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생일> 배우 전도연, "작품으로 감독과 소통하면 된다 그러면 존중이 생긴다"
2019-04-11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전도연과 대화하는 건 재밌다. 그가 달변가여서가 아니라 솔직하기 때문이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아닌 건 아니다, 생각과 느낌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솔직함이 무례함이라면, 전도연은 무례하지 않게 솔직하게 말하기의 대가다(때론 뼈아픈 훅을 날리기도 하지만). <생일>의 이종언 감독은 그걸 두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진심이 아닌 게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때로 배우들은 능수능란하게 포장의 기술을 발휘하곤 한다. 가령 “상대배우와의 작업은 어땠어요?” 같은 그 흔한 인터뷰 질문 앞에서. 신인일수록 여성일수록 이해와 인내와 포장술이 장려된다. 솔직하게 말하려면 눈치 보지 않을 힘이 필요한데 전도연은 드물게 그 힘을 가진 배우다.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자존감은 전도연의 또 다른 무기다. 그 힘의 원천은 연기이며, 그 힘을 갖기까지 누가 뭐래도 ‘열심히’ 연기했다. 감독은 감독의 본분을 다하고 배우는 배우의 본분을 다해서 좋은 영화라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오로지 목표인 배우. 진정한 프로페셔널 전도연이 반추하는 과거는 그래서 미화되지 않는다.

<씨네21> 창간 24주년 별책부록의 주인공인 전도연을 만났다. 어쩌다 보니 여성 영화인으로는 별책의 첫 주인공이 되었다. 전도연의 안목과 노력을 말해주는 공들여 채운 필모그래피는 별책부록에서 찬찬히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기존 정기구독자 외에 씨네21 스토어 ‘cine21store.com’을 통해 구매 가능하다.-편집자) 1997년 <접속>으로 스크린에 등장해 2019년 <생일>로 오랜만에 관객을 만난 전도연은 한국영화의 여왕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좋은 영화가 있는 곳에 전도연이 있기를 여전히 꿈꾼다.

-<씨네21> 창간 24주년 기념 별책부록의 주인공이다. 박찬욱, 봉준호, 송강호, 정우성에 이어 올해는 전도연이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듣고 감사했다. 지난 인터뷰나 기사를 보며 내가 작품을 해온 시간을 돌아볼 계기가 되겠구나 싶더라. 그런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 과거에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약간 두렵기도 하지만. (웃음)

-<인어공주>(2004) 필리핀 촬영현장 동행기도 다시 들춰 보니 재밌더라.

=그때 <씨네21>에서 필리핀까지 오셨었나? 생각해보니 언제부턴가 현장 공개 과정도 없어진 것 같다. <인어공주> 찍을 때 제주 우도에서 11월인가 12월인가 한창 추운 때 현장 공개하느라 바다에서 포즈를 취했던 기억이 난다. 그 추운데 몇 시간을 바닷속에서. (웃음)

-영화 데뷔 20주년이던 2017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특별전을 열었다. 작품 수가 많을 경우 대표작을 선정해 상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땐 <접속>(1997)부터 <남과 여>(2015)까지 17편의 전작을 모두 상영했다. ‘전도연의 베스트’를 선정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만약 자신이 직접 ‘출연 영화 중 베스트’를 꼽는다면 어떻게 하겠나.

=인터뷰할 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베스트 몇편을 꼽기는 힘들 것 같다. 다작하진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한 작품 한 작품 애정이 크다.

-<씨네21>은 2017년 ‘한국영화 최고의 여성 캐릭터 20’을 선정했다. 그때 <밀양>(2007)의 신애와 <해피엔드>(1999)의 보라가 포함됐다.

=<밀양>의 신애와 <해피엔드>의 보라는 내게 상징적인 인물이다. 의미 있는 작품을 꼽을 때 반드시 꼽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 <해피엔드>의 최보라는 배우의 길을 열어준 캐릭터고, <밀양>의 신애는 그때까지와 다른 연기 인생을 걷게 해준 캐릭터다.

-<밀양> 이후 출연작 중 최고의 여성 캐릭터를 한명 더 꼽는다면.

