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허진호 / 출연 유지태, 이영애, 박인환 / 제작연도 2001년
‘인생 영화’를 꼽으라니, 어려운 숙제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를 묻는 질문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결정 장애에 가까운 우유부단함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란 사람이 ‘최고’나 ‘최애’를 뽑아놓고 사는 성향은 아닌 것 같다. 외화 수입을- 그것도 다양성 영화들을 주로- 10년 이상 하고 있다보니 인생 영화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유럽 거장 감독들의 작품이 여러 편 떠올랐다. 그러다 나의 20대 감성을 뒤흔들었던 영화 한편에 마음이 멈췄다. 지금보다 훨씬 순수하고 뜨거웠던 그때, 사랑이 전부일 것 같았던, 나에게도 ‘청춘’이라 부를 수 있었던 그 시절을 함께했던 영화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다.
지금은 “넷플릭스 같이 볼래?”쯤으로 대체되었을까?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은수(이영애)의 도발적인 이 한마디는 당시 최고의 작업 멘트였고,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듯 내뱉는 상우(유지태)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가슴을 움켜쥐고 소주를 따르게 했던 명대사로 남았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대한 생채기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봄날’을 떠나보내는 아픔과 치유의 과정을 한번쯤 겪어봤을 우리는 마치 각자의 경험담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진 것 같은 이 영화를 보며 절절히 공감했다. 언제 왔다 또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스쳐 지나는 ‘봄날’ 같은 사랑에 대한 단상은 이영애와 유지태 두 배우를 통해 구체화된다. 술에 취해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한걸음에 달려가는 남자와 추운 날 새벽 맨발에 슬리퍼 신고 그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은 무모하지만 사랑스럽다. 합장한 누군가의 무덤을 바라보며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함께 묻힐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묵묵한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한 상우의 눈빛에서 우리는 사랑의 영원함을 다짐하는 남자의 진지함을 보았고, 그게 틀릴 줄 알면서도 내심 응원을 보냈는지 모른다. 라면 먹고 가라는 말에 정말 라면이나 먹고 갈 줄 아는 순진한 남자와 ‘나 김치 못 담가’ 하며 순수한 사랑에 대한 버거움을 매몰차게 잘라내는 여자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의 모습이다. 상우에게 그랬듯이 다른 남자에게 소화기 사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은수의 모습에 화가 치밀고,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마’라며 뜯어말리는 심정으로 은수의 차를 긁는 상우를 바라보던 우리는 어쩌면 묘한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우리가 한번쯤 저질러봤을 법한 무모한 사랑의 행위, 그리고 상처와 아픔의 순간을 잔인할 만큼 잘 포착하고 있다.
또 하나 영화에서 인상적인 설정 중 하나가 소리를 채취하는 상우의 직업이다. 눈 내리는 소리를 담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의 고요한 감정은 졸졸 흐르는 시내가 되었다가 어느새 거친 파도가 된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갈대숲에서 홀로 소리를 채집하며 미소 짓는 상우의 마지막 모습을 영화 속 명장면으로 꼽는다. 사랑의 상처를 견뎌 내고 이제 갓 어른으로 성장한 소년의 모습이 고요하면서도 힘 있는 갈대숲의 바람 소리와 절묘하게 닿아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O.S.T에 삽인된 김윤아의 동명 곡 <봄날은 간다>다. 언제 들어도 영화의 여운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 유현택 영화 수입·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 대표. <러스트 앤 본> <프란시스 하> <폭스캐처> <패터슨> <가버나움> <해피엔드> 등을 수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