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종합촬영소는 지금 작별을 준비 중이다. 1997년 11월 5일 개관한 이래 지난 20여년간 한국영화의 주요한 산실로 기능한 남양주종합촬영소는 오는 10월 16일을 끝으로 모든 기능을 종료한다. 132만m2 부지에 최신 설비를 갖추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야심차게 준공한 이곳은 실내 스튜디오, 야외 세트, 녹음실, 대규모 소품실과 의상실 등을 보유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종합영상지원센터였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판문점 세트, <취화선>(2002)의 민속촌 등을 직접 둘러볼 수 있는 관람·체험 시설을 통해 2017년까지 약 380만명 관람객에게 추억을 선사한 곳이기도 하다. 폐관을 앞두고 조금 쓸쓸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남양주종합촬영소를 찾아 지난날의 기억들을 돌아봤다. 지난해부터 순차적으로 철거를 진행 중이지만 아직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씨네21>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화려했던 한국영화 제작의 근거지, 왜 사라지나?
남양주종합촬영소의 폐관은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의한 영진위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에 따른 것이다. 2013년 영진위가 부산으로 이전한 후 입찰을 추진한 끝에 남양주종합촬영소는 2016년 부영그룹에 부지와 시설이 매각됐다. 영진위 부산 시대가 선포된 것은 해묵은 일이지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에 위치한 촬영소가 부산으로 가는 준비는 줄곧 더뎠다. 남양주종합촬영소를 관리하는 영진위 소속 장광수 소장은 “부산 이전 상황은 아직 부지 확정도 나지 않은 상태다. 기장군 일대라고 발표는 했는데 현재 양해각서만 체결한 상태고 연말 즈음 부지가 확실히 결정날 것 같다. 촬영소 개관까지 최소 3~4년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랫동안 남양주를 지킨 이들은 폐관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장 소장은 남양주종합촬영소에 대해 “개관 준비부터 인연을 맺어 내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며 “이전 결정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위치나 관리 면에서 접근이 어렵고 많이 낡은 것은 사실이다. 큰 부지에 시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효율적인 관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의상, 소품 등의 프로덕션 업체는 현재 퇴거를 앞두고 물건을 정리 중이고 녹음이나 편집 등의 후반작업 업체들은 이미 파주, 상암동 등으로 흩어졌다.
1998년 8월부터 운영한 일반인 및 단체 관람 기능은 지난해 한달간 무료 개방 기간을 거친 뒤 5월 31일자로 중단했다. 휴게시설 및 객실을 갖춘 촬영소 내 숙박시설 춘사관은 2002년 문을 열어 올해 7월 2일자로 운영을 종료한 상태다. <씨네21>이 찾은 8월 말에는 소품실과 의상실, 실내 스튜디오와 야외 세트장만 운영 중이었다. 최근 스튜디오 이용 리스트에는 <극한직업>의 제작사 어바웃필름이 만드는 코미디영화 <차인표>, 이경미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윤제균 감독의 신작 뮤지컬 <영웅>(세트 미술작업) 등이 있었다. 제6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차인표>의 밤 신 촬영을 위해 조명 설치가 한창이었다. 10월 16일 종료 전에 마지막으로 촬영소를 거쳐가는 작품은 윤제균 감독의 <영웅>과 더불어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다.
남양주종합촬영소
1990년부터 한국 영화산업의 기술 수준에 대한 문제의식이 꾸준히 공유됐고 한국형 할리우드를 만들자는 취지로 촬영과 후반작업까지 전천후로 가능한 촬영소 건립이 계획됐다. 지금의 남양주종합촬영소는 6년간 약 650억원의 공사비를 들인 결과물이다. 국내 최초의 블록버스트 <쉬리>(1998)를 비롯해 <여고괴담>(1998),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등이 초기 입지를 다지게 만든 작품들. 2000년대 초반까지 영상문화관, 영상원리체험관, 영상교육관, 영상 미니어처 체험 전시관, 폴리 체험 녹음실 등이 차례로 개관했다. 또 서울, 경기권에 자리한 다수의 영화·영상학과 학생들이 실습 용도로도 활용했다.
판문점 세트
판문점 세트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을 위해 제작사인 명필름과 영진위가 2000년에 제작했다. 제작비만 9억원을 들여 판문점, 판문각, 팔각정, 회담장을 실물 크기의 85%로 재현해 압도감을 준다. 관람객 유치에 입소문 효과를 톡톡히 낸 오픈 세트다. 2018년 5월 31일부로 일반인 대상 관람체험시설 운영을 종료했음에도 판문점 세트만큼은 20인 이상 단체 관람에 한해 개방하기도 했다. 판문점 세트를 비롯해 전체 야외 세트의 크기는 약 10만m2다.
한옥 운당
촬영소 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한옥 세트.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조선 후기 양반 가옥을 그대로 옮겼고 현재까지 보존 상태도 깨끗하다. 인간문화재 23호 박귀희 명창이 운영한 한옥여관 운당은 특히 1950~70년대 문화예술인들의 산실로 사랑받았다. 본채, 안채, 사랑채, 별당까지 조선 사대부 가옥 형태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와 <왕의 남자>(2005)에 그 모습이 아름답게 담겼다.
민속촌 세트
2002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을 위해 만들어진 민속촌 세트.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위해 19세기 말 서울 종로 거리와 기와집, 초가집 등 주거 건물들을 재현했다. 한때는 주말에 아트마켓 취화장터, 장승업 따라하기 이벤트, 한지 미술품과 전통 공예 체험 등을 운영하면서 가족 단위 방문객을 불러들였다. 전국 골동품상에서 수집한 가옥들의 디테일이 남다르다.
실내 스튜디오
남양주종합촬영소가 보유하고 있는 6개의 실내촬영 스튜디오. 장광수 소장은 특히 2, 3번 스튜디오에 애정이 많다. “2, 3번 스튜디오 설비를 직접 완성했다. 입사 초기에 월급을 150만원 받았는데 설비 때문에 이동하느라고 기름값만 70만원이 나왔다.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으로 완성한 것은 물론, 스튜디오는 원래 운영이 굉장히 중요한데 지금까지 잘 관리해서 요즘 스튜디오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한적한 주변, 안정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여건 덕에 남양주 스튜디오 촬영을 편안하게 느끼는 감독들이 많다.”
소품실
많은 관람시설 중에서도 영상지원관의 소품실은 일반 관람객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던 장소다. 영화나 TV에서 실제 사용된 소품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이병헌이 앉았던 용상은 소품실을 운영하는 김호길 서울영화장식센터 대표가 공들여 제작한 것이다. 영화 이후 인기를 끌어 CF 촬영 등에 의자를 한번 대여하는 값이 100만원으로 치솟았다. 최근에는 이해준, 김병서 감독의 재난영화 <백두산>이 재해현장 표현을 위해 낡고 오래된 물건들 위주로 잔뜩 챙겨갔다. 그 밖에 최근 소품실을 이용한 영화는 <파이프라인> <서복>, 드라마 <구해줘2> <타인은 지옥이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