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샌드라 오에게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TV시리즈 드라마 부문의 여우주연상을 안긴 그 작품, 바로 <킬링 이브>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배우 샌드라 오가 골든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과 더불어 사회자를 맡아 입지를 드러낸 데에는 이 드라마의 인기가 주효했다.
그녀들의 디테일로 스파이 장르 뒤틀기
영국의 국가 보안정보국 요원 이브 폴라스트리(샌드라 오)와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팽팽한 관계가 <킬링 이브>에서 관능적인 스릴을 펼쳐나간다. 일반 사무직과 다를 바 없는 정보국 말단 직원인 주인공 이브는 007 스타일의 첩보물과는 상극을 이루는 인물. 매일의 일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브의 정체성은 스파이 스릴러와 드라마 장르가 손잡는 좌표점에 <킬링 이브>를 안착시킨다. 가정적인 남편과 유머러스한 동료들 사이에서 모난 데 없는 나날을 보내던 이브는 상사인 캐롤린(피오나 쇼)에 의해 실은 그녀가 여성 킬러들을 향한 평범치 않은 관심을 이어왔음이 탄로난다. 흠모하는 아이돌을 연구하듯, 오랫동안 은밀하고도 과도하게 킬러를 사랑해온 여자. 이브의 남다른 취향과 탁월한 직관, 그리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알아본 캐롤린은 여성 킬러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각지의 사건들을 수사하기 위해 이브를 비밀 요원으로 채용한다. 그러니까 <킬링 이브>는 성공한 ‘덕후’의 서사이고, 종종걸음으로 사건 현장에 달려가면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자제하지 못하는 샌드라 오는 덕후의 심정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배우다. 한편 비밀의 12사도로 구성된 조직 ‘투엘브’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러시아인 킬러 빌라넬은 다분히 분열적이고 냉혹한 인물인데,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영악한 악동 같은 면모가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잔흔을 남긴다.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거침없는 에너지는 이브보다도 한수 위다. 자신을 향한 호의와 관심을 기막히게 알아차리는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발휘해 이브의 그물망에 스스로 뛰어드는 빌라넬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여자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는 이끌림, 갈등과 정념을 겨누는 두 여자의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세계 구원’이라는 각자의 거창한 소명을 비웃듯, 에피소드별로 다양한 수뇌부 인사들이 무미건조하게 제거되는 <킬링 이브>는 오로지 이브와 빌라넬, 둘만의 유유한 행적에 관심을 둔다.
서로 쫓고 쫓기는 정보국 요원과 킬러 쌍방이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스파이 장르의 컨벤션을 고려하면, <킬링 이브>는 그 기획만으로 환영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킬링 이브>는 여성 서사에 갈증을 느끼는 시청자들의 기대치를 경쾌하게 뛰어넘는 재기를 과시한다. 단순한 성역할의 전복 그 이상의 것, 여성들이 서사의 전면에 나섰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세심한 디테일을 매우 잘 아는 드라마다. 시즌1 초반, 서로의 정체를 알기도 전에 사건 현장 화장실에서 이브와 빌라넬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이섹슈얼로 설정된 빌라넬은 첫눈에 이브의 새까만 곱슬머리에 반한 듯, 머리를 묶고 있는 이브에게 “그냥 풀어두라”며 넌지시 조언하고 사라진다. 미적 감각을 공유하며 서로의 장점을 성실하게 발견해주는 여자들의 세계, 이 사소하지만 심상찮은 소통 방식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빌라넬이 이브의 여행용 슈트 케이스를 훔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새 이브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슈트 케이스 안에는, 첩보물이라면 으레 폭탄 따위가 들어 있어야 마땅하지만, 황홀함을 자아내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의류들이 가득 들어 있다. “셔츠와 니트가 합쳐진” 간편한 옷으로 격무를 버티는 이브를 위한 섬뜩하지만 친절한 구애다. 이브를 위한 맞춤형 디자인과 완벽한 사이즈 선택엔, 사제폭탄 제조에 맞먹는 고심과 노력의 흔적도 역력하다.