=<무뢰한>(2014)의 혜경이다. <무뢰한>은 기본적으로 누아르 장르고 남자 이야기다. 남성 중심 영화에서 대상화될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깨버린 게 김혜경인 것 같다. <무뢰한>을 선택할 때 오승욱 감독님한테 그걸 깨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영화 데뷔 이후 1년 넘게 스크린을 떠난 적 없다가 <남과 여> 이후 3~4년간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확신이 드는 작품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면 10년 전에도 여성 캐릭터의 단조로움이나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 부족을 토로하기는 마찬가지더라.

=작품을 고를 때 캐릭터를 보고 찾는 건 아니다.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그 좋은 이야기 속에 분명 좋은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적, 장르적 다양성이 부족한 탓인 것 같다. 한 가지 장르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 같은 걸 되풀이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근엔 다양한 이야기가 조금씩 시도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고, 이 작은 변화가 큰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남자배우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늘 차기작 스케줄이 꽉 차 있다.

=답답한 마음은 있다. 항상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으니까. 비단 한국영화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할리우드에서도 여배우들이 비슷한 얘기를 하지 않나. 왜 우리를 위한 영화는 없느냐고.

-여성감독과 작업한 건 <집으로 가는 길>(2013)의 방은진 감독 그리고 <생일>(2018)의 이종언 감독, 이렇게 두번이다.

=<집으로 가는 길> 때는 감독님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배우로서 선배님이기도 하고 감독님이기도 했으니까. ‘선배 배우’라는 인식을 벗어버리기 힘들었고 그 때문인지 ‘배우와 감독으로 온전하게 소통을 잘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관계가 작용한 영화였다. 이종언 감독님과는 평소 방식대로 소통한 것 같다. 여자감독이든 남자감독이든 소통 방식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개인의 성향 차이가 있는 거지.

-동성이어서 심적으로 편안함을 느낀 지점은 없나.

=동성이라고 내가 더 이해받고 혹은 더 이해해주고 그런 건 없었다.

-결혼 전엔 ‘스스로 천생 여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거나 ‘결혼하면 일을 그만둘 수도 있지’라는 얘기도 하고 살았더라. (웃음) 일에서는 전투적인데,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과 여성상을 어느 정도 긍정하는 말이라 흥미로웠다.

=누구나 자신의 단면을 보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타인을 통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하고 깨닫게 된다. 나는 결혼한 뒤 나를 알게 된 것 같다. 결혼하고 타인과 아주 가까이에서 부딪히며 살다 보니, ‘내가 여성스럽지만은 않구나’싶더라. 남편도 그런 말을 했다.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라고. (웃음) 어릴 땐 확실히 여성스러운, 여성적인 모습을 많이 지향했다. 실제의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끔 영향을 미친 주변 인물이 있나. 좋아하거나 닮고 싶은 인물이라든지.

=그렇지는 않다. 사랑받는 캐릭터,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돼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지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 여성성이 없진 않은데, 소통할 땐 남자들이 좀더 편하고 부담 없긴 하다.

-이종언 감독은 “<밀양>의 스크립터로 일할 땐 전도연 배우의 눈도 잘 못 마주쳤다”면서 <생일> 초반까지도 전도연이란 배우는 본인에게 어려운 존재였다고 하더라. 물론 “감독이라면 전도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지만. 감독이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느낄 때 어떻게 감독과 거리감을 좁히려 하는 편인가.

=내가 그 거리감을 좁힐 순 없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내가 맡은 인물이 돼 연기하는 것이다. 이전엔 나를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면 신경쓰였는데 지금은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작품으로 감독과 소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존중이 생긴다. 나도 감독에게, 감독도 배우 전도연에게. 조금씩 서로 편해지기도 한다. 이종언 감독님도 그랬다. <생일> 전에는 감독님이 나를 ‘언니’라 불렀고 나도 감독님을 ‘종언아’ 하고 불렀다. 작품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선 깍듯하게 감독님이라 불렀다. 감독님에 대한 존중, 글에 대한 존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거니까 예의를 갖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내 소통 방식이다.

-<생일> 이후에 찍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김용훈 감독도 신인인데, 젊은 신인감독에겐 전도연이란 배우가 거대하고 어려운 존재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부담이 크겠지. (웃음)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워하지 않으면 섭섭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날 편하게 생각하세요?” 하고 따져 물을 것 같다. 어느 정도 어려워하는 건 좋다고 생각한다. 어려우면 긴장하게 되고 긴장감이 생기면 실수를 덜 하게 된다. “실수하지 마세요. 저 실수하는 거 싫으니까” 그러기도 한다. (웃음) 현장에서 치열하게 열심히 연기한다. 긴장감이 떨어져서 실수하고 불편한 것보다 오히려 조금 어렵더라도 긴장하고 실수를 최소화하는 게 좋다.

