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2006년 영화 <타짜> 곽철용 연기로 2019년에 전성기 맞은 배우 김응수 스토리
2019-10-17
글 : 김성훈
사진 : 백종헌
영화야, 나도 전성기가 있다

기자가 ‘곽철용’ 팬 생활을 불과 한달 전에 시작했다. 유튜브에 들어가니 너도나도 곽철용 얼굴로 도배한 섬네일을 앞세운 영상들을 올렸다. “묻고 더블로 가”,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적금 들고 보험 든다” 같은 영화 속 곽철용 명대사가 유행어가 됐다. 그때 곽철용 팬이던 놈들이 100명이다 치면은, 유튜브에 들어가 곽철용 영상만 보는 놈 제치고, 곽철용을 연기한 배우 김응수가 출연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나 <공작> 영상까지 찾아보는 놈 보내고, 김응수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까지 몇번 돌려보는 데 그친, 안경잽이같이 배신하는 XX들 다 죽였다. <타짜>가 개봉한 지 13년이나 지난 지금, 대체, 왜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도 아닌 곽철용에게 열광할까. 인생 캐릭터 곽철용 덕분에 강제 전성기를 맞은 배우 김응수를 직접 만나 곽철용 신드롬은 물론이고 그의 영화 인생을 진득하게 들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화제의 인물인 까닭에 그와 나눈 대화에 기자의 해석을 덧붙이기보다, 그의 목소리를 좀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1인칭으로 정리했다. 다음장부터 묻고 더블로 가!(<타짜>에서 그 유명한 곽철용의 대사를 패러디했습니다.-편집자)

<공작>

대체, 왜, 지금 ‘곽철용’ 세상이 됐는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 만큼 내가 연기를 잘했나? 부끄럽다, 더 잘할걸. 한 1, 2년 전부터 촬영장이나 식당에 가면 젊은 친구들이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서 곽철용 대사를 해보이곤 했다. <타짜>를 열번, 스무번 봤다고 고백하면서. 뭐가 재미있어서 그렇게 많이 봤냐고 물어보면 곽철용 때문이라는 거다. 왜 그렇게 곽철용을 좋아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작에서 연기한 캐릭터의 상당수가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풍자했다면, 곽철용은 진짜 남자다운 면모가 있어 사람들이 공감한 게 아닌가 싶다. 비록 건달이지만, 치사하거나 지저분하지 않고 룰을 잘 지키는 그의 윤리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부정부패보다 젠틀하고 깨끗하다고 본 거다. 곽철용 신드롬을 지켜보면서 너무나 행복하고 배우를 직업으로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1961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나는 당시 명문이던 군산 제일고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배우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모님도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여자를 만나 좋은 가정을 꾸릴 거라고 안심하셨다. 이과였는데 아버지는 내가 공대를 진학해 회사원이, 어머니는 신학대에 들어가 목사가 되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모두 싫었다. 공부에 너무 질렸기 때문이다.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하는 학교 일과에 회의를 느끼던 가운데,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만난 소설책 두권이 인생을 처음으로 바꿔놓았다. 하나는 삼중당문고에서 낸 김찬삼 작가의 <세계의 나그네>고, 또 하나는 이상의 <날개>였다. 특히 해외여행이 힘들었던 당시 아프리카를 포함한 오지를 여행하고 쓴 <세계의 나그네>는 너무 재미있었다. 삼중당문고 판형이 작은 덕분에 교과서에 끼워 수업시간에 몰래 읽었는데 그렇게 짜릿짜릿하고 귀에 팍팍 들어올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 20, 30명을 불러모아 책 이야기를 들려주니 재미있어했고,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이 컸다. 소설을 쓰면 남들을 재미있게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에 추석 풍경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을 써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자 잘썼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글로만 읽으니 감흥이 생생하지 않더라. 문장의 세계보다는 육체를 이용해 이야기를 표현하는 세계가 더 감동적일 거라고 생각했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수 끝에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했다.

<타짜>

극단 목화에서의 나날

1981년 대학 입학하자마자 동랑레퍼토리에서 발을 들인 연극은 극단 목화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목화와의 인연은 목화에 들어가기 전 무대에 올랐던 <오구: 죽음의 형식>에서 시작됐다. 이윤택이 쓰고, 채윤일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무당 석출 역할을 맡았다. 석출은 북과 장구를 잘 다룰 줄 알고 판소리와 굿을 소화할 수 있어야 맡을 수 있는 인물이라 보통은 40, 50대가 맡곤 한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20대 후반인 내가 연기하면서 연극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오구: 죽음의 형식>이 문예회관 소극장에 올라가자 배우 김학철, 최종원 그리고 최형인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 등 당대 기라성같은 연극계 선배들이 보러왔다. 대체 김응수가 누구냐. 그 연극을 본 연극평론가가 오태석 선생님한테 연극계에 괴물이 나타났으니 빨리 목화로 데려가야 한다고 나를 칭찬했고, <오구: 죽음의 형식>이 끝나자마자 극단 목화로 들어갔다. 당시 목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로 만든 창작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연극의 상당수가 번역극이었다. 나는 번역극이 싫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아주 이상한 언어가 입에 붙지도 않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목화에서 배우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토양을 흡수했다. 입단하자마자 연극 <운상각>에서 주연을 따내면서 연극계가 또 한번 놀랐다. 3년쯤 연습실을 청소하면 불러서 대사를 시켜보고 곧잘 하면 단역을 주던 목화의 전통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오태석 선생님은 나를 목화의 기둥으로 키우려고 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냈고, 오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은 덕분에 하루하루 연습시간이 달았다. 연기에 대한 진성성, 역할 접근법, 극 해석, 무대세트 등 모든 걸 받아들였다.

