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재활용
2019-06-05
글 : 김혜리
<기생충>

<기생충>의 기택(송강호)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에는 전망이 없다. 층고라는 단어를 쓰기도 무안하게 와이파이 신호를 잡으려고 핸드폰을 쳐들면 천장에 손이 스친다. 안간힘을 다해 최대한 벽 위쪽에 뚫린 네칸의 창은, 기택과 충숙 부부와 두 남매가 세계를 올려다보는 프레임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가족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보든 말든 코앞에서 방뇨를 하고 벌레 잡는 가스를 퍼붓는다. ‘온화한’ 성품의 기택은 그러나 전망 좋은 방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아내 충숙이 부업 급료를 놓고 다투는 동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표정으로 창가에서 햇볕을 쬐는 기택은 약한 야생동물처럼 보인다. 얼마 후 기택의 식구들은 박동익 사장(이선균)의 집에 취직한다. 높은 담과 정원수로 외부자의 시선을 멀찍이 걷어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뜰만 통유리로 내려다볼 수 있는 저택이다. 창과 벽, 층의 구분조차 촌스럽다는 듯 지워놓은 우아한 공간이지만, 이 집에서는 ‘선’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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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극장에서 듣는 마스터클래스다. 전작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로 누벨바그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이름을 알리는 한편 여러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탄 바르다는, 필모그래피 전체를 돌아보는 토크를 세계 각처에서 열었고, 과거 작품의 클립과 새로운 촬영분을 더해 마지막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만들었다. 사적인 삶과 통과해 온 역사, 감독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구축한 작품 세계를 프레젠테이션하는 이 작품을 일종의 ‘저자 후기’로 간주하고, 실질적 마지막 영화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고 기억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엄연히 바르다의 마지막 에세이고 2000년 이후 바르다는 문학에 비유하자면 주로 에세이스트였다. 사진가 출신 바르다는 출발부터 픽션에 다큐멘터리적으로 접근했고 현실과 재현을 즐겨 병치하는 연출자였지만, 특히 20세기를 뒤로하면서는 아예 16mm, 35mm 극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전편은 자전적 에세이 <아녜스의 해변>(2008)인데 바르다는 어느 날 80살이 다가오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고, 영화 안팎에서 자신이 체험한 시간을 종합하는 <아녜스의 해변>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년을 더 영화와 더불어 산 뒤 신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까지 아우르는 공식적인 은퇴작을 내놓았다. 감독 이름을 제목에 넣었지만 누벨바그의 최후 생존 거장의 회고답지 않게 두 영화 모두 본인보다 타인들과의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놀랄 만큼 멜랑콜리한 구석이 없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공개한 1년 전 바르다가 언급한 은퇴는 체력적 소모가 큰 영화 작업에 한정된 것이었고, 사진이나 설치미술 등 시각예술가로서 활동에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앞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전했듯 노장은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나 공동감독 JR에게 던진 “잘 보이지 않지만 내겐 여전히 자네가 보여”라는 말처럼, 그는 끝까지 누구보다 잘 보고, 본 바를 관객에게 잘 보여주는 기적 같은 아티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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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의 마스터클래스에는 난해한 개념이나 이론의 인용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극장을 메운 젊은 영화학도들에게 본인의 필름 메이킹을 ‘영감, 창조, 공유’의 3단계로 설명한다. 영감은 영화를 만들게 하는 동력이고, 창조는 방법과 구성-혼자 만들지 같이 만들지, 흑백으로 찍을지 컬러로 찍을지- 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바르다는 보통 필름 메이킹 이후의 일로 여겨지는 공유, 즉 상영과 전시를 영화 만들기를 완성하는 내적 절차에 포함시킨다. 영화는 애초에 타인과 함께 나누려고 만들어지며 공유를 통해 비로소 완결된다. 창작의 본론인 어떻게 찍고 편집했는지에 대한 바르다의 설명은, 유치원에 다녀와서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부모에게 들려주는 아이의 그것처럼 간단하고 쾌활하고 선명하다.

