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BBC> 6부작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공개한 박찬욱 감독을 만나다
2019-04-11
글 : 김혜리
사진 : 최성열
암호명 액터, 작전명 리얼리티

박찬욱 감독의 6부작 <리틀 드러머 걸>에서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가 준비 중인 다음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다. 희곡은 표지만 등장하지만 <뜻대로 하세요> 속에는 <리틀 드러머 걸>과 통하는 대사가 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배우에 불과하지. 그들은 무대에 들락날락하며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역을 하게 되지.”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 속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변명하기도 한다. “배우라는 존재는 무대에선 인간의 고뇌를 연기하지만 무대를 내려가면 채울 수 없는 허무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배우의 소심함, 왜소함, 무력함을 어른 세계에서 빌려온 거친 명분으로 채우려고도 한다.” 박찬욱 감독이라면 담대함과 용기, 타인의 정체성을 훔치는 재능, 연쇄적으로 열정에 휘말려 자아를 소진하는 기질을 배우와 스파이가 공유한 돌연변이 유전자로 꼽을 것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독일 주재 이스라엘 외교관의 집이 테러로 폭파되며 시작한다. 오랫동안 추적해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가 칼릴(샤리프 가타스)의 조직을 범인으로 지목한 모사드(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팀장 마티 쿠르츠(마이클 섀넌)는 급진적 사상과 연기력, 암기력을 지닌 영국 무명배우 찰리에게 죽은 테러리스트의 연인 배역을 맡겨 팔레스타인 조직 수뇌부를 뿌리 뽑으려는 작전을 세운다. 그리고 적의 논리와 분노를 철저히 이해하는 전직 요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를 찰리의 교사로 끌어들인다. 가디는 팔레스타인 청년 미쉘(아미르 쿠리)로서 찰리와 함께 사랑의 픽션을 리허설하고, 연극과 삶은 위험천만한 회로로 연결된다. 놀랍게도 전장 한복판에 던져진 초짜 찰리는 예쁘장한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는 자기 북소리에 맞춰 진군하고 모두가 찰리의 큐 사인을 기다린다.

배우의 존재론에 스파이의 숙명을 견주었던 <색, 계>(2007), 거짓말을 통해 진담을 교환하는 <아가씨>(2016)의 복화술을 상기시키는 <리틀 드러머 걸>에서 아티스트는 찰리만이 아니다. 마티는 조지 스마일리, 귄터 바흐만 같은 르 카레 소설 속 첩보원들처럼 물리적 대량살상 대신 정교한 작전으로 적의 폐부를 찌르는 차악을 추구한다. 적수를 동료 전문가로 존중하고 육체적 폭력을 끝까지 삼가야 할 모독쯤으로 여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티는 창작자로서, 눈속임을 넘어선 픽션의 진정성을 욕심낸다. 젊고 자존심 강한 찰리에게 모사드가 준 배역은 한 인간이자 배우로서 얼마나 단단한지 몸을 부딪혀 입증하는 바위다. “나는, 배우예요”라고 원작 소설에서와 다른 대사로 찰리가 자기를 해명하는 결정적 순간, 박찬욱 감독은 배우라는 정체성을 직업 이상의 특별한 운명으로, 진영과 종교 못지않게 한 인간을 정의하는 존재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어이없는 만용으로 보이지만, 플로렌스 퓨는 이미 <레이디 맥베스>(2016)에서 동기를 변명하지 않고 생동함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하는 여자를 눈 깜빡 않고 구현했다.

스파이 소설 계보에서 제임스 본드의 대척점으로 거명되는 존 르 카레는 “그레이엄 그린을 흉내내며 온갖 시시콜콜한 팩트로 부피를 늘린다”는 악평을 듣곤 했다. 그러나 디테일이야말로 르 카레의 문학적 독창성임을 독자들은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리틀 드러머 걸>은 픽션 속의 픽션 속의 픽션을 공들여 구축할 수 있는 6시간의 러닝타임을 보유한 시리즈물이다. 조셉 콘래드가 ‘암흑의 핵심’을 정글 깊은 곳에서 찾았다면 르 카레는 (목숨 걸고 대립하는) 타자의 영혼 안에서 그것을 찾는다. <리틀 드러머 걸>은 그와 같은 르 카레 특유의 여정을 연극 모티브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디테일을 집적시키면 새로운 리얼리티의 차원이 문득 발생하는 영화의 마술을 누구 못지않게 터득해온 박찬욱 감독은, 규모 큰 프로덕션을 더 큰 도구상자로서 침착히 받아들고 <리틀 드러머 걸>을 여섯폭의 태피스트리처럼 완성했다. <리틀 드러머 걸>의 스포일러를 꺼리는 독자에게 이 인터뷰는 폭탄이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지난 3월 29일부터 왓차플레이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으며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서도 지난 3월 29일부터 6주간 방영을 시작했다.

