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의 방파제가, <기생충>의 인터폰이라도 되고 싶어요.’ 그렇게라도 상대를 향해 좀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애정 표현. 이 ‘웃기지도 않은’ 고백의 도착지는 요즘 ‘대세 배우’ 이정은이다. 1991년 연극 <한 여름밤의 꿈>으로 데뷔, 연기 경력 30년차 배우 이정은에게 2019년은 특별한 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의 엄마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조연상을 수상했고, <기생충>으로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그렇게 연달아 레드카펫 밟을 일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그건 이정은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 특별한 배우가 안착한 해라는 말이 더 맞지 싶다.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이 보여준 믿음직스러움은 작품 속 애기씨(김태리)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같은 강도로 전달됐다. <미성년>의 대원(김윤석)을 겁주던 취객,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엄마의 먹먹한 감정, 어느 하나도 닮아 있지 않고, 각자의 이유로 존재한다. 이정은에게 개성 있는 연기로 ‘신을 훔친다’는 ‘신스틸러’라는 표현을 쓰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어떤 서사 안에서든 그는 갑작스러운 등장일 때조차 연속성을 부여해 장르 안의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을 실어주며, 그것이 때에 따라 웃음으로, 감동으로, 일상으로 다가와 우리를 한껏 흔들어놓는다. 이 배우의 탄탄하고 독보적인 연기 구력으로 보자면 또래 남성배우들이 획득한 기회에 견주어 뒤늦은 조명에 욱하는 마음도 든다. 그나마 감식안을 가진 감독들은 이미 이 배우를 작은 역으로라도 지나치지 않아왔고, 이제는 그렇게 쌓여온 것들이 막 수면 위로 올라오는 시기라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기생충>에서 비밀에 부쳐진 지하실 문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세상 가장 기괴한 포즈와 방식으로 밀어젖히고, 이야기의 국면전환을 가져다준 가정부 문광. <마더>(2009), <옥자>(2017)에 이은 봉준호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이자 배우 송강호와는 <변호인>(2013)에서 인권변호사(송강호)가 찾아간 옛집에서 반쯤 문을 열고 나온 짝짝이 눈썹의 아줌마 이후 또 한번의 만남이다. 가만 보면 하하하하하하하, 먼저 호탕하게 한번 웃어젖히고 겸손하게 할 말을 이어나가는 화법이, 일정한 톤을 이어나가다가 한번 삐끗 궤도를 이탈하는 음색이, 웃음 안에 때로는 휴머니티가, 또 때로는 씁쓸한 비애가, 그리고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공존하는 것이, 많은 지점이 배우 송강호와 사이좋게 닮아 보인다. 그런 짐작으로 미루어볼 때, 봉준호 감독에게 이정은은 낯선 카드가 아닌, 그의 세계 속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었을까. 문광이라는 독보적 캐릭터가 열어젖힌 문, 배우 이정은의 가능성이 앞으로 얼마나 우리에게 전달되고 한국영화의 변화에 역할을 담당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항상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연기를 해온 배우였으니.
-72회 칸국제영화제 초청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정신없이 내달려왔다.
=포털사이트 오늘의 운세를 꼬박꼬박 보는데 올 6월 운세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세요. 빠른 건 없습니다’더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다음 작업에 임하라는, 그런 말을 딱 해주더라. 이 모든 영광이 기분좋고 감사하지만, 이 호사를 내려놓고 다음 작품으로 잘 가야 하는데 그동안은 마음이 좀 부산했다.
-문광이 <기생충>의 지하실 문을 연 데 이어 최근엔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SNS의 문을 열었다.
=<기생충>과 같은 시기에 상영 중인 출연작 <우리 지금 만나>가 워낙 작은 영화라 알려지지 않았는데, 함께한 부지영 감독님이 SNS 홍보가 영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시면서 당장 만들라 하셨다. (웃음) 게시글 업로드도 할 줄 몰랐는데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요즘 많이 홍보하고 있다. 감독님도 만드신 지 얼마 안 되면서, ‘인스타그램 처음 하는 우리 정은씨’라며 나를 소개하는 걸 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리스펙, 전율, 찬양 등등 ‘이정은교’의 신도를 자처하는 이들의 뜨거운 멘트가 SNS에 수두룩하다. 이정은이란 이름에 확실히 복이 붙은 것 같다. (웃음)
=실시간으로 뜨니까 지인들이 ‘드디어 네가 실검 1위까지?’ 하다가, 자세히 보니 골프선수 이정은이더라 하는 거지.(웃음) 다 우주의 복이 이정은이란 이름에 있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이)선균이가 우주의 기운이 나한테만 퍼지고 있다고 하더라. 선균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 들어갔을 때부터 같은 교수님 지도로 공부했고, 자주 보던 사이다. 그때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가 잘되니까 같이 좋아해주더라.
