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동백꽃 필 무렵②] 여성들의 집단성장서사로 읽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2019-11-14
글 : 권김현영 (여성학자)
여성, 잘 살고 있습니다

동백(공효진)은 외지인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지방 소도시 옹산에 아무 연고 없이 온다. 남편 없는 젊은 여자가 갓난아이를 안고 온 것만으로도 입방아에 오를 일인데 창문 없는 가게를 얻어 ‘까멜리아’라는 이름의 밥집 겸 술집을 차렸다. 지역 주민 여성들은 경계한다. 혹자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이 이 드라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며 동백을 괴롭히는 여성들의 폭력에 대해 드라마가 무감하게 군다고 비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가부장제는 여자를 서로의 경쟁자로 생각하게 하는 체제다. 남자들이 여자를 선별하고 선택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여자들이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언제나 여자들이 피부양자였던 것도 아니다. 옹산의 여자들은 자력갱생은 물론 가족을 책임지는 생계부양자들로 나온다. 이들은 남자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단속’한다. 그래서 까멜리아는 옹산의 게장골목 여성 중심 유사친족경제공동체의 촘촘한 네트워크 바깥에서 유일하게 지역 주민 남자들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숨쉴 구멍이 된다. 눈엣가시가 될 만도 하다. 중요한 건 여자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에 있지 않다. 만약 그 반목이 납작한 전형성 속에 있지 않고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 안에서 설명되기만 한다면 동백이 즐겨쓰는 표현처럼 “대츠 오케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 반목 상태에서 드라마의 서사가 멈춰 있지않다는 데 있다.

동백이 겪는 고난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직업여성’일지도 모른다는 문화적 낙인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도 없고 남편도 없는 여성이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겪는 ‘비혼모’의 경제적 고난이다. 동백이 직업여성이 되지 않고도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있는 건 창문 없는 까멜리아를 낮은 임대료로 빌려준 건물주 노규태(오정세)와 텃세를 막아준 곽덕순(고두심) 덕분이다. 하지만 이들이 동백의 구원자인 것은 아니다. 이들의 호의란 언제든지 거둬질 수 있는 불안정한 것. 동백이 변덕스러운 선의의 세계와 일상적인 악의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타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냥 가만히만 있는 건 아니다. 옹산 지역 주민들은 동백을 동네에서 왕따시키기도 하고, 땅콩 서비스를 요구하며 갑질을 하거나 때로는 성희롱까지 한다. 동백은 이 모든 일을 ‘치부책’에 써두고 필요한 순간에 꺼내든다. 동백에게 치부책이 있다고 알려지자 그동안 동백을 경계하던 여성들은 내심 환영하고 남편과의 불륜을 의심하던 변호사 홍자영(염혜란)은 동백을 돕겠다고 자처한다. 이 드라마는 이렇게 여자들 사이의 경쟁적 긴장관계와 적대적 마음이 어떻게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고 연대하고 연민하는 상호성으로 변해가는지를 공들여 보여준다. 그리하여 드라마의 핵심 갈등은 용식(강하늘)과 동백이 서로를 마음에 품는 과정에서의 밀고 당기기도 아니고, 알고 보면 유명 프로야구선수가 아이의 친아버지였던 것도 아니며, 심지어 연쇄살인범이 드리운 그림자도 아니다. 이 드라마의 중심서사는 등장하는 여성들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어떻게 거두는지에 맞춰져 있다.

까멜리아라는 사이공간을 통해 드러난 ‘열외’의 삶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바로 까멜리아. 단정한 한글 간판으로 바뀌기 전 까멜리아의 간판은 정확히 ‘맥양집’ 간판의 외양을 빼닮았다. ‘맥양집’이란 주택가 깊숙이 있는 성매매업소를 지칭하는데, 보통 HY크리스탈M체 꽃이름을 가게 이름으로 새기고 맥주, 양주를 메뉴로 내걸며 창문이 없고 동네에서 가장 허름한 지역에 군락지어 있다. 말하자면 까멜리아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서도 제대로 재현된 적이 없던 ‘맥양집’을 공중파적으로 순치시킨 공간이다. 이 순치는 봉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워진 이들의 서사적 공간을 재창출해, 말해질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예컨대 향미(손담비) 말이다(향미라는 이름을 쓰자마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나는 향미의 귀환을 기다릴 것이다). 향미는 “동백이 걔 완전 민간인이야”라며 동백이 ‘직업여성’이 아니라는 걸을 증명해주는 인물이자, 하층민 여성이 흔히 겪어온 기구한 사연들을 응축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초반에 향미를 트랜스젠더로 추리하는 시청자들이 꽤 있었다. 코펜하겐이 마침 최초의 성전환 수술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백이와 초등학교 동창이었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등이 그러한 추리에 그럴듯한 살을 붙여갔다. 향미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고 어딜 가나 열외로 취급되는 처지라는 점에서 눈에 보이는 것마저 허용되지 않는 소수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에서 향미 같은 인물은 동일한 하층민 여성으로서 경제적 곤궁을 겪었지만 성판매는 하지 않은 동백의 결정이 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향미의 실종 24시간 전으로 되돌아가 한회차의 이야기가 오롯이 향미의 서사로 채워져 흘러가고 난 다음의 향미는 더이상 시청자들에게 열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가진 한, 설령 끝내 향미가 돌아오지 않는다 한들 이 드라마의 미덕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여성들이 언제나 연쇄살인범들의 제일의 표적이었다는 점이 이 서사의 리얼리티를 보증해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인물들이 종종 관습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대부분 아주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관습적으로 반복하는 편견에 대해 도리어 질문하는 힘을 준다. 볼 때마다 새롭게 감탄하게 되는 이유다. 곽덕순 회장님을 보라. 아이 아빠를 불의의 사고로 순식간에 잃어버린 만삭의 임신부 앞에서 박수무당은 남편 잡아먹는 팔자를 기어이 운운했다. 하지만 우리 회장님은 그 순간에도 천재적인 추리 솜씨로 “너 내 남편 아니지, 왜 사투리를 쓰냐. 내 남편은 평생 그 지역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며 사기행각을 밝혀낸다. 이렇게 팔자 세다는 말에 순응하지 않고 강건히 자기 팔자를 스스로 개척해오며 아들 셋을 키워내온 분이니 이유 없는 손가락질을 받아온 동백이를 챙기는 마음은 결코 섣부른 동정 같은게 아니라, ‘찐’이다. 하지만 어미로서의 마음과 비슷한 입장에 처했던 동병상련 여성의 삶에 대한 마음은 종종 겹쳐지다가도 제 아들 다쳤다는 소리에는 번번이 쟁그랑 갈라진다. 아마 동백이도 그러할 것이다. 서로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끌어안을 수만은 없는 처지. 아들을 지키는 어미면서 버림받은 딸인 동백이와 아들을 지키는 어미면서 남편 잃은 아내인 회장님 사이는 어디서 멈춰지고 맞춰질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 작가에게 적당히 그러려니 하고 관습적으로 넘어가는 ‘그냥’은 없다. 끝이 기다려지는 드라마를 오랜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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