<리틀 드러머 걸>

-<리틀 드러머 걸>을 위해 <스토커>(2013) 제작 당시보다 더 긴 외국 생활을 했다.

=1년 반 동안 나가 있었고 중간에 두 차례 짧은 일정으로 귀국했다. 프리 프로덕션 때는 런던 일링에서 지냈고, 촬영은 영국, 그리스, 체코 3개국에서 했다. 후반작업 기간에는 코번트 가든에서 소호의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편집, 사운드, 색보정 작업실이 모두 한 건물에 있어 오르내리며 확인할 수 있었다. 영미권은 편집자와 사운드 디자이너가 장비와 공간을 소유하지 않고 시설 대여 회사를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환경이었다. 시각효과 작업실 역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리틀 드러머 걸> 소식을 듣고, 몇해 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연출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났다. <리틀 드러머 걸> 이전에도 첩보물을 제안받았는지.

=해외 에이전시에 서부극, SF, 필름누아르, 범죄 스릴러, 스파이 장르를 원한다는 말을 해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첩보물도 존 르 카레 원작 작품을 포함해 여러 제안이 있었다.

-장르로서 첩보물은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냉전시대를 경험한 세대고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 중이다. 첩보물은 영원히 적대하는 듯한 두 세력의 싸움을 그리지만, 각 진영이 자기가 정의라고 확신해서 싸운다기보다 승부욕과 사적 감정이 작용하는 직업인의 세계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논리를 가지고 벌이는 게임이라는 점도 좋아한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도 그렇지만 <리틀 드러머 걸>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첩보 활동의 속성은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고 만들어진 정체성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배우와 스파이는 과연 비슷하게 괴상한 직업이다.

=스파이는 상황에 따라 배우도 되고 작가나 감독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처음 알고 의아했는데, 소설 <리틀 드러머 걸>(1983)은 존 르 카레의 팬들에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나 조지 스마일리가 주인공인 연작만큼 높이 평가받지 못하더라. 왜일까? 그럼에도 특별히 끌린 까닭은 역시 <리틀 드러머 걸>이 보여주는 스파이 활동과 연극의 유비관계 때문인가.

=영국 프로덕션 관계자들에게 들으니 국민 작가의 책답게 출간 당시 많이 팔리긴 했는데, 끝까지 읽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길기야 하지만 <퍼펙트 스파이>(1986)도 두께는 못지않은데 말이다. 아마 내가 읽기를 미뤘던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르 카레는 스마일리가 대표하는 직업 스파이의 음험한 세계가 본령인데, 주인공이 젊은 데다 여성이니 “나의 르 카레는 이렇지 않아”라고 반응했던 거다. 나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선호하지만, 르 카레가 장기를 발휘할 분야는 아니라는 예단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배우이자 정치 활동에 가담한 존 르 카레의 동생이 찰리의 모델이기 때문에 잘 쓸 수밖에 없었더라. (웃음) 르 카레의 동생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리틀 드러머 걸>

-극중 부르주아 출신의 찰리가 자기의 성장 배경에 대해 지어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존 르 카레의 실제 가정사와 유사하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지만 <퍼펙트 스파이>에도 르 카레가 범죄자였던 부친을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저자의 실화가 찰리의 허구로 쓰인다. 찰리는 차미안이라는 이름의 애칭인데, 언급한 르 카레의 동생 애칭이 찰리였다고 한다.

-존 르 카레 작가의 가족이 설립한 잉크 팩토리가 방송사 <BBC> <AMC>와 더불어 <리틀 드러머 걸>의 제작사다. 만드는 과정에 견해 차이로 협상할 경우 주된 상대가 잉크 팩토리였나.

=<BBC>와 <AMC>가 스튜디오 역할이고 잉크 팩토리는 프로덕션이다. 그러나 잉크 팩토리는 자체적으로 투자를 유치해 제작비를 부담하는 비중이 상당한 회사로 스스로 미니 스튜디오로 정의한다. 그래서 권한이 크다.

-존 르 카레 작가가 카메오로 출연도 했다.

=프리 프로덕션 중 작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고 촬영 중에는 카메오로 연기하는 날만 왔다. 요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거주하는 콘월의 바닷가를 몇 시간씩 산책하며 공책에 다음 책의 아이디어를 적는다고 한다. 지금 잉크 팩토리에서는 일종의 ‘스마일리 사가(saga)’를 설계중이다.

