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싸미>에서 박해일은 한글 창제 과정에서 세종을 전진하게 만드는 숨은 조력자 신미 스님을 연기한다.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실존 인물이자 이제까지 연기해본 적 없는 스님이라는 낯선 캐릭터를 받아든 박해일은 “스님이 기거했던 공간과 영화의 촬영장소”를 미리 돌아다니며 본인이 연기할 인물을 느끼려 했다. 그런 다음 절밥도 먹고 머리도 깎고 산스크리트어도 배우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이의 마음에 가닿아보려 했다. 단지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는다고 하루아침에 스님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박해일은 이 과정이 신미 스님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라고 표현했다.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 하나는, 박해일이 매 작품 최대치의 노력을 기울여 관객을 배신하지 않는 배우라는 것이다.
-조철현 감독이 캐스팅 얘기를 꺼냈을 때 흔쾌히 수락했던 것으로 안다.
=<나랏말싸미> 이전에 조철현 감독님이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그때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시간이 지나 <나랏말싸미> 시나리오를 전해주고 싶다 하여 다시 뵀는데, 지난번에 사양한 것이 죄송하기도 하고, 영화 내용과 캐릭터 이야기를 듣고 나선 ‘이게 뭐지?’ 궁금함이 생겼다. 수행하고 정진하는 스님 역할에 대한 호기심도 컸던 터라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했다.
-감독 입장에선 <괴물>(2006) 이후 다시 만나는 송강호와 박해일의 조합에 대한 기대도 컸을 것 같다.
=나 역시 송강호 선배가 연기하는 세종의 모습이 궁금했다. 광화문에 세워진 동상 같은 캐릭터, 업적만 보이는 캐릭터가 아니라 세종이라는 위인을 현실적인 인간으로 그려낼 수 있는 배우로 송강호 선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맡은 신미 스님은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어 등 문자에 능통한 인물이다. 일반 스님과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글 창제를 하려 했던 세종과 신미 스님이 신분과 종교의 차이를 떠나 협업하는 모습이 연기하면서도 재밌었다. 비유하면 한글 창제 과정에서 세종이 총감독이라면 신미는 편집자거나 디자이너랄까.
-큰스님(오현경)이 소헌왕후(전미선)에게 신미를 소개할 때 ‘꼴통’이라 한다.
=우선 오현경 선생님과 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 꼴통이란 단어도 이야기 초반에 인물을 설명하는 괜찮은 소스라 생각했다. 수련하고 비워내고 절제하는 스님이 꼴통이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신미는 문자에 능통한 부처님의 제자이고, 자신이 믿는 진리가 분명하다 보니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세종을 만났을 때도 꼿꼿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신미의 집요함과 고집스러움을 드러내는 표현이라 생각했다.
-촬영 전 템플스테이도 했다던데. 실제 절에서 촬영할 땐 스님들이 “스님보다 더 스님 같다”는 말도 했다고.
=오랜 시간 수행의 길을 걸어간 인물을 똑같이 따라할 순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느껴보고 싶어서 절에서 며칠 지냈다. 캐릭터를 위한 일이었지만 자연인 박해일에게도 도움이 많이 됐다. 템플스테이를 할 때 스님들처럼 옷을 갖춰입고 같이 식사를 하고 예불 드리다 보니 무의식중에 그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머리까지 삭발하고 났을 땐 책임의식도 커졌다. 이분들한테 누를 끼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메소드는 아니다. (웃음) 이번 캐릭터는 의식적으로 뭘 해야지가 아니라 ‘익숙해져야지’라는 감정으로 연기했던 것 같다. 그러한 감정과 태도를 영화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 놓았을 뿐이다.
-아침마다 절로 향하는 산길을 혼자서 묵묵히 걸었다고도 하던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춥긴 했으나 걸으면 땀도 나고 훈훈해지고. 생각해보면 옛 스님들이 산중 사찰까지 그렇게 걸어갔을 테니까. 그런 과정이 꽤 도움이 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기하는 건 왕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 않을까. (웃음)
-영화에서 산스크리트어도 구사한다.
=영화에서 늘 함께 다니는 학열, 학조 역의 임성재, 탕준상 배우와 함께 인도학과 산스크리트어 교수님을 찾아뵀다. 짧고 굵게 많은 것을 전수받았다. 너무 낯선 언어였지만 살면서 언제 이런 언어를 또 익혀보겠나. 영화 초반에 산스크리트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언어적 능력이 출중한 신미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 중요한 장면이어서 배울 수 있을 만큼 배워 할 수 있을 만큼 공들여 찍었다.
-송강호, 전미선 배우는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함께했던 사이다.
=전미선 선배까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짜릿했다. <살인의 추억> 이후 각자가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가는 모습을 여러 과정으로 지켜보았는데, 16년이나 시간이 흘러 또다시 한 작품에서 모인다는 게 흔한 경우도 아니고. 심지어 촬영 중에 봉준호 감독님이 현장에 오신 적 있다. 봉 감독님 또한 감회가 새롭다며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처럼 조철현 감독님한테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눈빛이라고나 할까, ‘옥자’가 눈물 흘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웃음) 그런 마음으로 현장을 지켜보시기도 했다.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랏말싸미> 촬영 끝내고는 어떻게 지냈나.
=이제 4개월 정도 지났는데, 더이상 머리를 안 잘라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머리 자라는 것을 보며 잘 지냈다.
● “<나랏말싸미> 커버 스타 인터뷰는 전미선 배우가 세상을 뜨기 전인 지난 6월 25일 미리 진행되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영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여준 세 배우에 대한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리고 전미선 배우와 나눴던 대화를 좀더 길게 거의 모두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