-평범한 이름인데, 그러고 보면 배우 활동하면서 좀 ‘센’ 이름의 유혹도 있었을 텐데.
=예전에 한번 이름을 바꿔볼까 했었다. 뮤지컬 <빨래>가 잘되면서 극중 이름이었던 ‘이기조’(명랑씨어터 수박 제작의 창작 뮤지컬. 2005년 초연한 작품으로, 달동네 소시민을 그린 이 작품에서 이정은은 반지하에 사는 주인공의 집주인인 욕쟁이 할매로 나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편집자)를 써볼까 했다. 근데 이름이 세서 오히려 규정된다고 할까. 평범한 게 좋겠다 싶었다. 원래 아명이 지연인데, 아버지가 밖에 나가면 뜻이 세워져야 한다고 해서 작명소에서 ‘정은’이란 이름을 받아 오셨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우리 세대에선 꽤 세련된 이름이었다. 좋은 작품, 좋은 감독, 좋은 스탭을 만나니까 이렇게 이름도 알려지게 됐다.
-이정은을 향한 지금의 열기를 체감하나.
=영화관을 가면 확실히 반응이 좀 오더라. (웃음) 며칠 전에 다큐멘터리 <김군>을 보러 갔는데 옆에 앉은 관객이 어어어, 하고 놀라시더라. 원래는 안 그랬다. 영화관에 오신 분들이 날 알아보는 걸 보니 <기생충>을 많이들 보셨구나 싶었다. 더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우리 지금 만나>를 함께한 부지영 감독님이, 야외 촬영 현장 통제가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했더니 이정은 배우가 ‘나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 그냥 편하게 찍’으라고 해서 정말 편하게 찍으셨다고. (웃음)
=그전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웃음) 보통 드라마를 찍으면 반응이 물오르듯 올랐다가 3개월쯤 지나면 완전히 사그라든다. 그 정도의 관심이 배우 입장에서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어느 기사에 ‘흔하고 평범한 얼굴로 40대 여성노동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쓴 걸 봤다. 나를 그렇게 흔하고 순하게 생겼다고 보시는구나 했다. 난 완전히 ‘귀요미’ 라고 생각했는데. 귀욤 귀욤. (웃음)
-맡은 역할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릴 적 사진도 궁금하다.
=어릴 때는 정말 아버지가 물고 빨고 하셨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 근데 말을 잘 안 들었다. 고집이 세서. 그래서 반대하는 연기도 그렇게 죽어라 한 것 같고.
-반대에도 전공을 연기로 하고, 또 한국영화계로서는 고맙게도, 이 자리까지 왔다.
=옛날 어른들은 딸은 선생하고 그러면 안정적이고, 시집도 잘 가고 그런 생각들을 하시지 않나. 배우로 자리를 잘 못 잡으니 걱정도 되셨던 것 같고. 한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연기를 가르쳤는데, 그때 눌러앉으라고 많이 하셨다. ‘그게 바로 네가 가야 할 길이다. 너는 얼굴도 변변치 않으니.’ (웃음) 지금이야 평범한 마스크가 다양한 역할을 맡기에 좋다고 하지만 어른들 기준으로는 배우 같지 않은 거지. 엄마는 지금도 내가 배우하는 걸 신기해하신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시면서는, ‘한지민 정도는 돼야 배우를 하는 거지. 너만 나오면 약간 화면이 흐리멍덩하고 그러지 않니’ 하시더라. 엄마가 안티다, 안티.(웃음)
-<기생충> 이후에는 확실히 인정을 좀 받았겠다.
=부모님이 영화를 굉장히 재밌게 보셨고, 레드카펫 사진은 맘에 들어 하셨다, 정말. 늘 ‘사람들도 많이 보는데 꾸미고 다녀라, 이쁘게 하고 다녀라’ 하고 잔소리를 하시는데. 이번에 칸에서 보라색 옷 잘 입었다고, 이뻤다고 하시더라. 복지관에서 난리났다 하시며 좋아하셨다.
