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시네마란 무엇인가. 마틴 스코시즈가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다”라며 이견을 제기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그 이유가 궁금해졌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장문의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마틴 스코시즈의 차기작 <아이리시맨>의 운명도 바뀌었다. <아이리시맨>은 그저 한편의 신작이 아니라 시네마의 형태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아이리시맨>을 보며 스코시즈가 언급한 시네마의 조건, “한 예술가의 독창적인 비전”을 떠올리며 비교하고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마치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정답 같은 건 없다. 그저 마틴 스코시즈의 신작이 있을 따름이다. 한편으론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목격하는 시네마의 어떤 종착지라고 봐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 그냥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 바꿔 말해 마틴 스코시즈가 이제껏 쌓아온 영화적 경험치의 총합. 60,70년대 히치콕 영화에 열광하던 세대가 새뮤얼 풀러, 잉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돈 시겔과 함께한 후 지금까지 살아남은 뒤 내놓은 결과물. 현재로선 그거면 충분하다.
사실 예술가의 ‘독창적인 비전’이라는 말은 교묘하게 들린다. 스코시즈는 마블 영화로 대표되는 프렌차이즈의 공정과 예술가의 작업 사이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로 모방할 수 없는 감각을 꼽았다. 그것은 각자의 체험을 통해 쌓은 결과물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소화한 후 토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스코시즈는 마블 영화가 여러 사람의 공통 작업을 통한 이야기의 가공이라고 선을 그었다. 반면 시네마는 설사 그것이 모두의 이야기일지라도 각자 다른 방식과 언어로 표현하는 매체라고 말한다. 스코시즈는 그것을 ‘현존하는 용어로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부류의 경험을 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달리 말하면 각자의 체험 속에서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시네마는 “활동하는 사진과 음향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론의 경계를 확장”한다. 요컨대 자신만의 리듬과 호흡으로 어떤 오리지널리티를 창조해낸다. 물론 그건 단순한 스타일의 기계적인 확장과는 다르다.
마틴 스코시즈라는 시네마의 존재 방식에 관하여
여기서 시네마의 조건과 개념에 대해 논하기에는 지면이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개념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계와 형태를 달리하기 마련이기에 여기엔 수많은 말과 생각들의 충돌이 동원되어야한다. 다만 스코시즈가 던진 힌트를 바탕으로, 오늘날 시네마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이리시맨>은 그 좋은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아이리시맨>은 시네마인가. 여기서 확실히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이리시맨>이 스코시즈가(혹은 그를 따르는) 생각하는 시네마의 한 형태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앞선 스코시즈의 글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시네마란 언어 바깥에 있는 것들을 전달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 같다.
가령 우리는 ‘사과’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과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각자의 머릿속에 피어나는 맛, 색, 형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스코시즈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도 하고, 소설도 하고 있고, 심지어 마블 영화도 하는 것이다. 아니, 마블 영화는 일대일로 정확히 도달하는 이야기의 평균값을 내는 작업이다. 반면 스코시즈가 <아이리시맨>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 바깥의 감각들이다. 동시에 그것은 각자에게 있어 일회적인 체험으로 연결된다. <아이리시맨>은 어떤 이야기인가. 2차대전 참전용사 출신인 아이리시 남자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미국의 이탈리아 마피아의 히트맨이 되어 활동해온 60년 세월을 풀어낸 이야기다. 찰스 브랜트의 논픽션 <아이 허드 유 페인트 하우시스>를 원작으로 한 <아이리시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 중 하나인 전미운수노조 노조위원장 지미 호파의 실종 사건을 다루고 있다. 스티븐 제일리언은 각색을 맡아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조직의 히트맨의 삶을 교차시킨 끝에 장대한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209분에 달하는 서사를 이렇게 몇줄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와 완전히 다른 체험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와 인물관계를 설명하는 건 영화의 밑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다. 비유하자면 ‘사과’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 정도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축산유통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프랭크 시런은 이탈리아 마피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고기를 빼돌려 납품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조직의 권력자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의 눈에 띈 프랭크는 조직의 히트맨으로 발탁된다. 얼마 뒤 프랭크는 조직과 연결된 미국 최대 화물운송노조 ‘팀스터스’의 위원장 지미 호파(알 파치노)의 일을 돕기 위해 파견되고 그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노조의 간부가 된다. 하지만 케네디 정권과 각을 세우던 지미는 표적 수사를 받다가 구속되고 노조에서는 2인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지미는 출소 후 노조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판을 벌이지만 마피아는 이미 다루기 쉬운 2인자와 한편이 된 후다. 프랭크는 사이가 틀어진 조직과 지미 사이를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하지만 갈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다. 조직은 프랭크에게 지미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고 프랭크는 러셀과 지미 사이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실화를 통해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지미 호파는 실종되었고 이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병이나 사고, 노환으로 죽어버려서 진실을 알려줄 사람이 없다. <아이리시맨>은 프랭크의 입을 빌려 그 기억들을 재구성해나간다.