-설마 ‘르 카레 시네마틱 유니버스’인가. (웃음)

=그렇다. 지금 미국과 영국 영화인들은 다들 어떻게 하면 유니버스 하나를 만들까 몰두하는 것 같다. 잉크 팩토리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3, 이하 책 출간연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4), <명예로운 스쿨 보이>(1977) 등 스마일리가 등장하는 소설에다 근작 <레거시 오브 스파이>(2017)까지 각 책을 6부작 시리즈물로 만들어 연결하는 ‘스마일리 유니버스’를 기획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작가와 프로듀서들이 면밀히 소설들을 검토해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어찌 된 거냐고 르 카레에게 문의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가 “음, 그게 말이지? 잠깐 기다려봐라.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내주마” 하고 서재에 들어갔는데, 쓰다가 “안 되겠다. 이건 소설로 따로 한권이다” 해서 나온 것이 <레거시 오브 스파이>다. (웃음) 조지 스마일리가 잠깐 등장한 소설 뒤쪽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설명한 내용이라고 한다.

-존 르 카레는 최근까지 꾸준히 작품이 영상화된 소설가다. <리틀 드러머 걸>도 조지 로이 힐이 1984년에 영화화했고 존 부어먼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1995)부터 <모스트 원티드 맨>(2014)까지 영화가 워낙 많다. 관객으로서 특히 좋아하는 르 카레 소설 원작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5), <BBC>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9)와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테일러 오브 파나마> <러시아 하우스>다.

-<BBC>판이라면 알렉 기네스가 조지 스마일리로 나왔던.

=맞다. 알렉 기네스가 얼마나 잘했으면 존 르 카레도 이후 스마일리 소설을 쓸 때 그를 생각하며 썼다고 하더라.

<리틀 드러머 걸>

삼인조 - 찰리, 마티, 가디

-처음부터 감독판을 염두에 두었나 아니면 편집 과정에서 결정했나. 원래 감독판을 만들고 배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계약에 있었나.

=아니다. 조합의 규정에 따라 감독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먼저 편집했다. 그런 다음 프로덕션과 논의했는데 방영일은 정해져 있는데 조율이 점점 길어지니 이대로는 납품 기일을 못 맞추겠구나 싶었다. 끝없이 논쟁을 하느니 타협한 결과로 방송판을 내고, 대신 감독판을 따로 만들기로 협의했다. 감독판을 위한 편집, 사운드, 컬러 작업이 추가되면서 늘어난 비용은 제작사에서 부담했다.

-한국 이외 지역에서 감독판을 배급할 기회는. <BBC>판, <AMC>판을 본 영미 시청자들이 누구보다 보고 싶을 텐데.

=아이튠즈 등에서 할 수 있는지 논의 중이다. <스토커> 때처럼 시간이 있었으면 끝까지 서로 의논해 모두 만족하는 하나의 편집본을 만들수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부족해 내린 결정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BBC>가 르 카레 원작의 톰 히들스턴, 올리비아 콜먼 주연의 <나이트 매니저>(2016)를 성공시킨 다음 만드는 드라마인 만큼 비교가 불가피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나이트 매니저>는 르 카레 전작 중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가장 닮은 작품이라 <리틀 드러머 걸>과 많이 다르지만, 여러 나라 풍광과 다국적 스타 배우를 보여주는 고급스러운 첩보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비교도 많이 됐을 법하다.

=그런 표면적 공통점 때문에 초기에 예산을 비슷하게 잡았더라. 그런데 전문가가 와서 들여다본 결과, 현대물인 <나이트 매니저>와 달리 <리틀 드러머 걸>은 1970년대가 배경이라 당연히 제작비가 훨씬 올라갔다. 비교야 많이 됐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여러 국적의 스타를 모으는 게 방침이었다면 캐스팅의 선택지가 넉넉한 편이었나.

=캐스팅 디렉터 지나 제이가 신나서 일했다. <나이트 매니저>가 성공한 데다 <리틀 드러머 걸>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남성배우들은 르 카레 작품을 워낙 선호한다. 마티 쿠르츠 역의 마이클 섀넌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와 제프 니콜스 영화들에서 보고 전부터 같이 일하고 싶었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커런트 워>(하비 와인스타인이 제작한 영화라 아직 개봉하지 못했지만)를 찍으며 함께 일하고 들려준 이야기도 있었다. “미국의 (송)강호 형이에요. 똑같아요.” (웃음)

-스크린에서 마이클 섀넌을 볼 때마다 거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가디 베커 역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옆에 서니 보통 사람 같더라. 반면 마티와 함께 움직이는 요원 시몬 리트박 역의 마이클 모시노브는 단신이라 키 차이가 두드러졌다.

=알렉산더의 신장이 캐스팅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고 시몬 역은 일부러 작은 배우를 택했다. 마이클 섀넌이 본인보다 큰 배우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고 픽튼 총경 역의 찰스 댄스도 자기가 세 번째로 키 큰 사람인 현장은 처음이었을 거다. (웃음)

-마티는 엄밀히 말하면 사람을 해치고 사건을 조작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악역으로 보이지 않는 점이 놀랍다.