-다른 배우들은 블랙 앤드 화이트로 통일했는데, 혼자 보라색 의상이라 확실히 눈에 띄더라. 반전 캐릭터를 의도한 ‘다 계획이 있는’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빼고 서로 공유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왕따 당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웃음) 원래는 백상예술대상 때 입은 파란 스머프 의상을 입으려고 했는데, 칸 드레스코드에 안 맞아서 급하게 포기했다. 그러면서 보라돌이가 됐다.
-지난번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때 휴대폰 덮는 위풍당당한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은 건 알테고, 칸에서 포토콜까지 돌아보면 자연스러운 매너가 돋보인다. 이런 초청이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포스. 그래서 영화제 초청과 레드카펫에선 모습을 앞으로 더 자주 보고 싶다.
=<기생충> 배우들은 모여 있을 때 서로 기생하면서 의지가 돼서 같이 있으면 그렇게 좋아 보인다. (웃음) 전주에서 같이 합숙하면서 찍는 동안 서로 격려하던 분위기가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다. 다들 개인으로 보면 개성이 강한데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가 사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현장에 같이 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도 하고.
-<마더> 장례식장 장면에서 피해자의 친척, <옥자>의 옥자 목소리(지하상가에서 휠체어 타고 소리 지르는 여성으로 잠깐 출연한다.-편집자)에 이어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해왔다. 이번엔 ‘전격 캐스팅’이다. 뮤지컬 <빨래> 공연 때 보고 탄복한 후, 언젠가는 이 배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있을 거다 하고 작정한 게 아닐까.
=그럼 이제 안 쓰시지 않을까. 난 또 그건 싫은데. (웃음) 언젠가 봉 감독님이 그러셨다. 기택 가족과 박 사장 가족을 잇는 게 풀리지 않을 때, 이 새로운 가족(문광, 근세 부부)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다 풀린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내 역할의 중요도 보다는 이런 구조 속에서 의미를 더하는 거라 내 연기가 특별하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즐겁고 재밌게 연기했는데 이렇게 효과가 크니 감독님의 재능에 탄복하고 있다.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했어도 놀라운 결과가 있었을 거다.
-지하실 문을 열 때, 그 비주얼의 기괴함은 가히 독보적이다. 그래서 문광이란 이름이 ‘문을 여는 광인’이 아닐까 추측도 해본다. 문광은 영화의 수직적인 계급 세계를 여는 첫 번째 신을 담당하고 있고, 그 처음이 지하실 문을 미는 그 장면이다.
=<옥자> 시사회 때 tvN <오 나의 귀신님> 유제원 PD님과 뒤풀이를 갔는데, 내가 화장실 간 참에 봉 감독님이 유 감독님이 내 매니저인 줄 알고 내년에 시간을 좀 비워달라 하셨다더라. 농담하시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왜 스케줄을 안 비워뒀냐’ 하시더라. 그때 한장짜리 콘티를 받았는데, 그게 ‘문을 여는 그 장면’이었다. 그림이 정말 웃기더라. 얼굴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놓고 ‘되게 중요한 신입니다’ 하는데, 나는 전체 이야기를 모를 때니까 옥자가 탈출하는 것 같은 그런 로드무비인가, 액션 신이면 나도 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과연 나올 수 있는 인간의 몸인가. 와이어액션 신인가. 도대체 어떻게 준비를 하라는 건지, 나의 액션의 능력치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내가 MBC 드라마 <도둑놈 도둑님>을 마쳤을 땐데, 혹시 거기서 무술하는 걸 보고 연락하셨나.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기존의 코믹한 면모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정은이라는 배우를 해석하고, 롤을 준다.
=나도 걱정이 됐다. 이미지가 강한 배우들도 떠오르고, 그런 느낌이 나야 할 것 같은데, 난 푸근한 역할을 많이 해왔고, 인상도 별로 안 센데. 너무 꼬마애 장난하는 거 같지 않을까. 그런데 봉 감독님이 ‘이건 갈 수 있어요’ 하고 안심을 시켜주셨다. 완성된 걸 보니 음향, 편집 시퀀스, 흉물스러움을 보여주는 이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던 것 같다.
-비주얼을 넘어서 사운드의 독특함을 말하고 싶다. 인터폰 장면에서 극대화되는데, 일정 톤이 유지되다가 삐끗하며 궤도를 벗어나는 특유의 톤이 발생한다. 봉 감독님 영화를 ‘삑사리의 미학’이라고 지칭할 때, 그 톤을 송강호 배우에 이어 구현하는 배우지 싶다.
