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고향 거제도에 내려온다. 여름의 거제도 해변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즐비하고, 오랜만에 만난 소녀의 고향 친구는 그를 관광객처럼 대한다. 늙은 할머니의 밭일을 도와주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없던 소녀는 느닷없이 낚싯대를 사서 바다로 나간다. 제45회 서독제 본선경쟁에 진출한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간 승희가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상의 순간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다.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의 여름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연출의도가 말해주듯, 승희는 고된 서울 생활과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조금은 지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카메라는 별다른 사건의 묘사나 하다못해 인물간의 사소한 대화조차 포착하지 않고 그저 승희의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일거수일투족을 멀찌감치서 바라본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관객과 승희가 동시에 견뎌야 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주인공이 경험했을 정서적 여파가 서서히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전달된다. 그리하여 영화가 엔딩에 이르면 마음속 ‘좋아요’ 버튼을 꾹 누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7기인 오정석 감독은 극중 승희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졸업작품 제작지원에 시나리오가 선정되지 않아 학교의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혼자서라도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작품 구상을 위해 외갓집이 있는 거제도로 내려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오정석 감독에게는 제작비가 없었다. 그는 가족 찬스를 써 겨우 예산을 마련했다.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을 촬영했던 그가 이번에도 직접 촬영을 맡는 등 최소한의 스탭을 꾸렸다. 다른 배우들은 거제도 현지의 지인이나 거제도에서 활동하는 극단 배우를 섭외한 다음, 외갓집에서 다 같이 합숙 생활을 했다. 스탭들의 식사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다. “학교에서 제작지원은 해줄 수 없지만 최소한의 비용만 들어갈 구성안을 만들어놓으면 어떻게든 찍을 수 있지 않겠냐”라는 지도교수의 말과 함께 그는 “졸업작품이니 뭐든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거제로 향했다. 전체 촬영 회차는 9회차. 영화에 등장하는 승희 삼촌의 집은 그와 스탭의 숙소이기도 했다. 그는 마을회관을 선뜻 내어준 이장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촬영을 마친 배우와 스탭은 밤마다 모여 하루 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서로 풀어냈고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날 찍을 시나리오에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극증 승희가 겪게 되는 거의 유일한 사건이란 거제 청년과의 우연한 만남이다. 승희는 그와 만나면서 갑갑한 현실에 처한 이가 자신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실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객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생략을 수반한 롱테이크는 무기력한 청춘의 한 순간처럼 느리게 다가온다. “승희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공감을 형성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갖고 등장시킨 거제 청년은 오정석 감독이 단편 <출장>(2016)을 찍을 때 알아둔 김록경 배우에게 맡겼다. “감독과 배우 사이를 넘어” 서로 많은 자극과 조언을 받는 관계라고 한다.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한 김유라 배우는 “경북 사투리와 경남 사투리의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 있”으면서 또 자연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승희와 잘 어울리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왜 하필 승희의 ‘여름날’일까? “바캉스의 계절이지만 승희에게는 차갑고 쓸쓸하게” 느껴지길 바랐던 오정석 감독은 그 자신이 꿰뚫고 있었던 거제도의 공간과 쓸쓸한 여름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또 인물들이 어색하게 겉돌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공간과 인물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며 배우들을 자유롭게 놔두는 방식도 고민했다. <여름날>의 소규모 제작방식이 자신에게 잘 맞았는지, 오정석 감독은 “시나리오를 열어둔 채로 소규모 스탭과 찍기 시작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일들이 영화에 스며들 수 있는 초저예산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허진호 감독의 멜로드라마에 푹 빠져 산 적도 있다는 그는 “아직 받아보지 못한 제작지원이라는 것을 위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다음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좀더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 거제도의 뜨거웠던 여름날이 극중 승희의 홀로서기를 응원했듯 <여름날>을 보고 나온 관객은 자연스레 오정석 감독의 다음 작업을 응원하게 될 것 같다.
●시놉시스
승희(김유라)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엄마의 빈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 거제도로 내려온다. 삼촌 내외는 갑작스레 눌러앉은 그녀를 마뜩하지 않게 생각하고 노쇠한 할머니는 여윈 몸을 이끌고 농사일을 이어간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승희는 마을을 서성이며 생애 가장 혼란스러운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롱테이크
오정석 감독은 <여름날>에서 관객과 인물이 함께 시간을 견뎌나간다는 의미를 담은 롱테이크를 자주 사용했다. “일반적인 영화문법에서는 카메라가 인물 가까이에 다가가 감정을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여름날>은 설명하지 않는 영화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뭔가 구차해 보이더라.” 관객이 승희와 승희의 공간을 오롯이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은 <여름날>의 미덕 중 하나다. 감독은 자신이 직접 촬영한 롱테이크가 반복적이며 무의미한 신이 되지 않도록 편집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극중 승희의 평범한 시간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승희를 더 응원하게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