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결정하다. 여성감독들의 시각’(Self-determined. Perspecti ves of woman filmmakers).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 회고전이 내건 슬로건이다. 이 회고전에서는 동독, 서독, 통일 독일 시기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독일 여성감독들의 작품들이 소개돼 화제였다. 베를린영화제 회고전 부문에서 독일 여성감독들의 장편영화가 이처럼 집중 조명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큐레이션이 가능했던 건 프로그램을 기획한 라이너 로터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독일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영화학도들의 작품을 보관하는 도이체 키네마테크 수장인 그는, 독립영화 부문에서 특유의 개성을 선보여왔던 여성감독들에 일찌감치 주목하고 있었다. 또 독일영화사박물관에서 15여년간 근무해온 그의 경력은 보다 긴 호흡으로 여성감독들의 연대기를 정리할 수 있게 했다. 한국영상자료원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의 공동 큐레이션을 맡아 독일 여성감독의 영화 12편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독일여성영화감독전’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회고전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독일 여성감독들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베를린영화제 회고전을 기획하는 도이체 키네마테크의 전통에 기반한 큐레이션이었다. 우리 기관은 수십년째 독일 독립영화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감독들의 작품을 종종 소개해왔다. 여성감독들의 작품은 독립영화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키네마테크는 독일 영화학도들의 작품을 보관하는 아카이브 역할을 하고 있는데, 굉장히 많은 여학생들의 영화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여성감독에 주목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여성감독들의 작품은 왜 독립영화인 경우가 많나.
=동독과 서독의 사례가 다르다. 동독은 여성감독들이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활동했다. 시스템 안에서는 많은 것들이 체제의 감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여성으로서의 특색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발전해왔다. 한편 서독에서는 ‘아우토렌 필름’이라고 해서,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여성감독들의 영화 만들기 방식이 독일 독립영화의 작업 과정과 유사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한 12편은 어떤 기준으로 엄선했나.
=두 가지 기준이 있었다. 먼저 영화의 디지털 복원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선정하려 했다. 또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인 분단 시절의 작품에 좀더 힘을 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이 당시가 독일 여성감독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한, 가장 흥미로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 통일 독일 시기 여성감독들의 스타일이 각기 다른 점도 흥미롭다.
=맞다. 동시에 이번 기획전에서 선정한 여성감독들의 영화는 특정 시기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기보다 그 자체로 독특한 특성을 가진 작품들이 많다. <나의 피부 아래>나 <겨울에의 작별> 같은 영화를 보면 굉장히 긴 시간을 다루며 영화의 개성이 생겨난 경우다. 지빌레 쇠네만 감독의 <잠금된 시간>은 감독 개인의 경험 자체가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의 독특함도 생겨난 사례다.
-작품 수집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을 법한데.
=7년 전 동독영화주식회사(DEFA)가 보관하고 있던 영화들을 도이체 키네마테크가 넘겨받아 관리하게 됐다. 이전까지 키네마테크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은 서독 지역의 작품들이 주요했는데, DEFA 작품을 키네마테크가 관리하면서 동독, 서독 영화의 균형 있는 큐레이션이 가능해졌다. 워낙 관객에게 생소한 작품이 많고,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아 매력적인 작품을 발견했음에도 상영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최대한 빨리 디지털화해서 복원 작업에 들어갔으면 한다. 이번 상영작 중에서는 <나는 하와이를 자주 생각한다>가 디지털 복원을 통해 극장에 걸 수 있었고, <포석 아래 해변>과 <다시는 잠들지 않으리> 또한 디지털로 복원 작업 중인 영화다.
-2006년부터 도이체 키네마테크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데, 어떤 프로그래밍을 지향하나.
=키네마테크가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2006년 이전 키네마테크는 베를린영화박물관, 즉 베를린이라는 작은 지역에 국한된 기관이었는데 2006년 이후에는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영화 기관으로 성장했다. 또 내가 합류하며 변한 점이 있다면 지금의 키네마테크는 TV와 연계된 작업을 더 많이 소개하려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키네마테크는 박물관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것을 보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 당장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변화, 시설적 변화를 시의적절하게 반영하는 키네마테크가 되었으면 한다.
-베를린영화제 클래식 부문에서 임권택 감독의 <짝코>(1983)가 상영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 또 키네마테크 이전에 독일영화사박물관에서 일했는데, 1년에 한번 독일영화를 제외한 전세계 각국의 영화를 소개하는 기획을 만들었을 때 처음으로 선정한 작품이 한국영화였다. 최근작 <버닝> <기생충>처럼 한국영화는 사회적 계층의 차이를 굉장히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 특정한 패턴을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변한다는 특징도 한국영화의 큰 매력이다.
-최근 독일영화계는 여성감독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이니시에이티브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대한 소개도 부탁한다.
=독일영화계는 여성감독의 비율이 낮다는 점에 착안해서, 성평등 이니시에이티브 정책을 발의했다. 그 과정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작가,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 영화의 다양한 제작 공정에서 여성들의 비율이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각본과 촬영을 전공하고 연출을 교육받은 여성들은 많은데 실전에서 활동하는 감독들이 적어, 현장에서 여성의 비율을 높여보자는 취지로 성평등 이니시에이티브가 시행되고 있다. 정책적으로는 영화부문에 있어 재정을 지원하는 각종 위원회의 남녀 비율을 동등하게 맞추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최근 주목하는 독일 여성감독은.
=카롤리네 링크. <러브 인 아프리카>(2001)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감독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토니 에드만>(2016)으로 칸에서 주목받았던 마렌 아데 감독을 이야기하고 싶다. 젊은 여성감독들이 점점 더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독일영화계에서 남녀 성비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평등 이니시에이티브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여성감독 후원으로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더 개선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