<킬링 이브>, 누가 만들었고 누가 열광하나
매일의 긴장 넘치는 밤샘 작업 속에서도 건강한 피부를 유지하는 상사에게 관리 비결을 물어보는 물색없는 이브와, 무심하게 돼지 태반 크림의 제품 링크를 보내주겠다는 상사 캐롤린. 영국의 평화를 수호 중인 프로페셔널한 스파이의 대화는 여느 회사 점심시간에 오갈 법한 주제도 손쉽게 포용한다. 이브와 빌라넬은 물론, 이브의 상사 캐롤린과 캐롤린의 상사까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킬링 이브>는 시시콜콜한 여성들의 대화와 제스처, 전형에서 벗어난 태도의 유연함으로 서사의 완결도를 높인다. 실제로 <킬링 이브>를 만든 제작진도 드라마 내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킬링 이브>팀은 감독을 제외하고 프로듀서, 작가, 배우진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캐롤린과 같이 원작소설 <코드네임 빌라넬>에서는 남성으로 설정된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고, 주인공 이브를 아시아인으로 설정하는 등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을 기획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제작진 중에서도 요즘 특별히 호시절을 누리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피비 월러브리지다. 지금 영국 평단은 물론 글로벌 드라마 시장에서 가장 궁금해하고 주목받는 이름인 그녀는 감독, 배우, 각본가, 제작자의 역할을 부지런히 오가는 1985년생 뉴제너레이션이다. <킬링 이브>에서는 제작과 각본을 담당했고, 직접 쓰고 주연한 코미디 시리즈 <플리백>은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각본상, 연출상, 작품상 4개를 수상하며 코미디 부문을 휩쓸었다. 냉소적이고 퉁명스럽지만, 이면에 뭉클하게 감수성을 건드리는 대사 처리는 이제 피비 월러브리지 특유의 스타일로 각인되었고 이는 <킬링 이브>에서도 선명한 미덕으로 발휘된다. 2019년 4월 시즌2가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킬링 이브>는 국내에서도 SNS나 팟캐스트상에서 자주 언급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사회와 조직의 지도부에 자리잡은 다양한 인종의 여성 인물이 가진 유능함, 그리고 개별 캐릭터로서의 다층성과 복잡함을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이 부지런히 응답을 보내온 까닭이다. 이를 자신만만하게 예상한 듯, 처음 캐스팅 단계에서 피비 월러브리지는 샌드라 오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며 이렇게 썼다. “문은 활짝 열려 있어요, 샌드라. 달려와주세요!”(the door is wide open, Sandra, please come running in)(<인디펜던트>)
우리가 <킬링 이브>에 바라는 몇 가지
시즌2 방영 이후 시리즈를 지켜본 시청자들 일부는 약간의 우려감도 드러내고 있다. 시즌제 드라마에서 제작진, 각본가 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킬링 이브>는 아직 신생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진 교체와 함께 드라마의 톤 앤드 매너가 이탈한 느낌이 다소 부각된 경우다. 특히 이브의 시점을 바탕으로 전개됐던 시즌1과 달리 시즌2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브 캐릭터의 비중이 줄어들고 빌라넬이 서사의 주체로 들어섰다. <킬링 이브> 시즌1은 빌라넬의 폭력성이나 불가해함을, 평범한 여성 이브가 지닌 야성적인 욕망과 연결시키면서 인간 심연에 관한 주제적 깊이마저 산뜻하게 녹여냈다. 그에 반해 소설 원작에서 벗어난 새로운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 시즌2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대한 부담감이 확연하고, 빌라넬을 중심으로 화려한 부피감에 공들인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빌라넬의 키치한 매력이 대중적인 인기를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임은 확실하지만, 일각에서는 “아시아계 배우인 샌드라 오 밀어내기가 아니냐”는 비판적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샌드라 오가 아닌 조디 코머가 수상하고, 수상 직후 <킬링 이브>의 SNS 공식 계정에 샌드라 오가 빠진 단체 사진이 올라오면서 잠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미 쌓아둔 두 여성 캐릭터의 재료가 무궁무진하기에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시즌3에 대한 믿음은 여전하다. 커다란 타이포그래피로 문을 여는 간결한 오프닝 시퀀스, 감각적인 사운드트랙, 런던·파리·베를린·모스크바 등 에피소드별로 다채롭게 꾸려진 유럽 각국의 미장센 등 매끈한 만듦새도 시리즈를 계속 보게 만드는 믿음직한 요소다. 아직 베일에 싸인 12사도 투엘브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순서인 시즌3에서는, 이브와 빌라넬의 협업을 볼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다수다. 결국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것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두 인간의 치열한 사랑법이다. 사랑이 만약 상대를 정확히 탐구하려는 노력이라면, 빌라넬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인 이브는 드물게 성실하고 존재론적인 사랑을 펼치는 중이고, 반대편에 선 빌라넬은 자신의 이끌림을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넘치는 로맨티스트다. 호기심과 성적 충동, 갈망과 증오가 뒤섞인 킬러와 요원의 추격전은 로맨스에 관한 훌륭한 은유로서 앞으로 훨씬 더 진득해질 일만 남았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개성 넘치는 여자 둘이라니. 어떻게 <킬링 이브>를 안 볼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