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요즘 홍콩영화②] 옴니버스영화 <10년>을 통해 살펴보는 ‘우산 혁명’ 이후의 홍콩
2019-07-24
글 : 윤영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홍콩영화 100년사> 번역자)
정치는 이렇게 영화와
<10년>

2015년 12월 17일, 당시로부터 10년 뒤인 2025년의 홍콩 사회를 그린 영화 한편이 주룽 야우마테이에 있는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개봉했다. <엑스트라> <겨울매미> <방언> <분신자살자> <현지계란> 등 5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10년>이다. 화려한 액션이나 컴퓨터그래픽(CG)도 없고 유명 배우도 나오지 않는, 제작비 50만홍콩달러(약 8천만원)의 저예산영화였지만, 처음에 단관 개봉으로 시작한 영화는 연이은 매진으로 상영관이 확대 상영되면서 600만홍콩달러(약 9억원)가 넘는 매표수입을 거두어 흥행에서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더불어 상업적인 상영 외에도 대학가나 지역 시민사회에서의 공동체 상영 등을 통해 상업적 흥행을 넘어선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산 혁명’ 이후의 홍콩

이 영화가 개봉된 2015년 12월은 홍콩 ‘우산 혁명’이 종결된 지 1년 되는 시점이었다. 2014년 9월부터 홍콩섬 센트럴 지역과 주롱의 몽콕·야우마테이 같은 홍콩 도심의 중심가를 휩쓸면서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던 우산 혁명은 그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사그라들었고,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장기간 시위로 인한 피로감 누적과 내부 노선 분열, 정부와 언론에 의해 시위대에 덧씌워진 폭도 패러다임 등으로 인해 결국 우산 혁명의 기치였던 2017 행정장관 선거의 진정한 직선제 요구는 성취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다. 우산 혁명에 참여하거나 지지한 사람들이 일년간 느꼈을 가장 큰 감정은 아마도 두개의 시스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채 하나의 국가의 원칙만 고수하며 정치적 간섭과 개입을 강화하는 중국 정부나 이를 충실히 대변하는 홍콩 정부에 대한 분노, 그리고 3개월간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치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정치적 좌절감과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현실운동의 가능성과 희망을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 급진파들의 과격 시위로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우산 혁명 기간 동안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도심 점령이라는 새로운 시위 형식과 함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길거리 토론, 길거리 강당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실험적인 시위 문화들이 등장했으며, 정치적으로 거의 무관심하던 홍콩 시민사회에 새로운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 <10년>은 2014년부터 2015년 사이 홍콩인들이 느꼈던 복잡한 정서와 새로운 정치적 각성을 옴니버스 형식의 실험적 단편영화들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인 곽진 감독의 <엑스트라>는 2020년 홍콩 정부가 ‘국가보안법’( 安法)의 입법에 유리하도록 사회적 혼란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조폭을 고용하여 친중 친정부 성향의 건제파(建制派) 정치인 권총 피습 사건을 조작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정치인을 저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를 두고 건제파 수뇌부들끼리 논쟁하는 장면은 정치적 이익과 목적을 위해 살인과 음모도 불사하는 권력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누가 나서서 저격할 것인지를 정함에 있어 조폭의 말단 조직원 두명이 서로 하겠다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살인을 해서라도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층민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홍콩 사회의 양극단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하나의 에피소드에 잘 담아내고 있다.

두 번째 작품인 황비붕 감독의 <겨울매미>는 2025년 정부의 강제적 재건축으로 철거된 친구 집의 물건을 역사 유물처럼 표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던 젊은 남녀 커플이 결국에는 자신들 몸조차 표본으로 만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치 행위예술을 하듯이 자신들의 몸까지도 표본 작업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2015년 당시 사회현실 속에서 홍콩의 청춘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막막함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듯하다. 세 번째 작품인 구문걸 감독의 <방언>은 2025년부터 중국어 표준어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표준어불가능 택시’라는 딱지를 붙여야 하고 도시의 주요 지역에서 승객을 태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광동어 밖에 못하는 택시기사 아한이 하루 동안 겪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영국 식민지 통치 시절에는 영어를 못해서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중국 대륙의 표준어를 하지 못해서 택시기사 노릇조차 하기 힘들어진 주인공의 삶은 표준어와 소통하기 힘든 광동어만 사용해오던 홍콩인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언어적 식민 상황과 암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작품인 주관위 감독의 <분신자살자>는 시위를 주동하다 감옥에 갇힌 한 대학생이 절식 끝에 사망하자, 한 사람이 그를 따라 영국 총영사관 앞에서 분신자살하는데, 이를 둘러싸고 각계 인사들이 홍콩 사회의 현실에 대해 논하며 분신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 대학생의 절식 사망과 한 노파의 분신자살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어 마치 두 처참한 죽음과 암울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밝혀지는 죽은 대학생과 하층민 노파 사이의 인연은 오히려 이들 사이의 연대와 희망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임을 알게 한다. 마지막으로 오가량 감독의 <현지계란>은 중국과의 경제 통합으로 2025년 무렵 홍콩 현지의 계란농장이 모두 사라지는데, 마지막으로 생산된 홍콩산 계란을 팔기 위해 식료품 가게 주인이 ‘현지’(本地)라는 푯말을 붙여두자 초등학생 검열단이 나타나 정부가 지정한 검열단어라 지적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현지계란’이라는 말에까지도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며 홍콩 정체성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을 연상시키는 초등학생 검열단이 돌아다니며 일일이 문제단어를 검열하고 문제서점에 날계란을 던지는 장면은, 현재에도 중국 정부에 의해 인터넷 상에서조차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상 검열 통제 정책이 홍콩에까지 적용될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두려움과 우려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서점이 검열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식료품 가게 아들이나 겉으로 운영하는 서점과 별도로 검열받는 책들만 모아서 따로 몰래 운영하는 서점의 모습은 중앙에 대해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홍콩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저예산영화 <10년>의 성공, 그 의의

홍콩 반환이 결정된 1984년 전후로 태어나서 1997년 홍콩 반환 무렵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홍콩영화의 쇠락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영화인의 꿈을 키워온 신진 영화감독 다섯명은, 2014년 우산 혁명과 그 이후 1년간의 침잠을 거치며 응축됐던 홍콩인들의 분노와 절망, 두려움과 암울함, 그리고 연대와 희망을 2025년의 미래에 대한 상상 속에 잘 담아내고 있다. 이로 인해 저예산영화 <10년>은 홍콩 시민사회의 커다란 반향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홍콩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아, 전세계적으로 약1억5600만달러(약 182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린 <엽문3> 같은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들을 제치고 2016년 홍콩 금상장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산 혁명 이후 5년간의 적막을 뚫고 최근 ‘도주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시위가 지난 6월 12일부터 현재까지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중국 송환이 언제든 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700만 홍콩 인구 가운데 200만명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개정 반대를 외쳤고, 그 덕분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법안 개정 철회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언론 보도와 현장 운동가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번 시위와 성과는 우산 혁명의 한계와 실수를 넘어 좀더 성숙한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홍콩 시민사회의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현재 홍콩 민주화 운동의 이면에 깔린 홍콩인들의 현실 인식과 다양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10년>만 한 영화는 찾기 힘들 것이다. 국내에서 개봉된 적 없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넷플릭스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 <10년>은 실제로 2025년이 되었을 때 홍콩의 모습이 영화 속 홍콩처럼 되지 않기 위한 홍콩 영화인과 시민들의 염원과 노력을 담고 있다. 이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2025년 미래의 홍콩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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