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원본과 사본’에 대한 주석
2020-05-13
글 : 오혜진 (문화연구자)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한 책 <다크룸>은 미국 페미니스트 수전 팔루디가 격조했던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이메일을 받으며 시작된다. 폭력적인 가부장 ‘이슈트반 팔루디’가 성전환수술을 받은 후 ‘스테파니 팔루디’로서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긴 설명 없이 오직 ‘사진’으로만 말하고자 했는데, 그건 평생 광고사진 촬영과 영화 제작을 해온 아버지에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책은 어린 시절 ‘깜깜한 방’에서 벌 받듯 자신의 내면 일부를 ‘어두운 벽장’에 가둬온 아버지가 ‘암실’에서 사진 편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거듭 변형·창안해온 이야기, 그럼에도 다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검은 공백들’을 메우려는 수전 팔루디의 이야기다.

‘원본과 사본’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챕터에서 스테파니는 자신의 거주지인 헝가리로 찾아온 수전에게 ‘정통’ 헝가리 민속문화를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사진들을 자기 생애사라며 보여주는 스테파니에게서는 “항상 무언가 수정하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스테파니에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유대인인 그녀는‘나치’로 위장해 자신의 부모를 학살로부터 구해냈고, 의료인들의 문서를 위조해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전자는 영웅담으로 회자됐지만, 후자는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다.

왜 어떤 ‘위장’은 환영받고 다른 것은 비난받을까. 스테파니가 나치로 가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결코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친척은 스테파니가 정말 ‘유대인처럼’ 생겼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패싱’, 즉 ‘사회적으로 그렇게 보이는가’가 ‘위장’의 기획을 결정하는 데 반드시 핵심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거짓말, 위장, 가장, 위조, 편집, 보정 등은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생존을 위해 신분증을 위조한 탈북민, 독립운동을 위해 남장한 여성 혁명가, 더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보정속옷을 입는 여자들…. 이중 어떤 것이 공익적·윤리적이며, 어떤 것이 사악하고 위험한지 확언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자기 연출에의 욕망이야말로 가장 ‘진정성 있는’ 욕망이라는 점, ‘자신을 사회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허구’로서의 ‘정체성’은 바로 그 욕망에 의해 언제든 새롭게 창안될 수 있는 역동적인 영역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중, 1964년에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자의 혀를 물었다는 이유로 ‘공식’ 역사에 56년간 가해자로 기록돼 있던 한 여성이 드디어 자신에 대한 서사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옆에는 노쇠한 전직 대통령이 온갖 구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광주에서의 ‘사살’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는 기사가 실렸다. 모든 서사가 그 자체로 변형 불가능한 ‘원본’ 으로서의 권위를 가지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서사화 시도에 함의된 의도와 맥락을 끈질기게 읽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