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개과천선은 없다.”(박주현) <인간수업>에 관한 정확한 설명이다. 후회 없이 불태운 뒤, 자기 캐릭터에 냉정을 유지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신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직접 성매매 알선 앱을 개발해 익명의 포주로 활동하는 고등학생 오지수(김동희)를 중심으로 <인간수업>에 모인 비행 청소년들의 면면은 ‘저 배우 누구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집안, 외모, 성적, 성격까지 모두 완벽한 ‘인싸’ 배규리(박주현)는 마치 손쉬운 일탈을 저지르듯 지수의 포주 활동에 가담하고, 고등학교 일진 서민희(정다빈)는 성매매로 용돈을 벌어 남자친구의 환심을 산다. 일짱 기태(남윤수)는 시시껄렁하게 학급 동료를 괴롭히거나 착취하는 데 익숙한 인물이다. 심은하, 고현정 등 90년대 스타들의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마스크의 박주현은 <인간수업>을 통해 기량과 잠재력을 한껏 증명했고, CF 스타의 이미지를 벗은 정다빈은 성인 연기자로서 첫 주연작을 알리며 고된 연기를 안정적으로 소화해냈다. 모델로 데뷔해 주로 로맨틱한 얼굴을 보여줬던 남윤수는 반전을 선보이며 배우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인간수업>을 통해 캐릭터의 윤리를 고민하고 사회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입을 모으는 세 배우들. 이 혹독한 배우수업이 그들 자신의 지평을 넓힌 것은 물론,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밀레니얼 배우의 명단을 풍성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한다. (극의 중심축인 오지수를 연기한 배우 김동희는 <씨네21> 1254호, 후아유 ‘관찰하고 싶은 얼굴’ 기사에서 미리 만났다.)
- <인간수업>은 신인 등용문으로서 특히 배우들에 눈길이 가는 작품이기도 한데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정다빈 3차 오디션까지 역할과 내용을 모르고 오디션장 안에서 대본을 받았다. 감독님과 제작진 앞에서 바로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해야 했는데 나를 기다리는 동안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분주히 잡담을 나누시는 거다. 긴장한 상태에 당황하기까지 해서 그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겨우 연기를 마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부러 배우들의 정신을 빼놓으려는 전략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마지막 감독님 미팅에서 김진민 감독님이 처음부터 민희 역에 나를 생각했다고 이야기하셨다. 주변에서는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아역 시절에 보여준 내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인간수업>을 통해 기존의 무언가를 깨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박주현 몸담고 있던 회사를 나와서 잠시 혼자 오디션을 다닐 때였다. 나도 다빈이와 비슷했는데, 오디션장에서 바로 대본을 읽게 시킨 뒤 제작진이 한참 스몰 토크를 나누시길래 나 혼자 의자를 돌려서 벽을 보고 앉아 읽었다. 각자가 편하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일동 웃음) 감독님이 “너처럼 한 애는 처음”이라고 황당해하셨다. 그런 모습이 털털하고 솔직한 규리와 닮아 보였을까?
남윤수 감독님이 캐릭터 설명을 하시면서 내게 “웃는 인상이지만 어딘가 나쁜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라고 하셨다. 사실 고등학교 일진 역할이라 망설임도 있었는데, 해볼 수 있겠냐는 감독님 질문에 무작정 잘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런 질문에 누가 못한다고 대답하나? (웃음) 당연히 잘해야지. 돌아가는 길에 곧바로 캐스팅 합격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무척 기뻤다.
- 청소년 성매매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고 표현 수위까지 높다. 각본을 읽고 첫인상은 어땠나.
박주현 읽는 내내 좋은 의미로 이 작품 정말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 모두가 위태로워 보였다. 준비하면서 나의 심리 상태도 불안정했던 것 같다. 규리는 겉으로 볼 땐 굉장히 강하다. 범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 없이 점점 더 일을 키우지만 사실 규리도 아직은 미숙하다. 어리기 때문에 흔들리는데 어리니까 그걸 또 잘 표현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정다빈 정말 강렬하더라. 내가 과연 이걸 잘할 수 있을까, 혹시 반감을 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좀 불편하더라도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이 10대를 둘러싼 사회문제를 더 가깝게 체감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남윤수 무섭다기보다 신선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10대 범죄에 무감해 보인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경각심을 줄 수 있겠다고 느꼈다.
- 연기하는 인물을 긍정하거나 응원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온전히 그들이 되어야 했다. 어떻게 접근했나.
정다빈 민희는 감정표현이 뚜렷하고 순간의 느낌에 충실한 친구다. 머리를 쓰는 규리와는 반대랄까. 남자친구 기태, 그리고 포주를 대신해 아이들을 관리하는 삼촌 왕철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민희가 외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연민이 느껴지진 않았으면 했다. ‘내 생각을 넣지 말자,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렇게 접근했다.
남윤수 요즘 고등학교 일진은 어떤지 취재와 상상력이 동시에 필요했다. 기태는 기본적으로 원하는 걸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매사에 두려움이 적고 여유 있는, 패기가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마냥 나쁘게, 평면적으로 표현되면 보는 분들의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을까 생각돼 캐릭터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감독님이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야 한다면서 내 해석을 믿어주셨다.
