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유은정 감독의 <방황의 날들>
2019-10-22
글 : 유은정 (감독)

감독 김소영 / 출연 김지선, 강태구, 케이트 클랜시, 제이미 허버트 / 제작연도 2006년

어렴풋이 단편 작업을 함께하기로 한 배우들과 <방황의 날들>을 보고 낙원상가를 걸어나온 기억이 난다. 우연히 이 영화를 접한 내가 배우들에게 함께 보자고 졸랐다. 종로의 극장에서 나는 훌륭하고 훌륭한 프랑스, 대만, 일본,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감명받았지만 그 영화들이 내 이야기같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건 영화가 재밌고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것과는 또 다른 터치였다. 나는 바로 당신을 관객으로 염두에 두고 있어요, 나는 당신이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하고 영화가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방황의 날들>은 엄마를 따라 이주한 낯선 도시에서 방황하는 10대 에 이미(김지선)의 성장담이랄까 생존담이랄까, 그가 하루하루 누굴 만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결심을 하는지 세세하고 면밀하게 좇는 영화다. 영화는 에이미 말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 시종일관 클로즈업인데, 처음 접하는 상황과 관계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는 에이미 역시 모든 것을 정신없이 클로즈업으로 보는 듯했다. 에이미의 클로즈업은 내가 지나왔던 시간이자 22살의 내가 여전히 맞닥뜨리고 있던 방황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허들을 넘기 위해 갈라진 길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출퇴근했고, 누군가는 어학연수를 떠났고, 누군가는 계속되는 입시 실패와 사회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에 지쳐 연락을 끊고 사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람들과 부딪혔고 가족과 주변을 의식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는데, 어떨 때는 그 모든 게 제자리걸음을 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는데 왜 아무도 우리의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지 답답했다. 20대 여성은 예쁜 옷을 사입고 캠퍼스를 거닐며 사랑받기 위해 애교 부리고 다른 이들을 질투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시절이었다.

누군가는 내가 만든 영화를 보고 “이건 영화가 아니라 경험의 재현일뿐”이라고 했다. 나는 ‘경험의 재현이 뭐가 잘못된 거지?’ 하고 의문을 품었음에도 부끄러워했다.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가닿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나는 쉽게 자신감을 잃었다. 세상이 나를 의심케 할 때, 그럴 때는 나를 믿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혼자서 으 으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경험과 이야기들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그런 존재 자체로 응원인 영화들로부터 받기도 한다. 지금 누군가 <벌새>(2018)와 <우리집>(2019) 혹은 <밤의 문이 열린다>(2018)를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싶어 한다면 과거의 나는 <방황의 날들>을 보며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었다. 영화를 만드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일 때가 많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가 될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유은정 <시> 메이킹으로 현장에 입문해 <낮과 밤>(2012), <싫어>(2015), <캐치볼>(2015), <밀실>(2016) 등 다수의 단편영화를 발표했다. 첫 번째 장편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가 올해 8월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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