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10년 이상의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가운데 작가 정보를 지운 블라인드 심사로 가장 뛰어난 7편을 뽑고 대상작과 우수상을 가리는 2019년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가는 대상의 윤성희를 포함해 전원이 여성이었다. 한국 문학은 지금 이전 어느 때보다 여성작가가 만들어내는 여성 서사에 매혹되어 있다. 그만큼 강력한 작품들이 줄이어 출간된다는 뜻. <82년생 김지영> 개봉을 맞아 다시 책장을 살펴, 영상화할 만한 작품들을 리스트업했다.
1. 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 / 창비 펴냄
한국의 로버트 알트먼을 찾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을 읽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피프티 피플>을 영화로 보고 싶다. 50개의 장(章)으로 나뉘고 연결되는 50명의 이야기를 어떻게 한편의 영화로 만드냐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엮어 영화 <숏 컷>을 만들어낸 것처럼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 이름으로 이루어진 목차를 넘겨, 그들 하나하나를 알아가면서, 감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사회의 트라우마와 첫걸음을 시작하는 사랑의 설렘이 어떻게 동시에 우리를 건드릴 수 있을까. 사회의 고통과, 타자와 연대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나. 한두명의 삶으로 축약하기 어려운, 엄지로 쓱쓱 밀어올리며 수십 수백의 목소리를 순식간에 스쳐가는 SNS와 스마트폰의 시대에, 잠시 멈춰 만나볼 만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2.먹는 존재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펴냄
먹는 이야기는 최근 드라마에서 꽤 사랑받는 소재다. ‘힐링’하는 느낌의, 요리하는 사운드가 바탕에 깔리고 조명은 따뜻한 빛을 띠고 있다. 주인공이 여자라면 먹을 때도 조신함을 갖춤은 물론이다. 들개이빨 작가의 만화 <먹는 존재>를 드라마로 만들면 그 모든 요소가 엄청나게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리라. 주인공 유양은 회식 자리에서 무리하게 술을 권하는 사장에게 ‘굴’을 뱉는 바람에 회사에서 잘린다. 그리고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담고 있는데 목차는 놀랄 일도 아니지만 주로 먹는 것이다. 닭볶음탕, 주꾸미볶음, 훠궈, 육개장, 욕…. “아, 짜증나. 내가 뭐 주색을 탐했어, 명품으로 전신을 처바르길 했어? 세끼 밥 먹고 숨 좀 쉬었을 뿐인데 돈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고!” 질기게도 돌아오는 삼시세끼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 욕이 좀 많긴 한데….
3.항구의 사랑
김세희 지음 / 민음사 펴냄
‘응답하라 시리즈’로 말해지기 어려운, 2000년대 초 목포의 사랑 이야기. 주인공은 지역 명문인 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이돌을 사랑했다. 팬픽을 읽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 선배를 사랑했다. 민선 선배는 연극부 주연배우였다. 선배에게도 ‘나’에게도 미래는 항구도시가 아니라 서울에 있으리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함께 진학하면 같이 살자던 이야기. 한국영화에 여성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때 이 소설을 만났다. 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기 잘하는 젊은 여성 연기자들을 떠올리며. 책 말미 ‘작가의 말’도 영화 도입부로 손색이 없다. (물론 소설과 작가의 말은 별개다!) 드라마 버전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벌새>의 명대사,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의 거울 같은 상황. 이제 민선 선배를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를.
4. 작은마음동호회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누군가가 윤이형 작가의 단편소설 <작은마음동호회>를 단막극으로 만들어주었으면. 이 이야기를 읽으면 식구들이 각자의 일에 빠져 있으면서 “엄마는 또 TV 보네”라고 한마디할 상황에, TV 앞에서 생각에 잠긴 내 또래 여성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사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엄마들이다.” “우리는 아내들, 며느리들, 딸들이다.” 자기 이름보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한 여성들이,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과일청을 만들다가 시계를 보고 쫓기듯 자러 가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결혼하고 나서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된 여성들이 손을 잡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5. 다른 사람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김진아는 거짓말쟁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년. @qw1234.” 그가 아무렇게나 만든 트위터 아이디로 배설하듯 지껄인 말. 그는 생각한다. ‘억울하시겠지. 하지만 이게 너의 진짜 본모습이야.’ 주인공 김진아는 직장 상사이자 완벽한 남자친구였던 그에게 다섯 번째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일어난 다 말해지지도 않을 일들 가운데, 진아는 악플 중 자신을 아는 듯한 글을 발견한다. 데이트폭력을 다룬 <다른 사람>은 여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하는 사적 공간에서의 폭력과 그 폭력이 사회적인 것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 마음들이 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들키는 사람에 함부로 취급받고 질질 끌려다니면서도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을 멈추고 싶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셜포비아>는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6.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펴냄
2019년 가장 화제가 된 작가 김초엽. 2017년 <관내분실>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관내분실>은 애니메이션이든 실사영화든 장편으로개작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터스텔라>의 서재 장면을 변형한 도서관 장면 비주얼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형태로 망자의 기록을 보관하는 시대. 그렇게 망자의 기록을 모아둔 도서관을 찾은 주인공은 엄마의 기록이 관내분실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도서관 내 분실 상태임을 알게 된다. 우주에서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애쓰는 과학자의 이야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보고 싶다. 후자의 캐스팅은 내 마음속에서 고두심 배우로 내정되었다.
7.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지음 / 창비 펴냄
“오늘도 중장비보다 오래 일했습니다.” “전 저의 인생이 필름 없는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포즈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제스처로 존재하는 삶, 일하고 일하면 굶지는 않는 삶. 기성세대가 붙이는 소확행이니, 시발비용이니, 밀레니얼이니 하는 딱지로 이렇게 저렇게 재규정되기를 반복하는 세대. 김정연 작가의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은 한국 사회의 2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혼자’라는 상태가 ‘가족’을 만들기 전의 임시적 유예상태가 아니라, 정성들여 길러내야 하는 개인의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인데, 김정연 작가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선을 살려 에피소드 몇을 묶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인물과의 관계를 잘 살려 장편 실사영화로 만들어도 지금 20대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참 여러 번 했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