예컨대 <얀코 삼촌>(1967)에서는 미국에서 친척을 만난 흥분을 표현하고 싶어서 첫 만남의 몇초를 반복해서 찍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혈육에 대한 순수한 호의는, 하트 모양으로 오린 빨간 셀로판지 뒤에서 이루어지는 포옹으로 전했다. 환한 자연광을 포착한 인상주의 회화에서 왜 우수(憂愁)가 느껴질까 생각하다 구상한 <행복>(1965)은 덧없음에서 질문의 답을 찾는다.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사랑과 시간의 본성이 환희의 절정에서 우리를 위협한다. 바르다는 그것을 (<행복>에 삽입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한 줄기 불안과 연결시킨다. 그의 미적 판단은 천진하고 스스럼없다. 후기 인상파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해바라기가 <행복>의 입구에서 불타고, 페이드아웃 프레임에는 빨강과 파랑 같은 원색이 블랙아웃을 대신해 눈부신 심연을 만든다. 이번 영화를 위해 새로 촬영한 <방랑자>(1985)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바르다는 10대 소녀 모나를 연기했던 상드린 보네르를 초대했다. <방랑자>는 인물과 함께 걷는 영화로 13번의 트래킹숏이 등장한다. 서양인이 문장을 읽는 방향과 반대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매번 카메라가 이동하고 앞선 트래킹숏이 멈춘 사물과 비슷한 피사체로부터 다음 트래킹숏이 시작된다. 이 촬영방법을 소개하는 바르다는 보네르와 트랙터 위에 담요를 덮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스탭들이 레일 위로 그들을 밀어간다. 반세기 전의 영화와 현재의 현실이, 해석된 시간과 즉물적 시간이 아이들의 놀이처럼 교차한다.

남들이 버린 농작물과 식품을 주워 에너지원으로 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 무엇인지 묻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는, 당시 한동안 바르다를 잊었던 나를 후려친 영화였다. 기쁘게도 아녜스는 이 작품이 바르다에게도 중요했다고 이번 마스터클래스에서 들려준다. 비단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와 속편의 제재로서뿐만 아니라, 이후 바르다의 예술에서 재활용은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카르티에 재단이 주최한 개인전에서 바르다는 과거 영화의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집을 짓고 필름 보관 캔을 쌓아올려 아치를 세웠다. 규격에 맞지 않아 들판에 버려진 감자 가운데 독특한 형태의 감자를 골라, 서양 미술사에서 발견되는 세폭 제단화(triptych)를 연상시키는 오브제도 만들어 전시했다. 단, 이 미술품은 제단화와 달리 싹을 틔우고 곰팡이를 내고 썩어간다. 20세기부터 활동해온 많은 거장들은 디지털 촬영의 미학적 장단점에 대해 의견을 밝혀왔다. 카메라를 든 에세이스트로서 바르다의 입장은 간결하다. “작은 카메라는 내가 만나는 사회적 약자인 사람들의 경계심을 낮춰주었어요. 주워서 생활하는 사람들(gleaners)은 창피해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주웠고 내가 다가가도 동요하지 않았어요.” 이어진 바르다의 한마디를 듣고 나는 이것 또한 그에게 어울리는 묘비명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든)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배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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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2008년 최초로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을 재구성한 <배심원들>은 메주 밟듯 꼼꼼히 사법 절차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비약과 생략을 즐기지 않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초월적 요소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이름 모를 미화원(김선영)이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에서 생방송 현장을 배회하는 미지의 여인(버지니아 매드슨)이 떠오르는 캐릭터다. 얼핏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신중하고 합리적인 8번 배심원 남우(박형식)는 휴정 중 길을 잃었다가 미화원의 안내를 받는다. 그리고 우연이 겹쳐 피고인의 진실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건물 미로 같지? 그런데 미로도 다 길이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미화원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인간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어 대리인을 물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천칭 대신 대걸레를 든 정의의 여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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