박주현 동의하지는 않지만 캐릭터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배우로서 어떻게든 공감을 하려고 노력했다. 잘 보면 규리는 자신이 하는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후회도 안 한다. 여느 일과 다를 바 없이 비즈니스로 대하고 자기만의 합리화가 명확하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속 염두에 뒀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신이 있다면, 규리가 감정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속이려 하는 장면이다. 원래는 규리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이용하는 설정인데, 막상 촬영이 들어가니 진심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거다. 이상적인 스승을 연기한 박혁권 선배님이 “지금이 기회야”라고 타이르는데, 다른 선택을 하기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격양됐다.
- 10대 범죄를 다룬 책, 다큐멘터리, 영화 등 참고한 레퍼런스가 있다면.
정다빈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더 현실적으로 연기하기 위해 참고 자료를 많이 찾아봤다. 내가 민희에 대해서 벽을 허물어야만 캐릭터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가 기억난다. 10대 여성들의 성매매 경험을 르포 형식으로 묶은 책인데 내가 모르는 세계를 배우며 충격도 받았다. EBS와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를 찾아서 봤고, 영화로는 10대 가출팸 이야기인 <박화영>(2018), 그리고 최민수 선배님이 추천한 <창>(1997)을 꼽을 수 있겠다.
박주현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리딩하는 시간이 큰 자산이 됐다. 리딩 겸 사회 이슈를 공부하고 토론했다. 나는 10대 범죄에 가담한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특히 많이 참고했다. <인간수업>을 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진 편이다.
- 기태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이지만, 오지수-배규리-서민희가 처한 청소년 성매매 범죄의 상황이 너무 심각한 나머지 되레 순해 보일 정도다.
남윤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예상치 못한 영향을 끼쳤다. 평소에 비속어를 잘 안 쓰는데 기태를 연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상에 욕이 붙더라. 습관처럼 되어버린 거다.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기태가 자칫 가볍게만 표현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수위가 높거나 대사가 센 경우, 인물이 왜 이런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을 되짚었다.
- 민희는 왕철과 경찰 해경(김여진) 등 어른들에게 그나마 도움을 받는 캐릭터인데 선배 배우들 앞에서 긴장도 컸겠다.
정다빈 정말 겁을 많이 먹고 무서웠다. 대본 리딩 때 청바지를 입었는데, 허벅지에서 땀이 너무 많이 나서 나중에 의자가 흥건해질 정도였다, 정말로. 첫 촬영날, 주현 언니에게 “어떡해요, 잘할 수 있을까요” 하소연하며 덜덜 떨었다. 특히 왕철과 교류하는 장면들을 찍을 땐 초반에 내가 너무 힘을 주고 연기해서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최민수 선배님은 끝까지 무서웠다. (일동 웃음) 선배님은 편하게 대해주셨는데 그냥 나 혼자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민희와 왕철의 관계가 아빠와 딸처럼 격의 없이 보였으면 해서 나도 일부러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현장에 출근하면 목소리를 한껏 높여서 “선배님~ 안녕하세요오!” 하고 달려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왕철에게 정을 붙여서 왕철이 죽었을 땐 새벽에 탈수증상이 올 정도로 휘청거리며 엉엉 울었다.
- 오지수를 향한 배규리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둘의 사랑은 끝내 불발된다.
박주현 시기별로 관계가 변한다고 느꼈다. 처음엔 자신이 절대 하지 못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 그다음엔 동질감, 그러고는 동정심으로 이어지는…. 남녀 사이에 언제 어떤 이유로 호감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감독님과 둘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어쩌면 규리는 지수에 대한 사랑을 자기 약점이라고 감지하고 일부러 더 숨기거나 제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 경제적 동기가 꽤 선명한 지수에 반해 규리가 범죄에 가담하는 이유는 훨씬 모호하다.
박주현 대본 초반엔 엘리트 교육 속에서 규리가 심하게 압박받는 구체적인 회상 장면들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다 없어졌다. 이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타당한 동기를 만들어주면 안된다는 게 <인간수업> 작가, 감독님의 생각이었다. 그런 정당성에서 놓이니 나도 연기하기가 편해지더라. 오히려 이 아이들의 나이대에 더 주목하게 됐다. 좋은 어른들이 이들을 이끌어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안전망이 부재하다는 것.
- 설정상 배우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는 순간이 많다. 고충은 없었는지, 현장의 적절한 보호가 있었는지 궁금한데.
박주현 규리 캐릭터 자체가 어려웠다. 규리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늘 숨기고 있는 인물이어서 나 역시 그 상태로 중심을 잡고 끝까지 가야 했다. 배우를 기다려주는 현장이었고 스케줄 자체는 빡빡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촬영 기간 동안 불면증을 겪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촬영을 가는 식이었다.
정다빈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웃음) 주현 언니와는 서로 고민을 나누면서 촬영 끝나고 둘이 화장실에서 끌어안고 운 적도 있다. 한편으론 연기할 때 집중해서 다 쏟아낸 작품이라 오히려 다른 현장과 비교해 덜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집에 돌아갈 때는 기진맥진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고 잠도 푹 잤다. 촬영 시간을 준수하고, 위험한 장면에선 매사 엄격히 주의하자는 분위기가 있어서 배우가 다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이 테이크를 많이 가는 걸 안 좋아하는데 그런 점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민희의 고통을 개인적으로 담아두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