=내 별명이 ‘서든리’(suddenly)와 ‘우랄’이다. ‘우라를 잘 내는 이 여사’(옷 안감이 우는 것 같다는 의미로)해서 ‘우랄’인데. (웃음) <마더> 때부터 자꾸 옆에 오셔서는 ‘삑사리. 우라!’ 하셨다. 내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 그런 과는 아니지 않나. 뭔가 자갈에 모래가 부딪히고 서걱거리는 느낌도 좋고, 그냥 일반적인 느낌도 좋고, 소리가 약간 우락 하는 것도 좋고, <빨래> 때 공연을 보시고는 그것도 다 좋다고 하시고. 그래서 봉 감독님은 되게 특이한 목소리를 좋아하시는구나 싶었다. 변희봉 선생님의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도 좋아하시고. 소리에 정말 민감하신 분이다. 소리가 발생할 때 나는 이상한 효과를 즐기신다.
-워낙 전라도, 경상도 팔도 사투리 구현부터, 대사 연습량이 상당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삐끗 하는 사운드는 연습과는 별개의 ‘내추럴 본’ 아닌가.
=술 먹은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컨트롤하기가 힘들다. 그걸 좀 이용해야겠다 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습성을 드러낸 거다. 친구들은 내가 술 마시면 딱 그렇다고, ‘와 네가 거기다 그거 쓸 줄 몰랐다’ 하더라. 다들 괴이하다고 하는 그 지점이 친구들이 보기엔 웃긴 거지. (웃음) 리딩할 때 그렇게 읽었더니, 봉 감독님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작은 역할로 시선을 사로잡는 캐릭터로 투입됐을 때, 자칫 과잉의 연기를 선보일 우려도 있는데. 그런데 이정은의 연기는 다르다. 그 캐릭터의 등장 전후, 화면에 없을 때를 그려보게 되는 연기를 선보인다.
=가령 <미성년>의 ‘낮술에 취한 주민’ 역은 나도 본 적은 있지만, 글로 쓰여진 걸 보면 어떻게 연기할지 되게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일단 술을 먹고 걸어가다 보면 그 남자가 우리 동네에 와 있고, 저기다 차는 세워놨고, 가서 한마디 물어보는데 술이 취한 상태니 이 사람이 나를 거시기하게 보는 것 같고 기분이 좀 나빠지는 것 같고, 그럼 딴지를 걸어야지. 계속 그렇게 상황에 맞게 반응하고 들어가다 보면 연기의 길이 보인다. 튀게 하는 것이 연기는 아니다. 이야기를 연결하는 힘을 가지는 배우가 돼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후배들에게도 누구보다 더 잘되려고 경쟁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마당을 쓰는 역할이면 마당을 쓰는 거에 충실해라 그런다.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인다. 나 역시 매번 역할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 점을 계속 생각했다.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때 금촌댁(양복 기술자)을 연기하면서 ‘난 재봉틀이 돼야지’ 하는 심정으로 했다. 사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신들도 많았다. 분위기는 너무 좋은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대사는 몇 마디뿐이고, 그 안에서 인물을 만드는 게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이 내게 토양이 되는 거다. 내가 배우들과 좋아하는 법을 배우고, 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우고, 또 우리가 함께 어떤 작품을 만드는 데 힘을 쏟는 방법도 배우고.
-<미성년>에서 대원을 위협하는 연기를 보면서, 이정은 배우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기생충>에서 문광이 극에 가져다준 공포감도 마찬가지고. 국면전환이자 등장과 함께 새로운 또 하나의 장르로 변주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독특하고 센 역할을 맡아서 걱정이 되지 않냐’는 말을 들었다. 정말 큰 일이다. 무시무시한 거는 이제 끝났는데. 고민이 많다. 어쨌든 맡은 롤을 벗어날 수 있는 배우는 없다. 그런데 나한테 흥미로운 역할들이 들어왔고 그걸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짜 올해는 너무 좋은 해고 그것 만으로 계속 유지될 수 없겠다는 긴장감도 든다. 작품을 하다보면 관객이 내가 서빙고 보살(<오 나의 귀신님>)를 한 건 기억하지만 드라마 <리멤버: 아들의 전쟁>에서 ‘유승호의 사무장’을 맡은 것은 기억하는 분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시기에 지치지 않으면 또 기회가 오고, 그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또 단련된다는 생각이 든다.