=자상하고 배려하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잔인하고 비정해 보일 수 있는 표현력을 가진 배우다. 마이클 섀넌과 함께 만들어간 부분 중 제일 재밌는 것이 상대를 툭툭 치면서 사적 공간을 침범하는 버릇이었다. 당하는 사람은 “어, 왜 이래?” 하다가 친근감의 표현인가 싶어 거부하기도 뭐하고 그냥 두다 보면 자꾸 마티가 영역을 넓히며 사람을 갖고 논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스라엘 모사드를 경멸하는 영국의 픽튼 총경과 대면했을 때가 그렇다.

=픽튼이 과거에 만난 이스라엘 소년병이 어린 마티라고 가정하고 찍었다. 픽튼이 자리를 권하려고 손을 내미는데 일부러 그랬는지 오해했는지 마티는 그 손을 악수하듯 잡아버린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마티의 눈을 쳐다본 픽튼에게 어떤 기억이 떠오르지만 넘어가야 하니까 “콧수염 멋지군요”라는 대사를 만들어 넣었다. 픽튼 총경과 대면한 마티는 과거에 당한 고통이 되살아나 아스피린을 삼킬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두 인물이 붙는 장면은 연기적으로 흥미롭다. 찰스 댄스의 픽튼은 영국인 특유의 방식으로 단어를 하나하나 세공하듯 골라 상대방을 주무르고 마이클 섀넌은 억제하면서도 실속을 차린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테러 장소가 소설에서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였는데 드라마에서는 런던으로 옮겨지면서 픽튼과 마티의 대결이 결말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클라이맥스의 무대를 런던으로 바꾼 결정에는 로케이션 여건이 먼저였는가, 극적인 필요가 앞섰나.

=창조적 이유가 먼저다. 어차피 체코 로케이션에서 독일의 쾰른, 본, 뮌헨을 찍는 터라 프라이부르크 하나 늘어나도 문제 되지 않았다. 런던이 테러 장소가 되는 편이 훨씬 논리적인 귀결이라 시나리오를 고치는 과정에서 내가 바꿨다.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 영국이 지은 원죄를 계속 말하고 있으니까. 더구나 영국여자 찰리를 스파이로 기용했으니 영국을 무대로 삼는다는 구상은 (예술가적 면모가 있는) 테러리스트 칼릴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틀 드러머 걸>

-찰리를 스파이로 훈련시키고 사랑하게 되는 가디 베커 캐릭터를 보고 처음 떠올린 배우는 마이클 파스빈더였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으로 분하기엔 독일계 특징이 분명하기도 하고, 마초적인 면이 강해 찰리의 영역을 침범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좀더 온도가 낮고 절제된 연기로 찰리를 돋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역으로서 감정 표현의 폭이 더 넓었으면 싶었다.

=그런 이야기들 들었지만 나로선 불만 없다. 억제돼 있지만 분명한 연기가 그 안에 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작은 화면으로 한번 봐서는 알아채기 어렵다는 것. 큰 화면으로 보거나 두번 보면 필요한 연기를 다 해내고 있다. 가디는 이스라엘의 전설적 스파이고 전쟁 영웅이지만 내면에 여성적 속성이 있는 캐릭터로 다가왔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겸손하고 예의바른 성격에서 영감을 받은 부분이다. 가디는 차를 다기 세트로 제대로 준비해 마시고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데 심지어 런던의 임시 숙소에서도 화분을 기른다. 해변에서 다 먹은 아이스캔디 막대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챙기는 모습도 그래서 넣은 장면이다. 찰리와 섹스한 이튿날 아침 차를 마실 때 집에서 딱 한개 챙겨온 찻잔은 여자에게 주고 자기는 못생긴 머그를 쓰는 남자다.

-유명한 연기자 집안 출신이라 어딜 가든 주목받아서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식당에서 찰리가 “당신이 흥얼대는 콧노래가 내 연극에 친구가 써준 음악이다. 공연 보러 왔던 것 아니냐”라고 추궁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은 실존한 프랑스 중세 음악가의 곡인데 친구가 가져다 쓴 것이지만 찰리는 원곡을 모르는 것이다. 원래 가디가 기욤 드 마쇼의 곡이라고 알려주는 대사가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냐고 우려를 표하더라. 그런 걱정이 많다. 티셔츠 갈아입는 것도 근육 자랑하는 걸로 보일까 봐 염려한다. 그게 더 잘난 척 같다고! (좌중 폭소) 가디가 스스로를 ‘마성의 잡종’(devilish mongrel)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도 재수 없지 않느냐고 묻더라. 괜찮다고 한번 해보고도 그렇게 느끼면 바꾸자고 겨우 설득했다.