-촬영할 땐 어떻게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을 유지하나.

=촬영할 때 외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연기하기 위해 카메라 속으로 들어가는 때 이외에는 편하게 지낸다. 작품 하는 내내 그 감정을 머금고 있으면 감정적인 피로가 너무 크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집중해야 해. 이 감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해.’ 그렇게 생각한다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감정에 지쳐서 연기하기 싫어질 수도 있다. “자, 중요한 신이니까 감정 잡게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그러면 너무 부담스럽다. (웃음) 내가 “잠깐만요”라고 요청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

-<생일>의 순남과 <밀양>의 신애는 아이를 잃은 엄마라는 상황이 같다. 다만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밀양>을 찍을 땐 엄마가 아니었고 <생일>을 찍을 땐 엄마였다. 그 때문에 캐릭터를 접근하는 법이 달랐다고 했는데, 결혼 전과 후, 엄마가 되기 전과 후, 신상의 변화가 연기에 미친 영향이 있는지.

=<생일>은 확실히 영향이 있었다. 엄마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있으니까 한걸음 빠져 있으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밀양>의 신애를 연기할 때도 그 감정이 충분히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가지지 않은 부분 때문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자꾸 의심했던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걸 더 알고 싶어서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이창동 감독님은 “그냥 네가 느끼는 만큼만 하라”고 했는데 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느끼는 건 똑같을 수 있는데. 그 인물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경험이 미치는 영향이 큰 건가.

=경험이 끼치는 영향도 크지만, 경험했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도 있지만 경험하면서 감정적으로 달라지거나 무언가가 더 생겨나는 것 같진 않다. 제일 중요한 건 경험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 하는 거다.

-<생일>도 처음엔 고사했었고,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도 여러 번 거절했다가 출연한 작품이다. 하게 될 작품은 하게 된다는 운명론을 믿는 편인가.

=운명론, 정말 믿는다. (웃음) 거절하더라도 내가 해야 될 작품이면 어떤 식으로든 돌아서 오는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 낳은 후 출연한 작품이 <하녀>(2010)인데, <남과 여>는 그때 처음 들어온 작품이다. 출연하기 어렵다고 거절하고 긴 시간이 흘렀는데 결국 돌아 돌아 오는 걸 보면 내가 해야 하는 작품이었던 거다.

-사람간의 관계에도 인연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나.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감독이 있다거나, 만나려고 의도한 건 아닌데 계속 만나게 된다거나.

=인연이 작용하지 않을까? ‘그냥’은 없는 것 같다. 다 인연이 있어서 만나게 되고 부딪히게 된다. 신인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해서 같이 일해보지 않은 감독이 더 많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으로 만나게 될 감독이 있지 않을까 싶다. 봉준호 감독님을 좋아한다. 감독님도 전도연이란 배우에게 호기심이 있다. 그렇다면, 전도연이란 배우를 생각하고 있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함께할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그에 반해 이윤기 감독은 두번, 박흥식 감독은 세번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정서를 가진 감독님들이다. 스펙터클하고 극적이진 않지만 소소하고 잔잔한 일상의 감정을 잘 포착하는, 감성이 좋은 분들이다.

-그런 정서라면 <해피엔드>를 함께한 정지우 감독과도 잘 맞을 것 같은데.

=정지우 감독님과 다시 하고 싶은데 이제는 감독님의 페르소나가 (김)고은양이 돼버려서. (웃음)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나서 이윤기 감독님의 <멋진 하루>(2008)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지만 내가 좋아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다 잘 맞았던 건 아니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 이윤기 감독님을 그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됐다. 박흥식 감독님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인어공주> <협녀, 칼의 기억>(2013)을 함께했는데, <협녀, 칼의 기억>은 <인어공주> 때부터 말씀하신 작품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영화가 만들어지게 됐고, 내게 제안이 왔을 땐 그냥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를 하셨으니 역할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이건 해야지’ 생각한 게 <협녀, 칼의 기억>이다.

-영화의 결과에는 그만큼 아쉬움이 크겠다.

