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국제영화제(이하 토론토영화제)는 그해 유럽 3대 영화제의 화제작과 독립영화, 제3세계 영화가 흘러드는 영화의 저수지다. 코스모폴리탄 대도시 한복판에서 열리는 이 영화제에서 스타를 만드는 힘은 특정 위원회가 아니라 하루 네편씩 영화를 보고 신나게 의견을 나누는 일반 관객과 기자들로부터 나온다. 지난 9월 5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제44회 토론토영화제의 경향과 화제작을 소개한다. 국제영화제가 당면한 고민도 덧붙여 전한다.
84개국, 장편 245편, 27개 스크린, 3600명의 자원봉사자, 1만 7천명의 민간후원자. 북미 최대의 영화 페스티벌인 토론토영화제의 2019년을 말하는 숫자들이다. 프레스를 위한 소식지 <킹 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올해 토론토영화제에서 11일 동안 상영된 영화의 총러닝타임은 2만 8264분으로 휴식 없이 낮밤을 관람한다고 치면 20일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물병, 혈당유지용 사탕, 스마트폰, 펜, 수첩, 우산 같은 생필품 외에도 토론토영화제 기자들에게는 쿠션 좋은 신발이 필수적이다. 적은 수의 스크린으로 전세계에서 모여든 저널리스트들을 줄 세우는 칸국제영화제만큼 혹독하지는 않지만, 토론토영화제는 프레스/영화산업 종사자를 위한 상영이나 시민에게 오픈된 일반 상영이나 만석이 아닌 회차를 찾기 어려운 탓에, 편당 20분 이상의 줄서기는 감내해야 한다. 참석한 감독, 배우를 기쁘게 하는 만석 사례는 배지 소유자에 대한 주최쪽의 엄격한 관리와 자원봉사자들의 숙련된 유도로 가능하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려는 관객으로 1410석이 꽉 찬 윈터 가든 극장에서 옆자리에 앉은 한 중년 신사는 “평일 오후 2시인데도 미어터져요”라고 한숨을 쉬었다. “참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입니다”라고 치하하자 “그렇죠. 영화제 기간 외에는 별로 안 그렇지만”이라고 받았다. 그거야 흉도 아니다. 많은 이민자와 다양한 문화가 술렁이는 이 대도시에는 영화 말고도 마음을 빼앗길 유혹이 많을 터다.
토론토영화제의 대중성은, 스타를 앞세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신작과 동시대 월드 시네마 그리고 인디영화를 한 장소에서 따라잡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베니스-텔루라이드-토론토-뉴욕 영화제로 이어지는 가을 페스티벌 벨트는 늦가을에 시작해 오스카로 마감되는 시상식 시즌으로 가는 중요한 플랫폼인데,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북미 언론이 모이고 대중의 반응이 집계되는 토론토는 미더운 리트머스지다. 메인 경쟁부문 없이 독창성과 참신한 재능을 가리는 디스커버리와 플랫폼 부문만 심사를 거쳐 상을 주는 토론토영화제에서 최종 심급은 여론이다. 입장을 기다리는 줄에서 오가는 어제 본 영화에 대한 품평, 관객 및 기자들의 트위터, 소셜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셀프 프로모션이 진정한 승자를 가린다. 공식 마켓은 없지만 많은 영화 세일즈사와 수입사 사람들이 어느 영화제보다 부지런히 영화를 보러 다니고 전화를 돌린다. 여타 영화제에서 인기상에 해당하는 관객상(People’s Choice Award)은, 그래서 토론토에서 가장 중요한 상이다. 특히 수상작이 2012년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하면서-<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노예 12년> <이미테이션 게임> <룸> <라라랜드> <쓰리 빌보드> <그린 북>(연도순)- 관객 투표로 정해지는 이 상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영화제 기간 중 올해의 관객상으로 점쳐진 영화는 “범인 찾기 스릴러 장르를 재구성했다”는 평을 얻은 라이언 존슨의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봉준호의 <기생충>,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와 <두 교황>(Two Popes), <토르: 라그나로크>의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의 <조조래빗>(Jojo Rabbit),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움켜쥐고 대서양을 건너온 <조커> 등이었다. <크리샤>(2015), <잇 컴스 앳 나잇>(2017)으로 부상한 신예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의 <웨이브스>(Waves)와 2017년 <굿 타임>으로 <필름 코멘트> 베스트 1위에 올랐던 사프디 형제의 신작 <언컷 젬>(Uncut Gems)도 환대받았다. 예년에 비해 앞서 다른 영화제를 거치지 않은 토론토영화제 최초 공개작의 화제성이 낮았던 가운데, 결국 히틀러와 제3제국을 동화적 비전으로 풍자한 <조조 래빗>이 관객상의 기쁨을 누렸다.
다큐멘터리 관객상은 시리아/덴마크영화 <동굴>(The Cave)에 돌아갔다. 지아장커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온 플랫폼 부문에서는 12편이 경쟁한 끝에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마틴 에덴>이 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협회는 알코올에 중독된 여성이 동물에게 집착하는 과정을 간결한 형식으로 그린 캐나다영화 <웅얼거림>(Murmur)과 영국의 성장영화 <소녀는 어떻게 완성되는가>(How to Build a Girl)를 각각 디스커버리와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의 수상작으로 택했다.
한편, 폐막과 동시에 322명의 평론가와 취재기자를 대상으로 <인디와이어>가 설문한 결과 최고의 극영화 및 최우수감독은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으로 집계됐다(<기생충>은 관객상에서 <조조 래빗>과 <결혼 이야기>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그린 북>이 관객상을 받은 지난해에 기자/평론가들은 같은 조사에서 <로마>를 최고작으로 선정한 바 있다. 개막 이튿날 아침부터 프레스와 인더스트리에 배정된 당일 티켓까지 동났던 <기생충>에 대해 기자가 제일 많이 접한 소감은 “나도 좋았고 단점을 말하는 사람을 못 만났다”는 코멘트. 오는 10월 11일 북미에서 <기생충>을 개봉하는 배급사 네온은, 토론토영화제의 우호적 반응으로 말미암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붐을 내년 오스카까지 이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평론가들의 베스트5 목록은 <기생충>에 이어 <결혼 이야기> <조조 래빗> <나이브스 아웃> <조커>로 완성됐다. 최고 시나리오로는 <결혼 이야기>와 <나이브스아웃>이 1, 2위를 차지했고, 성별 구분 없이 영화제 상영작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인 배우로는 <결혼 이야기>의 애덤 드라이버가 뽑혔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 <언컷 젬>의 호연으로 “전작을 다 용서할 수 있다”는 평을 받은 애덤 샌들러가 그 뒤를 따랐고 <허슬러>의 제니퍼 로페즈가 4위를 차지했다. 화제작 <결혼이야기>의 주연, <조조 래빗>의 조연으로 오랜만에 연기 갈증을 푼 스칼렛 요한슨도 오스카 레이스의 선두주자로 거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