-찰리 역의 플로렌스 퓨는 크레딧 세 번째로 이름이 나온다. 처음에는 경력상 그러려니 했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그의 이름이 맨 먼저 뜨지 않는 점이 어색하다고 느낄 만큼 박력과 존재감이 엄청나다. 바로 내 앞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류의 배우다. 직접 만나기 전에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물망에 올렸나?

=<아가씨>를 홍보하러 런던에 갔을 때 에이전트의 추천으로 영국영화연구소(BFI)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봤다. 오랫동안 함께 일하다 보니 에이전트들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배우라서 추천한 거다. 실제로 대단히 좋았고 일과 무관하게 이튿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플로렌스 퓨는 <리틀 드러머 걸> 외에도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이어가고 있다. <가족과 겨루기>(Fighting with My Family, 2019)에서 실존 레슬러를 연기했는데 그 작품을 찍고 곧장 <리틀 드러머 걸>에 합류한 것인가.

=그래서 레바논의 군사훈련 캠프 장면에서 일부러 찰리가 유도를 하고 거구의 남자를 집어던지는 장면을 추가했다. 신이 나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더라. (웃음)

-영국 미디어에서는 케이트 윈슬럿과 자주 비교하던데 동의하는지.

=그러잖아도 모니터 보면서 “방금 케이트 윈슬럿 같지 않아?” 계속 그랬다. 내가 케이트 윈슬럿을 좋아해서 비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특히 장난치고 까불 때 말고 생각에 잠기는 성숙한 느낌의 장면에서 닮아 보였다.

-어딘가 노숙한 면이 있고 저음의 목소리가 많은 일을 겪은 것처럼 들린다. 그리스에서 가디를 처음 만났을 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음색도 매력적이다.

=실제로 플로렌스는 노래를 직접 쓰기도 하고 즐겨 부른다. 처음 만났을 때 유튜브를 봐달라고 자랑하기에 봤더니 매우 좋아서 노래 장면을 시나리오에 넣었다. 그 신에서 부르는 노래는 전승되는 머더 발라드(murder ballard, 살인사건을 그리는 노래)로, 윌리엄이라는 남자가 마리아라는 여자를 결혼하자고 유혹해 죽이고 붉은 헛간에 묻었는데 마리아 어머니 꿈에 마리아가 나타나 범인이 잡혔다는 가사다.

“나는, 배우예요”

-6시간짜리 영화로 생각하고 찍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인터뷰에서 했지만 시리얼(serial) 서사이므로 구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음 회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키면서 한회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 외에도 6시간을 연달아 붙인다면 편집할 장면이 생길 것이다.

=물론 선행 에피소드의 결말과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시작 부분은 만져야 할 것이다. 6시간을 하나로 붙일 계획은 없다. <AMC>는 2회씩 한 편으로 묶어 방영됐지만 중간 광고로 어차피 계속 잘려서 그로 인한 다른 편집은 없었다.

-6회 구성에서 파악할 수 있는 리듬은, 각 회차가 찰리와 중요한 인물의 대면으로 마무리되는 패턴이다. 1회는 찰리와 마티가 정식으로 대면하는 데서, 2회는 찰리와 가디가 모사드가 계획한 ‘픽션’에 들어가 첫 임무를 시작하며 마주볼 때 끝난다. 3회는 찰리의 그림자가 픽션 속 연인인 미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숏이, 4회는 미쉘의 누나 파트메와 찰리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 마지막이다.

=각색에서 제일 역점을 둔 부분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수정도 용납하지 않았다. 방송사와 편집자들이 더 아슬아슬하게 끝내자는 제안도 했지만 물리쳤다.

-첩보물로서 주요 사건이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므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스토커>가 생각날 정도로 교차편집이 전반적으로 구사됐다. 시나리오부터 그렇게 구성돼 있었나.

=거의 시나리오대로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교차편집 측면에서 방송판이 다른 부분도 있다. 레바논에서 파트메가 찰리를 길에 버려두고 가버릴 때, 방송판은 런던에서 찰리를 걱정해 잠 못 드는 가디의 모습을 교차시켰다. 나는 레바논과 영국의 시차상 동시일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시청자는 모른다고 해도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인데,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마티와 팀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찰리를 런던에서 오디션하는 플래시백 장면도 방송판에서는 인물 한명을 CG로 지웠다. 팀의 결성을 보여주는 장면의 순서가 감독판과 달라서 생긴 일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찰리가 3장에야 등장하는데 감독판에서는 마티보다 먼저 나온다.

=찰리의 이야기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찰리는 평소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사드 비밀요원의 일을 수락한다. 그 동기와 과정을 관객에게 어떻게 납득시킬까가 중요한 난제였을 것 같다. 르 카레 원작과 다른 점이 많지만 가장 결정적 차이로 보이는 점도 이와 관련된 찰리의 대사다. “누구를 위해 일하나? 당신은 뭔가?”라는 칼릴의 질문에 원작의 대답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지만, 박찬욱판의 대답은 “나는 배우다” 한마디다. 어찌보면 르 카레가 설명한 동기보다 대중이 이해하기 더 까다로운 동기다.

