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정보원에게 자신이 수사 중인 사건의 정보를 얻는 강력계 형사. 나쁜 놈을 잡기 위해, 더 나쁜 놈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는 남자. 한수의 선택은 이렇게 매번 위태롭고, 무모하며, 자기 파멸로 향하는 직진의 길이다. 보장된 ‘차기 과장’ 자리를 욕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범인 잡는 게 직업적 소명이어서 끝장을 보겠다고 매달리는 남자. 이성민은 그렇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거친 울분을 토할 만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된 형사 한수를 연기한다. 말 그대로 동정할 지점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 캐릭터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화 후반부 폭주 신에 이르러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이성민의 처절한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비스트>는 연기에 있어서,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베테랑 배우 이성민에게도 몸과 마음이 고갈되는, 난이도 최상의 연기였다.
-<베스트셀러>(2010), <방황하는 칼날>(2013)을 함께한 이정호 감독과의 작업이다.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가 원작인데.
=늘 같이하자는 이야기는 해왔는데, 감독님이 영화를 오랜만에 만드셨다. 원작이 있는 줄은 몰랐고, 이후에 감독님과 같이 한신만 봤다. 감독님이 ‘DVD 가져가실래요’ 하길래 됐다고 했다. 어차피 감독님이 그대로 안 갈 게 뻔한데 볼 필요가 없더라. (웃음)
-관객에게 이해의 지점을 안겨주는 휴머니티가 느껴지는 인물을 주로 맡아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사뭇 다른 선택이다. 평소와 정반대의 연기에 대한 갈증도 있었을 것 같다.
=감독님이 그걸 노리고 제안을 하신 건가. (웃음) 대개는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게 된다. 나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싶으면 들어와도 잘 안 한다.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거절한 작품도 있다. 나는 민태 역할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감독님이 처음부터 한수 역을 제안하셨고, 또 내게 한수가 어울린다고 하시니, 감독님이 책임져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웃음) 감독님이 본인이 원하는 게 있으면 워낙 나올 때까지 끌어내는 스타일이다.
-감정에 앞서서 내달리는 탓에 상사로부터 ‘사고 좀 그만 치자’는 말을 듣는 강력반 팀장 한수 역을 맡았다. 브레이크 없는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브레이크를 스스로 고장낸, 빠개버린 사람이 아닐까. 걷잡을 수 없이 달리는 인물이다.
-범인을 잡으려는 욕망이 너무 커서,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이 괴물이 되는지도 모르고 달린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딸을 잃은 아빠를 쫓는 형사 억관 역으로, 바닥까지 사람의 감정을 좇아간 건조한 풍경이었다면, 이번엔 그 바닥이 역류해 폭발한다.
=힘들더라. 이 역할을 처음 받고 갈등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더라.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촬영이었다. 연기하면서 역할에 빠져서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거나 그런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그 여파로 촬영이 끝나고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촬영하면서 ‘갈수록 태산이구나, 점입가경이다. 이렇게 쌓아가기만 하다가는 끝엔 터져버릴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감독님에게도 이렇게 가다가 어떻게 하실 거냐고, 많이 따져 물었다. (웃음)
-‘터진다, 폭발한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후반부로 갈수록 한수의 표정이, 이성민 배우 얼굴에서도, 한국영화에서도 처음 볼 정도로 센 표정으로 기록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칼날> 찍을 때, 아침에 (정)재영이가 눈에 핏줄이 터져서 왔더라. 아무리 배우라지만 어떻게 타이밍에 딱 맞춰 핏줄이 터질까. 눈을 찔렀나 하면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나도 그 경험을 한 거다. 마지막 엔딩 신 찍는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에 핏줄이 터져 있더라. 눈 핏줄은 의지대로 터지는 게 아닌데, 제때 터져준 거지. 아싸! 했다. 감독님한테 가서 ‘나 터졌어’ 하면서 눈을 보여줬더니, 분장인 줄 알고 잘했다고 하더라. (웃음)
-이렇게 감정 소모가 큰 작품을 하면서도, 쉼 없이 연달아 작품을 하고 있다.
=내가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 특별출연도 많이 하고 그래서 더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아깝지도 않고, 날 필요로 하면 하자, 직업이 배우인데 아껴서 뭐 하나 싶다. 우리에겐 이 현장이 노동현장이고, 늘 그렇게 임한다. <미스터 주>를 <비스트> 전에 찍어서 지금 후반작업 중이고, <비스트>와 <남산의 부장들> 촬영이 갑자기 빨리 들어간 편이라 좀 겹쳤다. 지금은 <제8일의 밤> 촬영에 들어갔다. 장르도 이야기도 달라서 이미지가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 독특하고 재밌고 엄청난 것들을 보여줄 것 같아서 나 역시 기대가 크다. 이번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때도, 한국영화 위상이 올라간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좋은 자극이 됐다. 멋있고 존경스럽고 부럽고 질투도 나고. (웃음) 그래서 (송)강호 형한테 입국하는 날 바로 축하 문자도 드렸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