=사실 내가 출연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게 <협녀, 칼의 기억>이다. 시나리오가 참 좋았다. 시나리오를 뛰어넘는 작품이 얼마나 있나 싶지만, 완성된 영화가 시나리오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2007년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칸의 여왕’이라 불리며 배우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한껏 누렸다. 그다음 전도연의 선택이 궁금했는데, 언급했듯 <멋진 하루>였다.

=부담을 빨리 떨쳐버리려 했다. <멋진 하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남들의 생각이나 시선보다 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타협하지 않고 내 마음을 따라 결정한 작품이다. 뭐?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주변에선 그런 반응이었지만. (웃음)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영화가 잘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이윤기 감독님을 다그쳤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땐, 그땐 하정우씨가 캐스팅되기 전이었는데, 완성된 영화와는 색깔이 다른 이야기로 읽었다. 그런데 하정우란 배우가 들어오면서 그 친구가 가진 특유의 유쾌함, 엉뚱한 발랄함이 더해졌다. 그게 좀 불편했다. 하정우씨의 연기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특이함과 내가 섞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 약간 있었다. 내가 생각한 병운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운 캐릭터가 저게 맞나?’ 의심하면서 감독님은 왜 하정우씨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까 싶었던 거지. 그래서 감독님한테 “이 작품 못 나오기만 해봐요” 했던 거다. 근데 결과적으로 영화가 너무 좋았다.

-칸국제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밀양>과 <하녀>가 경쟁부문에 출품된 이후 제67회 때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한국 배우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건 처음이었다. 심사위원으로 찾은 칸은 어땠나.

=영화제 심사가 처음이었다. 언어 문제도 있고, 자막 없이 영화를 봐야 하고. 겁이 나서 처음엔 하지 않으려 했다. 이창동 감독님한테 상의했더니 뭘 고민하느냐며 부딪혀보라더라.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경험들이 신기하다. 꽤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멋진 시간이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다른 심사위원들과 의견 충돌은 없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심사위원 중에 심사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심사 경험이 없고 언어소통도 원활하지 않으니 모든 심사위원이 걱정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제인 캠피온 감독도 알게 모르게 끙끙댔을 거다. “도대체 저 배우를 어떻게 하지?” 그런 분위기. (웃음) 그들에겐 내가 여러 가지로 걱정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영화제쪽에서도 자막이 없으니 작품의 대사를 주겠다고 하더라. 일단 대사를 보지 않고 영화를 보겠다고 했는데, 막상 보니 되더라. 나도 놀라웠다. 내가 영화를 잘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너희가 나를 걱정스럽게 보긴 하지만 나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똑같이 이 자리에 있는 거야’ 하는 생각도 들더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본 만큼 느낀 만큼만 이야기하려 했다. 첫 회의 때는 발언권이 한번 정도 있었다. 통역이 있었지만 토론 형식이라 이야기할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 그래서 일단 많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감상을 이야기했는데, 제인 캠피온이 너무 훌륭하다더라. 그렇게 존중받기 시작했다. 그전엔 밥도 통역으로 동참한 PD 언니와 둘이 먹었는데, 그 후로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같이 밥 먹어도 돼?”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석하고, 밥 먹으면서 영화 이야기하고. 그 상황을 단편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왕따에서 호감이 되기까지? (웃음)

-당근과 채찍 중 뭐가 더 자신을 전진하게 만드는 것 같나.

=채찍.

-칭찬은 충분히 들었기 때문일까?

=잘 안 믿는다. 남의 칭찬을. 칭찬 듣고 싶을 땐 해달라고 말한다. 나 잘했으니까 칭찬해달라고. 내가 요구하지 않았지만 듣게 된 많은 칭찬과 찬사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한테 냉정한 편이라고 해야 되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에게 엄격한 편인가.

=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원칙과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간 약속 꼭 지켜야 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날 어려워한다. 난 실수 안하는데 넌 왜 실수하니? 이런 것 때문에. 예전에 제일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그럴 수도 있지’였다. 내 입장에선 ‘실수를 안 하면 되잖아! 왜 그럴 수 있어? 안 그럴 수도 있는데’인 거고. 지금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게 됐다. 이게 여유인지 성숙한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와 다름을 존중한다.