=찰리의 모델이었다는 르 카레의 동생에게 소설 속 찰리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머리에 누가 총을 겨눈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위험한 일을 했을지. 그가 조금 생각하더니 “배우니까.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라고 답하더라. 호기심, 모험심, 쉽게 사랑에 빠지는 기질을 말한 것일 터다. 배우니까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그의 대답에서 영감을 받아 “나는 배우다”라는 대사를 썼다. 물론 사랑도 큰 이유지만 거기서 그렇게 말하기는 뭐랄까 오글거린달까. 여자의 동기는 결국 사랑이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칼릴은 배우라는 답을 신념 없이 돈 받고 시키는 연기를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배우는 그런 존재인가 싶어 슬퍼지기도 해서 그 문답이 마음에 들었다. 설득력의 문제는, 우선 찰리가 본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시오니즘을 반대한 것은 신념이라기보다 당대 유행과 그가 속한 무리의 주류적 이념을 피상적으로 따른 결과라고 봤다. 어느 사회에나 사상을 속속들이 고민해 취하기보다 유행처럼 진영을 택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나도 예전에 그랬고. 마티는 바로 그런 찰리의 행동 없는 이념의 허약함을 파고들어 자극한다. “그렇다면 넌 극단적 중도파(extreme center)인가?”라고. 그리고 찰리는 스파이 일을 경험하면서 철저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둘 다 부정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건 진정한 자기 입장을 갖게 될 거다. 한편 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덤빌 줄 아는 용기와 대담성이 있다. 그것이 찰리의 본질이자 배우의 속성이며 플로렌스 퓨가 특별히 잘 보여줄 수 있는 면모라고 봤다.

-찰리를 포섭하는 미끼 가운데 원작 소설에는 할리우드 캐스팅 기회와 금전적 보상도 없는데 드라마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스파이 일 자체가 배역이고 연기라는 점 자체로 찰리는 충분히 끌렸을 거라고 봤다. 물론 젊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티는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찰리의 ‘고독한 재능’(lonely brilliance)과 현재 속한 극단의 초라함을 강조한다.

-원작과 달리 마티와 가디, 칼릴이 “여기서 그만둬도 좋다”고 한번씩 말하는 것도 찰리의 특별한 동기를 부각하기 위한 것인가.

=셋의 유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찰리가 항상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 나와 플로렌스에게 중요했다.

-<리틀 드러머 걸>의 사랑은 작전 수행하다 연애하는 차원이 아니라, 찰리가 가디에게 느끼는 감정이 작전의 성공에 핵심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멜로 장르는 아니지만 사랑과 섹스가 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로 표현돼야 한다고 판단했나.

=사랑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각색, 편집 과정에서 희석되지 않도록 줄곧 주의를 기울였다. 이 이야기의 핵심에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은 아주 복잡하다. 찰리는 가디를 좋아하는데, 가디는 나를 좋아하려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미쉘을 좋아해야 한다고 말한다. 찰리는 가디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누군지도 잘 모르는 남자와 나누는 밀회와 섹스를 상상한다. 가디는 더하다. 작전에 끌어들인 대상을 좋아하게 됐고 가까이 두려면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위험한 일이니 밀어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지질하게 꼭 안 해도 된다는 암시만 주며 알아서 떠나기를 기대한다. 찰리는 그럴수록 의지를 굳힌다. 팔레스타인 조직으로 들어갈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는 아예 가디의 어깨를 눌러 주저앉혀 행운이나 빌어달라며 압도한다. 마지막에 찰리는 ‘금사빠’답게 칼릴을 좋아하게 되는데, 가디는 찰리가 미처 모르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고자 그와 함께 자라고 무언의 종용을 한다. 그리고 계속 둘이 있는 집을 감시하며 지시를 따르는 찰리에게 안도하는 동시에 질투한다. 서베를린의 가디를 찰리가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나는 감격적 재회가 아니라고 배우들과 이야기했다. 재회한 두 사람이 들어간 집 안에서는 키스가 아니라 길고 격한 찰리의 추궁이 이어질 것이라고. 남자를 앉혀놓고 당신과 마티가 무슨 계획이었는지, 결과가 달랐으면 어쩔 셈이었는지 가디의 변명을 다 들어보고 봐줄 만한지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 긴 대화의 단계 없이는 포옹이고 뭐고 없다고 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로맨틱하지만은 않은 결말이다.

-<BBC>판에서 생략된 가장 아까운 숏 가운데 섹스 신 일부도 있다. <리틀 드러머 걸>에는 우선 역사상 가장 간결한 오르가슴의 묘사가 있고(웃음), 마지막 정사 신에는 침대 프레임을 이용해 인물이 잠자리 안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는 절묘한 이미지가 있다.

