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인기를 끈 <시체들의 아침>이라는 중편영화가 있다.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 중고 DVD를 사겠다며 찾아온 중학생과 좀비영화를 찍고 망해버린 영화감독 이야기였는데, 영화감독은 중학생에게 영화를 보게 허락해주면서 “<부산행>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화”라며 겁을 준다.
그 장면을 보면서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잠시 생각해봤다. <시체들의 새벽>은 분명 훌륭한 영화다. 몇십년 동안 꾸준히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의 관객이 <부산행>보다 <시체들의 새벽>을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기성세대 호러 팬의 오만이 아닌가 생각한다. 호러영화의 자극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옛날 호러영화들은 이전처럼 무섭지 않다.
종종 내가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를 진짜로 무섭게 본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낡은 동네 극장에서 <페노미나>(1985)를 본 건 내 생애 최고의 호러 경험이었다. 그 뒤에 장르 팬으로서 아르젠토를 포함한 수많은 이탈리아 호러영화들을 보았고 그 아름다우면서도 불쾌한 세계에 매료되었지만 <페노미나>를 보았을 때만큼 무섭지 않았고 그 공포 효과는 매번 볼 때마다 조금씩 떨어져갔다. 다행히도 좋은 호러영화는 호러의 자극이 닳더라도 재미가 떨어지는 법은 없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무서움’
얼마 전에 다리오 아르젠토의 대표작 <서스피리아>(1977, 도대체 이 영화가 <서스페리아>라고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아직도 <서스페리아>라는 제목을 고수하는 것일까?)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가 리메이크했다.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아르젠토는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리메이크 영화를 보았는데, 충분히 그럴 법하다. 리메이크 영화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아르젠토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탈리아 호러영화와 전혀 다른 영화가 나왔다는 말이다.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어떻게 보아도 이탈리아 호러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칭찬처럼 들린다. 새 영화는 지적이고 선정적이지 않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캐릭터가 생생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영어 대사는 잘 다듬어져 있다. 아르젠토의 영화는 정반대다. 스토리는 엉망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간다. 대사들은 종종 어이가 없을 정도로 바보스럽다. 연기는 밋밋하고 후시 영어 더빙은 더 안 좋다. 살인 장면은 인상적이나 지금 보면 칼에 찔린 마네킹에서 빨간 물감이 뿜어져 나오는 게 너무 티가 난다.
욕같이 들린다고? 그런데 이게 욕이 아니다. 60년대서 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짧은 전성기 동안 이탈리아 호러를 지탱해왔던 매력이다. 한마디로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잘 만들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처럼 잘 만들지는 않았지만 최근 나온 이탈리아영화도 이전의 이탈리아영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옛 선배들의 영화들과 같은 트릭을 쓰고 있지만 그 느낌이 아니다.
종종 가짜 티 나는 빨간 물감이 추방당한 뒤로 이탈리아 호러는 힘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빨간 물감이 든 마네킹을 계속 찔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르젠토는 지금까지 꾸준히 호러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전만 못하다. 이게 그의 잘못일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의 다리오 아르젠토는 80년대의 아르젠토와 같은 예술가다. 단지 지금은 아르젠토의 미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다. 이탈리아 호러라는 괴물이 온전하게 현재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간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짧은 유통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일단 60년대에 마리오 바바가 <사탄의 가면>(1960)으로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문을 열었다. 그는 발랄한 흑백 서스펜스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여자>(1963)로 지알로라는 피투성이 서브 장르를 창시하기도 했다. 바바는 창의적이고 위대한 영화예술가였고 호러 장르의 어휘를 넓히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지금도 그의 트릭들은 여전히 쓰인다. 얼마 전에 테일러 실링이 나오는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호러영화 <프로디지>(2019)를 보았는데,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장면은 바바의 후기작 <악령의 밤2>(1977)에서 그대로 훔쳐온 것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바바의 작품들은 옛날 영화 티가 난다. 영어 더빙 문제는 어쩔 수 없고 특수효과의 한계도 있다. 하지만 바바의 영화는 아르젠토의 영화와 같은 심각한 각본 문제는 없다. 바바의 영화들은 19세기 유럽 문화의 영향을 제대로 받은 교양인의 작품으로 테스트도, 서브 텍스트도 풍부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극악스러운 각본으로 유명한 루치오 풀치의 초기작 <오리를 괴롭히지 마라>(1972)나 다리오 아르젠토의 초기작 <수정 깃털의 새>(1970) 같은 작품들은 각본이 꽤 정상적이다. 70년대 지알로 장르에 엄청난 기여를 한 세르지오 마르티노의 각본들을 보면 종종 거칠고 천박하긴 해도 이 사람이 좋은 장르 작가라는 걸 부정하긴 어렵다.
이탈리아 호러는 이제 정말로 끝났는가
세계 영화계에 대한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기여는 비교적 클래식한 바바의 영화들이 풀치와 아르젠토의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후기작으로 전환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호러장인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상적인 완성도를 포기했다. 아르젠토는 피투성이 카타르시스와 끝내주는 미장센을 위해서라면 스토리와 개연성 따위는 갖다버렸다. 풀치는… 풀치가 되었다. 이성은 권위를 잃었고 뭐든지 해도 좋았다. 어차피 아무리 막 나가도 사람들은 그걸 이탈리아영화 특유의 괴상한 매력이라고 이해해줄 터였다. 이탈리아 호러영화는 번뜩이는 찰나를 위해서라면 영화가 굳이 그렇게까지 그럴싸하거나 심지어 그리 좋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고 가뜩이나 피에 굶주렸던 80년대 영화광들은 이 교훈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렇게 막 나가기 시작하다보면 왔던 길로 돌아갈 수도,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없다는 거였다. 할리우드는 워낙 인맥과 시장이 광대해서 얼마든지 우회로를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호러는 이 막장의 카오스 안에서 타들어간 것 같아 보였고 미켈레 소아비 이후로는 우리가 익숙해진 이탈리아영화를 대표할 만한 장르의 장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문이 들려 찾아가면 실망스럽거나 ‘이 맛이 아니다’.
반응이 극단적으로 갈리긴 하지만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통을 읽을 수가 없고 이것이 전통의 시작이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호러영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그 결과물은 낯설기만 하다. 슬픈 일이지만 아마도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 호러가 정말로 끝났다는 선언일지도 모르겠다. 아르젠토가 싫어할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