-앞서 <무뢰한>의 김혜경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는데, <무뢰한>을 생각하면 김혜경이 입고 나오는 화려한 컬러와 패턴의 의상이 강렬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동안 영화에서 유니폼이나 일상복을 주로 입었다. 드레스업한 영화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혜경에게는 의상이 중요했다. 그 의상이 무기 같은 것이었다. 전투복 같은. 잘나가던 텐프로 출신이 삼류 술집까지 와서 퇴물 취급받게 된 거잖나. 김혜경이란 여자가 설사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옷까지 그렇게 입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자기를 무장하고 있는 여자, 그게 김혜경의 비주얼이라고 생각했다.

-의상이나 메이크업 등 캐릭터의 비주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얼마나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편인가.

=꼼꼼하게 신경 쓴다기보다 컨셉 잡을 때 그 인물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특정 옷, 특정 색깔을 얘기하진 않고 이 인물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한다. <생일> 준비할 땐 어느 날 갑자기 ‘이 여자의 얼굴이 온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은 속 썩고 힘들고 아프면 기미가 올라오지 않나. 그래서 기미가 올라오고 그늘진 느낌의 얼굴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내게 좀더 잘 어울리는 각도, 나를 돋보이게 해줄 의상 등 카메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는 배우도 많은데, 전도연이라는 배우는 그런 것에 연연한 적 없다.

=내가 화면에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어떤 인물로 보이는지가 중요하니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어떤 인물인가가 너무 중요하지.

-재밌게도 드라마 <굿 와이프>(2016)의 캐릭터 이름도 김혜경이다.

=나도 작가님한테 물어봤다. 의도한 거냐고. <무뢰한>의 김혜경이 좋아서 그 이름을 생각했다더라.

-<굿 와이프>는 <프라하의 연인>(2005) 이후 11년 만에 출연한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자칫 과장되게 널을 뛰거나 오히려 평평하기 쉬운데, 완성된 대본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캐릭터를 구축해갔나.

=후반부가 되면 대본이 급박하게 나오긴 한다. 잠을 포기해가면서 신경 쓴 건 캐릭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거였다. ‘김혜경이란 인물이 이 상황에서 이럴 수 있을까’ 하면서, 대본이 나오면 감독님과 작가님의 동의하에 김혜경답게 바꿨다.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작업은 재밌었다. 이정효 감독님이 감각 있고 똑똑한 분이어서 함께 작업하며 좋았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촬영한 작품이다.

-올해 하반기에 개봉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선택한 작품인가. 전도연과 정우성의 첫 만남이란 점에서도 기대를 모으는데.

=기대했다기보단 이야기가 재밌고 독특했다. 미스터리, 스릴러, 누아르가 섞여 있는데 내가 연기한 연희 캐릭터에는 블랙코미디의 느낌이 있었다. 블랙코미디 장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도 했다. (정)우성씨는 데뷔 때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신기하게 작품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나도 신기하지만 주변에서도 다들 신기해한다. 내가 주로 나이 있는 오빠들과 연기를 많이 했다. (웃음)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처 많은 캐릭터를 쓸 때 창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떠올리는 것 같다. <인어공주>의 연순처럼 한없이 밝고 가벼운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고 싶진 않은지.

=나 역시 무겁지 않은 이야기 속의 밝은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 그런데 들어오는 작품을 보면 감독님들의 인식 속에 내 이미지가 박제화된 것 같다. <남과 여> 이후 그걸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 <생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또한 앞서 얘기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웃음)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어떻게 해야 무게감을 덜어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래전부터. 그러려면 작품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쉽진 않겠지. 선택도, 기다리는 시간도.

-쉬는 동안 시사회를 많이 가서 “내가 시사회용 배우인가 싶었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 있는데, (웃음) 최근 본 한국영화 중에 인상적인 작품이나 배우가 있다면.

=최근 본 한국영화는 <돈>. 아직 <우상>과 <악질경찰>은 보지 못했다. <돈>에도 나오는데 요즘 조우진이란 배우가 참 좋다. <마약왕> 보고도 깜짝 놀랐다. 조우진이 저렇게 섹시한 배우였어? 그런데 <돈>에도 나오더라. 이 사람 내공이 보통은 아니구나 느껴졌다. 영화 보고 <무뢰한>을 함께하고 <돈>도 제작한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님한테 문자를 보냈다. “조우진씨는 사랑입니다.” (웃음) 조우진 배우에게 잘 전해주겠다고 하셨다. 언젠가 같이 연기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 함께하고픈 배우와 감독들이 아직 한참 남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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