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10년대 최고의 한국영화들④] 감독으로 읽는 2010년대 한국영화의 흐름
2020-03-12
글 : 송경원
그들의 상상력과 도전정신에 경의를
<위로공단>

2018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 뱅상 말로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작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2010년 이후 데뷔한 한국 영화감독 중 자신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2000년부터 화산이 분출하듯이 한국에서 새로운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2007년 이후 갑자기 활동을 정지했다”고 평했다. 물론 이건 해외 한 평론가의 견해일 뿐 진실은 아니다. 우리는 2010년 이후에도 왕성히 활동한 감독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동시에 해외에 널리 알려질 만큼 도드라진 영화를 만든 데뷔감독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안이하게 받아들였던,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의 한 자락을 외부에서 두드려 깨워주었을 때 새삼 2010년대 한국영화의 어떤 흐름을 자각한다.

<씨네21> 1237호 기획 기사 ‘2019년 한국 상업영화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 에서 한국영화의 경향을 진단하며 감독의 영역이 점차 소멸해가는 상태를 지적한 바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지속된 환경에 따른 ‘현상’이다. 상업기획영화에서 감독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본이 커질수록 의사결정 과정이 늘어나고 이른바 ‘평균’을 맞춰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2000년대 한국영화에는 작가의 개성과 산업의 안정성이 공존하는 지대가 분명 존재했다. 다시 뱅상 말로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장 봉준호만 봐도 알 수 있듯 2007년 이전의 한국영화들은 장르의 상업적 요소와 작가주의라는 상충되는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결과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좀더 정확히는 2007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에서는 점차 장르와 예술 사이에 두터운 장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신인감독일수록 이 장벽을 넘거나 돌파하는 일은 어려운 법이며 이는 자연스레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모험이 축소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끝까지 간다>

장르영화와 예술영화의 분리가 본격화되고

이야기에 앞서 2007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간단히 짚을 필요가 있다. 요약하자면 기존의 제작사 중심 시스템에서 투자•배급사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재편이 된 시기의 출발이 바로 2007년이다. 산업 전반의 불황을 겪으면서 시스템을 간략하게 정돈할 필요가 제기됐고 투자•배급사들이 직접 감독과 접촉하면서 그동안 제작을 담당해온 제작사들이 뒤로 밀려나게 된다. 산업의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단순하게 접근하면 콘텐츠의 기획, 생산자들이 주체가 되었던 그간의 환경이 변화한 것이다. 다소 과격하게 보자면 제작사들은 대형 배급사들의 프로덕션 대행을 맡는 형식으로 점차 재편되었으며, 투자•배급사는 직접 기획까지 맡으며 덩치를 늘려나갔다. 일련의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단순화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감독의 편집권과 재량권이 위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끝내 기획 장르영화와 예술영화를 견고하게 분리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그에 따라 감독들 각자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감독들 앞에 놓인 선택지 중 하나는 작가의 개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자신만의 색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영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치로 내거는 독립영화의 영역인데, 달라진 건 이전까진 상업영화 진영에 있던 중견감독들까지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제작사 혹은 힘 있는 프로듀서가 창작의 자유를 위한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면 달라진 환경에서는 거꾸로 스튜디오가 제시하는 틀에 몸을 맞춰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그것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독립하여 제작을 꾸릴 수밖에 없다. 이 모델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홍상수 감독이다. 홍상수 감독은 제작사를 직접 꾸려 평균 5만 관객, 최대 10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영화를 꾸준히 연출했다. 이는 다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과 시장을 스스로 확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모델은 이미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진 홍상수라는 특수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누군가가 제2의 홍상수가 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10년 이후 홍상수 감독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기에 있으며 반대로 이른바 ‘작가’로 인식되는 감독 중 결국 홍상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연출자의 비전이나 역량 이전에 시스템 재편의 결과인 셈이다.

다른 길은 스튜디오에 편입하여 시스템이 요구하는 평균의 상업영화에 몸을 맞추는 것이다. 그나마 2000년 후반에 데뷔한 감독들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도 독특한 결과물들을 뽑아내기도 한다. 2010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나 2013년 개봉한 <베를린>, 2010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기대치와 장르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본인의 색깔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쉽지만 그 밖의 한국영화 중에서 감독의 이름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2014년 개봉한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는 데뷔작의 실패(<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2006))를 딛고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도 수준 높은 즐거움을 뽑아낼 수 있음을 증명한 차기작이었고, 2015년 이경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밀은 없다>는 대형 배급사에서 기획된 영화로는 드물게 ‘제멋대로’ 만든 작품이었다.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독의 마음이 가는 대로 과감하게 표현해낸 불균질함, 그것이야말로 작가성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2010년 이후 한국영화에서 그나마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몇 안되는 감독들은 한결같이 이와 같은 ‘자신의 멋’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낸 이들이다.

한편 스튜디오 시스템의 정착으로 인해 피해를 본 건 상업영화쪽만이 아니다. 독립영화 역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다름 아닌 시장의 재편과 경쟁 체제 때문이었다. 상업영화 중심의 배급 시스템이 자리 잡은 뒤 ‘다양성 영화’라는 정체불명의 울타리 안에 내던져진 모든 영화들이 각자도생의 경쟁에 내몰렸다. 그 결과 기존의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취지는 사라지고 저예산영화 혹은 상업영화 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예비군처럼 재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감독의 개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실험과 도전은 갈수록 희귀해지고 그저 예산이 작고 만듦새가 조악한 아마추어 같은 영화들이 양산되면서 독립영화 진영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시장은 갈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송곳처럼 돌출된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사라지는 사이 관객의 인식에서도 점점 멀어져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산업의 압박 속에서도 빛난

그럼에도 결국 희망의 싹은 감독들, 정확히는 창작자들로부터 다시 피어난다.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맡은 이장호 감독은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가 단절의 반복이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 젊은 감독들이 시대마다 끈질기게 튀어나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존 감독들 역시 꾸준히 버티며 제 몫을 다했다. 홍상수는 매해 영화를 만들었고, 이창동은 2010년 <시>로 문을 연 후 2018년 <버닝>으로 돌아왔으며, 박찬욱은 <아가씨>(2016)로 여전한 감각과 존재감을 증명했다. 이준익은 <평양성>(2010)에서 <소원>(2013), <사도>(2014), <동주>(2015)까지 크기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왔고 윤종빈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군도: 민란의 시대>(2013), <공작>(2017) 등 굵직한 영화들을 선보였다. 스튜디오와 산업의 압박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은 이들의 묵묵한 걸음이 일정 정도나마 후배감독들이 쉴 그늘을 만들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가 기억하고 격려하고 기대해야 할 것은 내몰린 외곽에서 제 몸을 깎아가며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젊은 감독들의 뚝심이다. 우리는 <이층의 악당>(2010)의 기발함, <무산일기>(2011)의 황폐함, <위로공단>(2015)의 치열함,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의 덧없음,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2017)의 도전정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의 역발상, <우리들>(2016)의 눈높이, <꿈의 제인>(2016)의 과감함, <소공녀>(2018)의 사려 깊은 시선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밖에 우리가 놓친 모든 영화적 상상력과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2020년에는 상업영화와 작가정신을 갈라놓은 두꺼운 벽이 허물어지길 희망해본다. 그것이 욕심이라면 작은 균열이 일어나 공존할 수 있는 좁은 자리라도 확보되길 소망한다. 이들의 행보가 이제 2020년 새롭게 영화의 영토를 넓혀갈 젊은 감독들의 그늘이 되어줄 것이라 믿으며.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