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은 1982년 데뷔 이후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까지 37년간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관통하는 사회고발적인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구태여 왜 힘든 길을 선택해왔느냐는 우문에 정지영 감독은 “만들 수 있으니까”라는 즉답을 내놓았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으니까 한다. 이만큼 명쾌하고 올곧은 입장도 없을 것이다. 신작 <블랙머니> 역시 감독의 이러한 태도를 닮았다. 거기에 반드시 하나를 덧붙여야 한다면 바로 ‘재미’다. 그저 필요를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라 쉽고 재미있고 친숙하게 오늘의 문제를 말하는 것. <블랙머니>가 지금 이 시점에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유의미한 대중영화가 될 수 있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영동1985> 이후 7년 만의 차기작이다.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고, 그 무렵 론스타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런저런 아이디어에 대한 제안은 항상 받는 편이다. 당시엔 내가 잘 모르는 경제 분야니까 관객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려면 나부터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다만 민감한 소재인 만큼 투자가 쉽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에, 제작위원회나 크라우드 펀딩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해왔다. 그러던 와중에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참여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수많은 사건 중 정재계가 연루된 수조원대 금융 스캔들인 론스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유가 무엇인가.
=조 단위의 금액이 오가는 만큼 피부에 와닿지 않는 문제다. 하지만 금융자본시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기득권 전문가들의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행태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망가트릴 수 있는지를 환기하고 싶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환상이 어떻게 학습되고 대중의 눈을 가리는지를 밝히고 싶다.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게 당연해지고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가치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부정은 참아줄 수 있다는 대중의 침묵. 신자유주의가 퍼트린 위선을 공론화하는 데 이만한 사례도 없다고 본다.
-문제를 파헤치는 역할을 맡은 가상의 캐릭터가 양민혁 검사(조진웅)다. 최근 검찰 개혁 요구와 맞물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했다. 모티브를 빌려왔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존재가 취재하는 기자가 될 수도 있고, 수사하는 검사가 될 수도 있다. 주인공이 결정되면 주요 뼈대가 얼추 정해지는 거라 신중하게 고민했다. 최우선 기준은 관객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최종적으로 경제를 모르는 일반 검사가 우연히 이 사건을 알게 되고 추적하는 구조를 선택했다. 검사가 경제에 관련된 지식들을 습득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관객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지금 검찰 개혁과 같은 사안으로 확장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다. 검찰의 구조적인 문제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안검사, 정치검사 시절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충성해왔다. 최근의 사태들은 그 해묵은 적폐가 공교롭게 수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게 현 시점에서 가장 심각한 비극이다.
-영화를 통한 사회변혁을 믿는 건가.
=영화로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함께 고민하고 싶을 따름이다. 내 고민과 걱정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다. 예술성을 추구해 나 혼자만의 세계로 파고들고 싶진 않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대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나의 영화적 상상은 모두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싫어할 수 있다. 현실도 팍팍한데 영화에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하다. 이해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가 믿는 건 메시지와 즐거움,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