1989년 대한민국연극제를 앞두고 <오구: 죽음의 형식>을 본 많은 연극계 선배들은 매일 밤 연습실 앞에서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려 마로니에공원 앞 포장마차에 데리고 가서 서로 칭찬해주기 바빴다. 신인연기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가 컸다. 하지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은 나이가 어려 신인으로 쳐주지 않던 당시 연극계 풍토 탓에 4표 차이로 상은 (송)영창이 형에게로 갔다. 대단하다고 띄워줄 때는 언제고, 상을 주지 않으니 어린 나이에 창피하고 화도 났다. 영화 연출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가기로 결심한 것도 그때쯤이다. 대학 시절 영화과 수업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2)를 보고 고등학생 시절 삼중당문고를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연극계에 대한 섭섭함도 컸지만, 그보다는 영화가 연극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더 설득력 있어 보였고, 앞으로는 영화가 대세가 될 거라고 보았다.

당시 목화는 대학로에 전용극장을 만들어 <춘풍의 처>를 무대에 올렸다. 그 공연에서 고수로 참여하는 한달 반 동안 유학을 준비하고 비자 수속을 밟았다. “<춘풍의 처>를 하고 일본으로 가겠다”고 오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앞으로 목화를 네 중심으로 가려고 하는데 왜 한국도 아니고 일본까지 가려고 하냐”고 붙같이 화를 내셨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자, 오 선생님은 배우 (박)영규 형님, 선생님의 사모님께 “응수를 말려보라”고 했다. 그들의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자 선생님께서 내 뺨을 딱 때렸다.

인생에서 전환기가 세 차례 있었는데 고교 시절 삼중당문고를 읽었을 때와 극단 목화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일본 유학 생활이다. <아사히 신문>을 배달하며 어학원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뒤 입학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일본영화학교 생활은 모든 게 새로웠고 신났다. 목화가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한 덕분에 교수님들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고, 인정해주었으며, 나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도 잘 따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는 매년 5월 전교생이 농촌에 실습하러 갔다. 두세명씩 짝을 지어 열흘 동안 농가에 가서 모내기를 비롯한 농사일을 직접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촬영 전공 학생들은 <나라야마 부시코>를 촬영한 산속으로 가기도 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이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얘기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였다. “인간의 기본은 농촌에 있으니 농촌 실습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선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가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은 “너희들은 픽션의 세계에 살지만 논픽션을 알아야 한다”면서 다큐멘터리를 가르치셨다.

그 영향을 받아 졸업작품으로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 양산박’을 이끈 김수진 대표를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우리말과 우리 이름을 쓰고, 차별에 맞서 일본 연극계에서 인정받은 재일 조선인이었다. 목화와 신주쿠 양산박은 형제처럼 지낸 극단이기도 했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을 때 김수진 대표가 오태석 선생님 몰래 유학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동기들은 재일 조선인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낸 기획안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아 김수진 대표를 주인공으로 한 50분짜리 다큐멘터리 <사자의 계절>의 연출을 맡을 수 있었다.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찾아가 재일 조선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사연과 생활을 담아냈다. <사자의 계절>은 학교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평론가 사토 다다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께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보다 일본에서 데뷔하는 게 훨씬 낫다. 어떤 일본 감독의 조감독이라도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다큐멘터리 <극사적 에로스>(1974)와 <가자! 가자! 신군>(1986)을 연출해 일본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하라 가즈오 감독이 극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연출부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하라 가즈오의 대표작인 <가자! 가자! 신군>은 원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찍으려고 했던 작품이다. 천황을 죽이겠다니, 일본 우익들에게는 난리날 일이잖아. 여러 이유 때문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이 찍지 못하고, 하라 가즈오 감독에게 연출을 넘겨줬다. 그만큼 두분은 돈독한 사이였는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께서 나를 불러서 “너, 내일부터 하라 가즈오군의 영화사가 있는 신주쿠로 출근해”라고 말씀하셨다.

