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 - 베일에 싸인 인물의 감정을 파헤치고 싶었다
2020-03-12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우민호 감독은 밀도 있는 화면으로 정서를 전달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자랑하는 연출자 중 한명이다. 반면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지 넘치는 화면과 정보 탓에 균형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했던 게 사실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런 의미에서 우민호의 도약이라 할 만하다. 비결은 선택과 집중. 캐릭터의 심리와 주어진 상황에 집중한 이야기는 정서적 공감대의 바탕이 된다. 동시에 영화는 실화와 픽션 사이 절묘한 거리감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서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여기 우민호 감독의 입을 빌려 묵직한 소재와 농밀한 연기, 꽉 짜인 연출이 만나기까지의 쉽지 않았던 과정을 전한다.

-동명의 논픽션을 영화화했다. 민감한 소재인데 언제나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군대에서 막 제대했을 때 친구 집에서 우연히 책 <남산의 부장들>을 봤다. 박정희 독재를 뒷받침했던 중앙정보부의 시작과 끝이 담긴 내용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진실을 전하겠다는 투철한 기자 정신이 문체 곳곳에 녹아 있었다. 당시엔 그저 영화학도였는데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꼭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내부자들>이 끝난 후 2016년 1월경 김충식 작가님에게 연락해 판권을 살 수 있었다. 꼼꼼한 취재와 역사적 사건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원작의 태도와 에너지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화는 물론이고 책과도 다소 차이가 있다.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바꾸었고, 오프닝에서 재구성한 이야기,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강조한다.

=처음엔 전부 다루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1, 2부로 나눠서 갈까 고민도 했지만 절제하기로 했다. 전부를 다룰 수 없다면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다루고 싶었고 10·26 사건 이전 40일을 기준으로 삼았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된 것이 박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과 불과 20여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여일 사이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충성이 어떻게 총성으로 바뀌었을까, 그게 궁금했다. 가능한 한 정치적 판단은 배제하고 그들의 과오를 평가하는 대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고자 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모델로 한 김규평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모델로 한 박용각을 동년배의 친구로 묘사했다.

=전직과 현직의 중앙정보부장, 두 사람이 한 인물인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 둘 다 한때 권력의 2인자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쓰임을 다하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극중 둘 다 구두 한짝을 잃어버리는 건 그런 의미에서 배치한 상징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인 셈이다. 기왕에 누아르라는 장르적 틀을 빌려온 만큼 선후배보다는 친구로 그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김규평과 박 대통령을 통해 육사 선후배의 뉘앙스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겹치는 걸 피하고 싶기도 했다. 역사적 사건 이면에 인간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어느 정도의 각색은 필수적이었다. <내부자들>도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기사 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헤치는 영화였고, <마약왕>도 황폐해져가는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영화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역사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시에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파헤치는 영화다.

-박통이란 권력자의 총애를 얻으려는 2인자들의 충성 경쟁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극중 대사에 나오듯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행태는 갱들의 행동원리를 닮았다. 수컷들의 아우성이랄까. 1인자를 철저히 따르면서도 서로 믿지 않는다.

=누아르나 갱스터물을 연상시키는 건 이들의 심리 상태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신시대의 군인들은 결국 폭력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 집단이니까. 큰 사건들, 건드릴 수 없는 사실들을 그대로 가져오되 극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상상력을 더해 각색했다. 가령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같은 유명한 대사는 앞으로 당겨오고 김규평이 박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순간에는 다른 대사를 썼다. 리얼리티 측면도 고려했지만 결국 그게 인물을, 그리고 당시의 감정을 정확히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크레딧을 제외한 총상영시간이 110분 안쪽이다. <내부자들> <마약왕>과 비교하면 편집이 속도감 있고 조밀하다. 미술, 촬영, 음악까지 전반적으로 절제된 연출이 돋보인다.

=<마약왕> 덕분이다. <마약왕> 때 인물의 심연으로 깊게 들어가고, 완전히 드러내고,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찍어봤는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았으니. (웃음) 이번엔 정반대로 가보고자 했다. 인물들의 사연이나 사건의 행간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짐작할 수 있도록 장면마다 호흡에 좀더 신경을 기울였다. 관객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 설명해놓고 보니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마약왕>의 경험을 거울 삼아 불안을 극복했다. (웃음) 대신 시대 재현의 디테일은 최대한 살리려 했다. 솔직히 <마약왕> 때보다 더 노력했다. 예를 들면 색을 구현하려고 애썼는데 하얀 와이셔츠도 그냥 하얀색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하얀색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후반에 색보정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촬영, 미술 단계부터 그걸 완벽하게 갖추고 싶었다. 일종의 강박이랄까. 생각해보면 <마약왕> 땐 나도 흥에 취해 신나게 했는데, <남산의 부장들> 땐 신경쇠약에 걸린 인물들처럼 예민하게 촬영했다. 영화를 닮아가나보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힘 싸움은 격리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대결처럼 보인다. 권력자의 선택이 시대와 민중에 미치는 영향은 최대한 배제하고 청와대, 중앙정보부로 무대를 제한시켰다.

=처음부터 세운 컨셉이었다. 70년대를 재현하고 시대의 공기를 느끼게 하고 싶었는데 한정된 예산으로 모든 걸 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메인 공간을 실내로 제한했다. 그런데 진행하다보니 영화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거다. 청와대,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로 무대를 제한했는데 실제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작 진짜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과의 거리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한 측면도 있었다. 그걸 문득 깨달은 순간 섬뜩해졌다. 궁정동안가의 마지막 시퀀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실내 공간은 어두운 톤을 유지했는데, 실제로 박 대통령이 어두운 조명을 선호했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는 지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8년 독재 끝에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표정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이 인물의 심리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거다.

-그러고 보면 모든 등장인물이 권력이라는 높고 좁은 탑에 갇혀 부마항쟁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강경 진압을 주장할 때 김규평만이 유일하게 부산에 내려가 헬기 위에서 상황을 목격한다.

=박 대통령과 경호실장은 그런 김규평이 본 대로 이야기를 전해도 그걸 믿지 않는다. 그게 팩트인지는 상관없다. 이미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상황까지 다다른 거다. 실은 김규평 역시 헬기 위에서 부마사태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직접 내려가게 하고도 싶었지만 그건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웃음)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또 김규평과 실제 민중들의 거리를 표현해준 것 같다. 김규평 역시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멀리서 피상적으로 스치며 본 인물에 불과한 거다. 때론 제작여건과 제약이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이 영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때 그사람들>은 시대 자체를 조롱하는 블랙코미디이자 정치영화다. <남산의 부장들>은 세련되고 깔끔한 누아르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그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게 목적이다. 근현대사의 변곡점이라 해도 좋을 거대한 사건 뒤에 놓인 사람, 우리가 권력자라는 특별한 위치로 분리해놓은 사람들의 민낯을 보고 싶었다. 대의나 논리, 역사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된 흔들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과정이 나의 관심사였다. 그들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바꿔버린 순간 말이다. 여기에 구태여 어떤 설명을 보태고 싶진 않다. 보이는 대로 보고 각자의 반응들을 솔직하게 마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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