=먼저 찰리와 가디의 정사는 예정된 수순이라 자세히 묘사해봐야 뻔하다고 판단해 간결하게 가려고 했다. 반면 칼릴과의 장면은 어딘가에서 가디가 눈으로 정확히 못 봐도 적어도 뇌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양상을 다르게 만든다. 다소 변태적이고 세 인물이 함께하는 듯한 상황이다. 찰리가 침대에서 “이런 거야? 됐어?”라는 투로 렌즈를 보는 다음 순간 가디는 외면한다. 마치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이 섹스 신에는 스토리가 있다.

“저런 사람 처음 본다”

-3개국의 로케이션으로 레바논, 독일, 오스트리아, 이스라엘까지 그려내야 했다.

=촬영 장소가 30~40곳이었다. 마리아 듀코비치 미술감독의 능력에 크게 빚졌다. 마리아는 영국인이지만 부모가 체코와 유고 출신이다. 여행을 많이 하고 영화도 많이 찍어서 서유럽과 중부유럽 구석구석을 알고, 가보지 못했더라도 예컨대 오스트리아 어떤 지역의 풍경과 비슷한 곳을 찾으려면 체코의 어디로 가야 한다는 기준과 정보가 있다. 정확한 상을 갖고 로케이션팀에 요구하고 대충 만족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내가 “뭐 아름다운데 여기서 찍읍시다”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로케이션 헌팅에 감탄을 많이 했다. 1회의 파르테논 신전은 방영 당시 크게 화제가 됐다. 유적을 비추는 바닥 조명으로 찰리와 가디가 그림자놀이를 하는 장면은 <아가씨>에서 숙희(김태리)가 히데코(김민희)의 이를 갈아주는 신에 견줄 만큼 로맨틱하다.

=나는 막후에서만 들었지만 허용 여부를 두고 그리스 국내 뉴스로 떠들썩했던 모양이다. 그림자놀이 장면은 김우형 촬영감독 아이디어다. 알고 보면 낭만 소년이다. (웃음) 시간이 딱 하룻밤이고 거기서 1회의 낭만적 정점을 찍어야 하니 고민스러웠는데 신전에 설치돼 있는 조명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용한 김우형 촬영감독이 소리 지르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실체를 몰라서 저 작고 조용한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지 주시하던 영국인 스탭들이 촬영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우리 현장은 A 카메라와 스테디캠 또는 망원렌즈로 B 카메라를 써서 항상 두대의 카메라를 돌렸다. 이 두 번째 카메라를 담당한 영국 기사가 할리우드 대작을 많이 경험한 자부심 강한 사람이었는데, 야심차게 앵글을 잡은 다음 모니터 앞으로 와서 김우형 감독의 A 카메라 촬영분과 비교해보고는 낙심하곤 했다. 모사드가 미쉘을 납치하는 신을 찍을 때는 김우형 감독이 자동차 뒷자리에 슬라이드를 설치하고 정교하게 패닝하는 것을 보며 나한테 저런 사람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

-찰리가 마티와 가디의 정체를 알고 스파이 오디션을 받는 아테네의 안가는 흔히 생각하는 밀실은커녕 휴양지 빌라에 가깝다. 같은 시간 심문받는 미쉘이 갇혀 있는 협소한 감방과 교차편집돼 대조가 강하다. 여러 곳 등장하는 호텔 중에는 경사진 대들보가 세 인물을 분리하고 얼굴을 가린 채 대화하게 만드는 방이 인상적이다. <스토커>에서도 비슷하게 시선이 가로막히는 식탁 신이 있었다.

=그 방은 트랜스 호텔이라는 체코의 버려진 숙박업소다. 감독이건 미술감독이건 해외에 가면 대개 현지팀이 추천하는 장소를 주로 다니는데 마리아 듀코비치 미술감독의 장점은 이동 중에도 가만있지 않고 감이 오면 무작정 뛰어들어간다는 거다. 트랜스 호텔도 그렇게 발견했고 객실 중 구조가 특이한 방을 내가 골랐다. 방의 구조에 맞춰 스토리보드를 짰고 결과적으로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촬영과 편집이 제일 잘됐다. 툭툭 튀는, 물 흐르는 듯한 편집이 아니라 방송판에서는 짧아졌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이다.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하지 않은 콘크리트 공공 건물들을 마치 미니멀리즘 연극의 무대장치처럼 활용한 숏들이 있다.