영화학교 3학년 때인가. 1995년 김상진 감독의 <깡패수업>이 일본에서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 문화 개방 전이라 일본에서 찍으면 한국에서 개봉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지금은 친구가 된 차승재 당시 우노필름 대표가 <돈을 갖고 튀어라>(1995)로 돈을 번 뒤 내놓은 두 번째 영화였다. 한국 깡패가 일본 야쿠자 조직에서 일을 배우는 이야기인데 황당한 설정이었다. (웃음) 일본영화학교 선배인 이상국 조감독의 권유로 연출부에 합류했다. 극중에서 배우 조은숙이 일하는 클럽의 웨이터가 필요했는데, 웨이터 의상이 딱 맞는다는 이유로 김상진 감독이 나에게 단역을 맡겼다. 클럽에 온 손님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클럽 사장인 (명)계남이 형(동방우)이 “너 왜 손님들에게 외상을 주고 그래. 외상 주지 마”라고 대사를 하면 “네, 네”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술 먹고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애드리브를 쳤다. 모니터를 보던 김상진 감독과 조감독들이 웃겨서 쓰러졌다. 김상진 감독이 “(김)응수가 어떻게 저런 애드리브를 한대?”라고 묻자 사람들이 “응수, 목화야. 몰랐어?” 하며 난리가 난 거다. <깡패수업>이 끝난 뒤에도 하라 가즈오 감독의 영화는 계속 미뤄지고, 마침 큰아이까지 태어나 한국에 돌아왔다. <깡패수업> 조감독이던 장규성 감독, 김상진 감독, 차승재 대표가 함께 작업했던 인연으로 불러주면서 배우로 복귀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93년, 일본영화학교 1학년 재학 시절 일본영화학교 실습 감독으로 온 최양일 감독과 김응수(왼쪽부터).

성실함이 나의 힘

<타짜>의 곽철용을 포함해 데뷔작인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의 결혼식 하객, <오래된 정원>에서 본명을 쓴 응수, <싸움의 기술>의 주인공 병태 아버지 병호,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조범석(곽도원) 검사의 수사를 막는 최주동 부장검사, <공작>의 안기부장 등 다양한 역할을 연기해왔다. 그중에서 유독 애착이 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임상수 감독의 대표작 <그때 그사람들>에서 맡은 민 대령이다. 민 대령은 김재규(백윤식)의 수행비서다. 임상수 감독이 목화 연극의 광팬으로,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인 그는 같은 대학 철학과 출신인 오태석 선생님과 잘 맞았다. 임 감독은 목화 연극을 볼 때마다 오 선생님께 솔직하게 의견을 주었고, 자신의 영화에 영감도 많이 받는 것 같았으며, 그래서 목화 배우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 늘 자신의 영화를 목화 배우로 채우고 싶어 했던 감독이다. 어느 날 임 감독이 불러 명필름에 갔더니 <그때 그사람들> 시나리오를 주며 “형, 읽어보고 하고 싶은 역할을 얘기해줘”라고 했다. 대사가 거의 없던 민대령이 눈에 들어왔다. 민 대령의 모델이 된 박흥주 대령과 그의 유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취재하고 준비해 촬영에 들어갔더니 임상수 감독이 아주 눈이 돌아갈 만큼 좋아해줬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부터 최근의 단편 <뱀파이어는 우리 옆집에 산다>까지 그의 전작에 얼굴을 내밀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

지금까지 60편이 넘는 한국영화에 출연했고, 늘 그랬듯 앞으로도 배우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싶다. 아, 일본영화학교 시절 직접 쓰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으로부터 75점을 받은 시나리오가 있다. 제목이 <호접몽>으로, 주인공 중국인이 여권을 위조해 일본에 일하러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발각돼 강제 추방당하는 이야기다.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자본주의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이자 설득력 있는 메시지이지 않나. 직접 연출하기보다 경험 많은 감독이 제대로 된 규모로 완성도 있게 연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거나 요즘 유튜브에 들어가 곽철용을 패러디하고 명대사를 모은 영상,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한국 사람들이 해학, 신명을 잘 아는 민족인 게 분명하다. 하나도 틀린 얘기가 없다. 여러분이 행복하면 나는 더 행복하다.

김응수 배우 주요 필모그래피 2019 <양자물리학> 2018 <공작> 2017 <용순> 2017 <임금님의 사건수첩> 2016 <국가대표2> 2016 <검사외전> 2015 <나의 절친 악당들> 2014 <하이힐> 2013 <미스터 고> 2012 <돈의 맛> 2012 <코리아> 2012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2012 <부러진 화살> 2007 <기담> 2007 <이장과 군수> 2007 <오래된 정원> 2006 <타짜> 2006 <예의없는 것들> 2006 <싸움의 기술> 2005 <청연> 2005 <그때 그사람들> 2004 <박치기!> 2004 <귀신이 산다> 2004 <늑대의 유혹> 2001 <신라의 달밤> 1999 <주유소 습격사건> 1998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6 <깡패수업> 1993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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