영화의 시작, 긴 병원 복도를 카메라가 훑고 지나간다. 사람을 한명씩 지나 복도를 돌고 마침내 늙고 초라한 한 남자에게 카메라가 당도하자 남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건네는가. 이야기의 화자가 누구인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다.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장면을 보여주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이리시맨>의 화자는 프랭크지만 이 모든 상황을 배치하고 순서를 결정하는 건 감독 마틴 스코시즈다. 이 당연한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가 바로 <아이리시맨>이다. ‘영화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라는 질문은 ‘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와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리시맨>은 세 가지 다른 시간 축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하나는 늙어서 양로원에 머무는 프랭크다. 늙은 프랭크는 이야기의 화자이자 기억하는 존재이며 긴 시간의 축적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결론부터 목격하며 이 이야기를 회고한다. 두 번째는 러셀과 러셀의 아내, 그리고 자신의 아내까지 4명이서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중년의 프랭크다. 중년의 프랭크는 4일간 고속도로를 달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끊임없이 지연시키고자 애쓴다. 마지막으로 중년의 프랭크가 다시 회상을 하며 플래시백으로 끼어드는 젊은 프랭크가 있다. 젊은 프랭크는 마피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시절부터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도로 위까지 지나온 시간을 재현하며 관객을 안내한다. 마피아의 히트맨으로 살아온 프랭크의 60년을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을 활용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롯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다선적인 서사구조는 <인셉션>(2010) 등 정교한 이야기 미로를 펼쳐낸 영화부터,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TV시리즈까지 수많은 장르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대개 이런 방식이 관객과의 게임을 즐기기 위한 기교나 미로를 설계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으로 활용되는 반면 <아이리시맨>의 겹겹이 쌓인 플래시백 구조는 목적이 다소 달라 보인다. 마틴 스코시즈가 중요시 하는 것은 플롯의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순서다. 정확히는 겹겹이 쌓아놓은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는가, 혹은 누가 무엇을 목격하는가의 문제다. 이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대신 현재화시킨다. <아이리시맨>의 각 장면들은 관객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과거가 된다. 만약 누군가가 이 차곡차곡 쌓이는 축적의 과정을 생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영화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209분이라는 방대한 상영시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예술적 허영심이나 이야기의 방대함 때문이 아니다. 이 축적의 과정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리시맨>이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한 호흡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랭크가 지나온 시간의 총합, 그리고 마틴 스코시즈의 현재
물론 관객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아이리시맨>을 멈춰 보고 끊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행위라고 해도 이 영화는 그런 관람 행위를 용납치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리시맨>은 시간에 대한 질문이며 그것은 한 호흡에 이뤄질 때라야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특정한 숏과 세트 피스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분리하는 순간 의미가 달라져버린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진다. 예컨대 프랭크가 지미 호파를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시퀀스에서 프랭크와 지미의 양아들 처키 오브라이언(제시 플레먼스), 그리고 다른 조직원을 태운 자동차가 같은 장소를 오가는 걸 여러 차례 보여준다. 꺾이는 길의 한쪽 끝에서 대각선의 부감으로 잡은 이 장면의 반복은 서사상으로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이 불안함의 축적과 반복이 있기에 프랭크의 고뇌와 허탈함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한 이 고전적인 연출을 고집하는건, 그게 바로 스코시즈가 영화를 감각하고 배워온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순서다. 아니 순서와 반복과 축적,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시선의 자리다. 프랭크 시런이 우리에게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 전달해주는가, 그 방식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떤 순서로 이 정보들을 받아들이는지가 <아이리시맨>을 시네마로서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다. 어떤 부분에서 빈칸을 채우고, 무엇을 목격하느냐. 왜 프랭크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이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는지, 어떤 살인들은 결과로만 제시되고 어떤 살인은 잔혹한 순간까지 모두 관람하도록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이 순서들은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209분에 달하는 <아이리시맨>의 상영시간은 일종의 비가역적 시간에 관한 체험인 셈이다. 확장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삶을 이야기로 바꿔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스코시즈가 말한 이야기와 다른 감각, 체험에 속하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아이리시맨>은 시간의 흐름, 늙음, 바뀔 수 없는 어떤 결과에 대한 스코시즈의 비전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비장미를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애상과 비애, 무상함을 건져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시네마의 존재방식을 마주한다. 마틴 스코시즈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의 시네마는 과거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들의 세대에서 체험해온 방식을 바탕으로,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시네마의 시간이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아이리시맨>에서 가장 냉혹한 것은 폭력이나 살인, 배신이 아니라 그저 또박또박 흘러가는 시간이다. 아무리 시간을 늦추고 지연시키려 해도 불가능하다. 영화 도처에 활자로 박히는 인물들의 죽음처럼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그에 이르는 시간을 지켜보는게 전부다. 영화는 재현과 회상, 플래시백을 통해 부지런히 그 작업을 반복하면서도 결국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요컨대 <아이리시맨>은 프랭크의 지나온 시간을 하나씩 현재화하는 영화인 동시에 마틴 스코시즈가 익혀온 영화에 대한 감각을 모아놓은, 스코시즈 영화사의 총합과도 같은 결과물이다.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영화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영토를 넓혀왔고, 3D(<휴고>(2011)) 등의 기술도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였으며, CG를 활용해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에게 젊음을 되돌려주었다. <아이리시맨>은 그런 시간을 겪어온 지금의 마틴 스코시즈이기에 허락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마틴 스코시즈의 시네마’ 안에서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존재한다(그리고 실패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영화는 시간을 박제시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다(그리고 실패했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시즈가 축적해온 경험들을 통해 관객의 뇌리 속에서 과거로 밀려나던 ‘시네마’라는 개념을 지금, 우리 눈앞까지 끌고 온다. 비록 거기에 놓인 것이 늙고 고단한 몸뚱아리뿐일지라도, 넷플릭스라는 아이러니한 플랫폼의 힘을 빌렸을지라도, 화자이자 수행자였으며 목격자인 프랭크는 운명 앞에서 눈 돌리지 않고 카메라 맞은편에 앉아 마지막까지 우리를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