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에서 배우 천우희가 연기하는 련화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씌울 수 있는 족쇄란 족쇄는 온몸에 다 씌운 인물 같다. 지킬 것이 많은 남자와 잃을 것이 없는 남자의 처절한 싸움의 와중에 련화는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외롭고 처절한 비명을 지른다. 아마도 많은 관객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서히 밝혀질 듯 말 듯 하는 련화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지켜볼 것이다. 최근 개인 유튜브 채널 ‘천우희의 희희낙낙’을 개설해 명랑한 일상을 팬들과 공유하고 있는 배우 천우희가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는 <우상>의 ‘련화 만들기’ 과정을 들려줬다.
-시나리오를 읽고 첫인상이 어땠나.
=처절했다. 중심이 되는 세 인물(구명회, 유중식, 최련화)이 각자 원하는 욕망이 다르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향해 달려가는데도 원하는 만큼 이뤄지지 않는, 그래서 연민이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감독님이 현장 편집본도 안 보여줘서 영화가 어떨지 무척 궁금했는데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갔을 때 처음 보고 울컥했다.
-완성된 영화가 더욱 궁금한 이유는 시나리오에 드러난 것만으로는 련화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거나 감정이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추는 느낌이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캐릭터에 대해 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생존을 위해 무시무시한 상황을 돌파해 나가는 인물인데, 나는 그 모호함 속에서 자격지심과 분노를 가진 인물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상상했다.
-조선족 련화가 왜 한국에 터를 잡았는지, 왜 중식을 시아버지로 두게 됐는지부터 예고편과 간단한 줄거리에서 언급된 그 사고가 있던 날의 행적까지 모두 모호한 미스터리 그 자체인 인물이다.
=련화는 관객이 상상할 여지가 많은 캐릭터다. 내가 연기할 때도 감독님에게 “지금 련화가 어떤 상황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확실한 답을 듣지 못한 채로 열어놓고 연기한 적이 많았다.
-중국어와 조선족 말투 등을 연습하는 과정은 어땠나.
=조선족 캐릭터를 전반적으로 코치해주는 선생님이 있다. <황해>(2010)에서도 그 부분을 담당한 분인데 그분 옆에서 오랫동안 련화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따져 물어가면서 습득하고 이해하려 했다.
-한석규, 설경구라는 선배 배우들과 작업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나.
=<우상> 촬영장에서는 내가 그분들에게 배우는 입장이라 그 점이 부담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수진 감독님과 두 번째 작업이라는 점이 더 큰 부담이었다. <한공주>보다 잘해내고 싶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웃음) 촬영이 7개월이나 이어지고 스케줄 변동도 많았기 때문에 그런 나만의 어떤 조급함과 싸우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련화를 연기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편안했다.
-언제부턴가 소위 ‘쎈’ 캐릭터가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 련화는 그중에서도 상상 가능한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내가 어려운 역할 많이 해봤으니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웬걸, <우상>은 결코 쉽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 나 스스로 무너져 내린 적도 있었다. 그동안 <곡성>이나 <한공주>, <써니>(2011) 등에서 맡았던 역할에 관객이 많은 사랑을 보내준 건 고마운 일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강한 여성’ 정도에서 더 나아가 매번 다른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도 나는 분명 다른 역할을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내게 련화는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가슴 아프고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세월의 흔적 자체를 연기의 깊이로 만드는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나 또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거나 어떤 목표 같은 것이 생기지는 않는지.
=나는 배우로서 선배 복이 많다고 생각한다. 배우들마다 가치관이나 성향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 잘 가고 있다 생각하는 이유는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분이다. 얼마 전 한석규 선배님한테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 촬영장에서 신구 선배님이 한석규, 최민식 선배님에게 “너희가 이제야 꽃봉오리를 피우는구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는 그럼 아직 땅속에 있는 거네요”라고 말했다.(웃음) 아까 표지 화보 찍을 때도 “이제는 그만 좀 몰입하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셨지만 그 말은 너무 욕심내지 말고 성장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선배들의 이런 조언이 내게 큰 힘이 된다.
-<우상> 이후 또 어떤 영화에서 배우 천우희를 만날 수 있을까.
=지난겨울에 촬영한 전계수 감독의 <버티고>가 아마 올해 개봉할 것이다. 나문희 선생님의 <소공녀>(가제)에는 잠깐 특별출연한다. 그외에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 요새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이처럼 여러 매체에서 일할 기회를 열어두고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