-<마더> 때 오디션을 보라고 추천해준 <기생충>의 최세연 의상감독과는 워낙 친분이 깊은데, 그가 ‘이정은이라는 사람은 거절을 못하고, 한번 던진 말로 다음 작품 같이하자고 하면 곧이곧대로 다 해서, 지금의 다작을 낳았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하더라.
=하하하하하. 아니 그런데 어떨 때는 나도 사람인지라 몸이 너무 피곤하면 안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연출하는 분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작품 개발에 온전히 매달려 긴 시간을 보내지 않나. 배우는 스케줄을 조절하면 작품을 걸쳐서도 할 수 있다. 다만 그 작품 하나하나에 온전히 에너지를 써야겠지.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한다. 물론 전제가 있다. 내가 그 작품을 조금이라도 좋아해야 한다는 것. 도왔다는 말은 맞지 않고, 작업자들과 이야기하고 만드는 과정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 지금 만나> 중 <여보세요>에서 우연히 북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받고 북한 여성과 소통하는 ‘정은’ 역으로 드라마를 이끌어간다. 익히 본 개성 있는 캐릭터에서 나아가 역할의 전체를 관통하는 연기로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첫 주연작이기도 하고. (웃음)
=내가 젊게 나와서 좀 놀라지 않았나. (웃음)
-‘할머니’, ‘아주머니’가 아니고 결혼 안 해 엄마한테 핀잔도 듣는 미혼 여성 연기다. 제 나이를 찾은 연기를 처음 봤다고 할까. 직접 강조한 ‘귀여움’도 보이고. 장르영화 안에서 이름을 갖지 않은 배우가, 타입화되어 사용되는 것과 달리 캐릭터를 넘어서 이정은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까지 연장되는 기회를 준 작품이다.
=이런 기회가 많이 오지 않는다. 부지영 감독님과 <카트>(2014)를 함께했는데, 작품을 떠나서도 친분을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에 얻은 행운 같다. 지금까지 보여온 역할 말고 다른 걸 시도해보자는 이야기를 자주 해왔었다. 예산이 작아 작업환경이 그닥 좋지 않았는데도 모두 정말 열심히 했다. 신뢰라는 게 정말 무서운 게, 이 사람이 나의 정면을 보게 하는 역할을 주고 싶어 하는구나, 라는 게 느껴지고 그게 마음을 움직이니 테이크를 여러 번 가도 이겨낼 수 있고 즐겁더라.
-실향민 어머니를 둔 정은이, 북한 여성과의 통화로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잘 짜여진 드라마다. 실제 이름을 ‘정은’으로 쓰기도 했고, 배우의 아버지가 실향민이라는 점에서 오는 이해도도 높았을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이북 분이셔서 고정 레퍼토리가 원산 앞바다에서 피난 나올 때 이야기다. 어릴 때 기억이 너무 사무치시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정은이 엄마에게 듣는 이야기들도 나한테는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부 감독님이 이 역할을 주시는데 그런 배경도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떤 때는 무미건조한 느낌도 견디라고 하셨는데 감정이 북받쳐서 오히려 과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걸 덜어내고 덤덤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부터 최근 <강철비>(2017)에 이르기까지 남북 소재 영화에서 남남간의 케미스트리에 익숙했다면, 이렇게 남북 여성들이 소통한다는 지점도 흥미로웠다. 이정은이라는 배우가 굳건히 자리를 잡아 그런 인식 전환이 되는 역할을 자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진다.
=나 역시 원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부지영 감독님 같은 분들이 투자를 계속 받아서 이런 새롭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다.
-당장은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촬영으로 바빠질 텐데, 지금의 관심과 영광의 무게를 등에 업고 어떤 각오를 더하고 있나.
=<기생충> 개봉 전에 이미 내정된 작품들을 내년 상반기까지는 하게 될 것 같다. 역할이 어려워 고민한 적은 많지만, 단 한번도 연기 변신을 해야겠다는 부담을 가진 적은 없다. <타인은 지옥이다>도 마찬가지고 이후 작품들에도 그런 고민이 있다. 두려우면 지는 거니 어쨌든 계속해볼 거다. 지금은 좋은 반응들만 주셔서 감사한데, 때로는 연기가 비어 있다는 평가도 받겠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부단히 노력하고 있고, 관객과 시청자를 향해 끊임없이 좋은 이야기로 말을 걸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