은 외적인 부분까지도. (웃음) 이번에 현장에서 뒷모습을 보는데 <우아한 거짓말> 때 생각이 많이 났다. 현장에서 공감을 많이 해주시고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을 주는 분이다. 덕분에 현장에서 편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많이 웃고 많이 울기도 하시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건 확실하고 정확하게 끝까지 찍어내는 감독님이다. 항상 좋은 장면을 만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다.
-지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소녀다. 배우라면 한번쯤 해보고 싶은 역할이지만 그만큼 인상적인 연기들이 많아 부담이 되고 힘든 캐릭터이기도 하다.
=나만의 무언가를 만든다는 생각을 지우는 게 중요했다. 초반에는 나도 모르게 계산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서 어떻게 톤을 올리고, 여기서 어떤 표정을 짓고 하는 식으로.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이럴까 반성을 많이 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친구들은 청소년 시기에 스스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고 한다. 껍질을 깨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지우의 진심, 그 과정이 잘 표현되었으면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지우는 조금 다른 세계를 사는 특별한 아이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렇다. 다만 그걸 어떻게, 얼마나 표현하는지가 문제다. 지우는 한번 보면 모든 걸 사진처럼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고 모든 감각이 발달한 만큼 소리에도 굉장히 민감하다. 일상의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때리고 1천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보는 느낌. 그런 감각을 가진 사람이 일상생활을 할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계속 상상했다. 영화를 통해 나도 지우와 함께 자란다는 기분이었다. 보시는 분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생후 29개월 때 이미 정우성 배우와 광고를 찍었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때와 달리 이번에 호흡을 맞춰보니 어땠는지.
=마냥 좋은 아저씨? 촬영이 너무 빨리 끝났다. (웃음) 그렇게 느낄 만큼 편하고 현장이 자연스러웠다. 호흡이 좋았던 건지 다들 성향이 비슷한건지. 촬영 땐 모르는데 나중에 모니터에서 확인할 때 주변에서 멋있다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럴 땐 그냥 조용히 수긍한다. (웃음) 활기차고 들썩인다기보다는 항상 포근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긴장을 올려야 하는 법정 장면에서조차 마음이 따뜻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정신 차리니 벌써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18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한해였다. <신과 함께> 시리즈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다졌고, <영주>로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깊이도 선보였다.
=적어도 아직까진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캐릭터를 고른 적은 없다. 기회가 주어지고 시나리오를 만났을 때 여운이 남거나 끌리는 게 있으면 자연스럽게 선택을 해왔다. 결과적으로 내게 맡는 역할이 착실하게 들어온 걸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안 해본 캐릭터는 늘 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잔인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인물을 내가 연기하면 어떨까’ 궁금할 때도 있다. 다만 캐릭터 자체가 톡톡 튀는 것보다 작품에서 유기적으로 표현되는 과정들에 늘 매력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10대의 마지막에 <증인>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차근차근 새로운 상황과 인물들을 만나다보면 그렇게 나의 세계도 넓어져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