=“현실 극장”(theatre of real)이라고 마티가 말했듯 <리틀 드러머 걸>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연극이다. 프로덕션 초기 미술감독이 브루털리스트 건물(자재를 그대로 노출하고 기능을 형태로 드러내는 건축 경향.-편집자)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배경으로 대담한 색상의 옷을 입은 인물을 놓자는 컨셉을 내놓았다. 아이디어는 뛰어나고 실행하는 덴 지독하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반군 훈련 캠프에서는 저항의 깃발이자 활동복으로 죽은 전사의 얼굴을 프린트한 체 게바라 티 같은 티셔츠를 만들어 입는다.

=난민 캠프에서 실제로 입는 옷이라고 한다. 그런 고증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따로 있어서 한국영화계에도 있었으면 싶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다들 선수가 됐지만, 전문가들이 다르긴 다르더라.

-고증을 말한 김에, <리틀 드러머 걸>은 1970년대 말의 정세를 무대로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지금도 현존한다. 책도 드라마도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제로 삼지 않지만 민감한 소재인 만큼 양쪽 입장에서 검수하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첫째 존 르 카레가 워낙 잘 썼다. 본인의 책 중 가장 취재와 인터뷰를 많이 한 작품이라고 한다. 동서의 첩보전은 본인이 스파이 출신이라 잘 아는데, 이쪽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만큼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모사드 고위 인물까지 만나 쓴 책이다. 균형 잡힌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BBC>도 각본이 수정될 때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검토하게 했다. 편집본도 보여줬다. 나는 나대로 현장에 양쪽에서 온 배우들이 있으니 리딩부터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물었다. 팔레스타인인 역을 한 배우들은 대개 파리에 거주하는 레바논인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족은 레바논에 살고 있으므로 믿을 만한 의견을 줬다.

-원작의 젠더 묘사에 변화를 줬다. 창녀라는 표현이나 남자친구가 찰리를 때리는 장면이 없어졌고, 여성이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누드가 될 때 카메라워크를 신경 쓴 점이 눈에 띈다. 모사드 요원 중 흑인 여성이 있고 밍켈 교수의 성별도 바뀌었다. 폭탄 테러범 스웨덴 여성도 철없는 급진주의자로 대상화하지 않고, 주인공 찰리와 평행하는 인물로 보여주는 편집이 있다.

=노력했다. 다행인 건 시대가 바뀌면서 나의 방향성에 모두 동의해주었다는 점이다. 단, 모사드 요원 레이첼을 흑인으로 설정한 것은 내 생각은 아니다. 내 상상력 밖이었던 거다. 흑인 이스라엘인이 실제로 많이 있고 만약 내가 모사드의 채용 담당이었다고 해도 상대의 눈을 속이기 쉬운 그런 인물을 채용했을 것 같다.

-이야기 구도가 명백히 ‘리틀 걸’이 국제 정치판에 휘말리는 이야기인데도 남자둘에게 교육받는 어린 여자로 보이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

=플로렌스 퓨를 캐스팅할 때부터 의도한 방향이다. 배우부터가 수동성을 참지 않는 여성이고, 각본을 쓸 때도 연기를 할 때도 조금씩이라도 능동적인 방향으로 캐릭터를 몰고 갔다. 어떤 당혹스럽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찰리는 기죽지 않고 농담을 시도한다. 파르테논 신전의 역사에 대해 가디가 맨스플레인을 할 때 앞선 암기력을 과시하며 “역사 레슨 고마웠다”고 일축하고 “여성의 흡연을 반대하는 남자는 반대한다”고 받아친다. 나중에는 플로렌스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웃기지 않는 농담이라도 계속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래야 더 위축된 진심도 표현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고 주장하는 만큼 용감하거나 똑똑하지 않은 면모도 동시에 표현한다. 볼수록 신기한 배우다.

=그래서 당신보다 당신의 부모가 궁금하다고, 어머니, 아버지 뭐 하는 분인지 궁금하다 그랬다. (웃음) 그랬더니 BFI런던영화제에서 1, 2회를 극장 상영한 날 부모님을 모셔와서는 “궁금하다 그랬죠? 여기요”하고 소개했다. 빛나는 눈과 호기심이나 의견이 많은 점이 아버지를 닮았더라. 그날도 아버지가 두편을 보고 분석한 내용을 자세히 들려줬다.

-미국의 서부극과 한국의 형사물이 차기작 후보다.

=아마존 스튜디오와 이야기 중인 서부극의 시나리오는 매일 쓰고 있고 캐스팅이 진행 중이지만 그 이상의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상황에 따라 한국영화를 먼저 들어갈 수도 있다. 런던을 방문한 정서경 작가와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따금 만나 살을 붙이고 있다. 주인공이 남성 형사지만 한국영화에 자주 나오는 거친 유형은 아니고 내성적이고 완력을 쓰지 않는 인물로 상상한다. 조용조용 수사하는 루틴을 보여주고 싶고 대등한 비중의 여성 주인공도 나온다. 여성 인물을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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