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의 시작은 현재 시점,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 이진오의 상황에서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할아버지 이백만의 이야기로 시간이 쏜살같이 거슬러 올라간다. 여자 삼대라면 같은 성을 공유하기 거의 불가능한 한국에서,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이백만의 증손 이진오까지, 이씨 집안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려낸 이 소설이 왜 철도원 삼대를 내세웠을까. 그 연원에는 식민지 시대에 철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 문장들이 있다. “철도가 놓이면서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부역에 끌려나와 고생하고, 가족이나 친척이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열차 운행과 철도 공사를 끈질기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맘때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망하여 일어나게 된 의병들도 철도를 주요 공격의 목표로 삼곤 했다.” 하지만 철도원은 의병이 아니다. 철도원은 오히려 현실에 순응해 그 안에서 길을 찾고자 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열심과 성실은 가능성보다 한계를 설명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노조 활동가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이 소설은 이씨 집안 남자들의 100여년의 시간을 동일한 비중으로 나누어 그려내기보다 세 사람과 그들이 일하는 철도를 중심으로 해방부터 분단 즈음의 시기를 통과하는 노조 활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다시 말하기’ 하려는 듯하다.
<철도원 삼대> 중 가장 분량이 많고 생동감 넘치는 때는 이일철이 이야기의 전면에 나섰을 때다. 그야말로 역사책이 가르쳐주지 않는 한국의 근현대사다. 게다가 과거 한반도의 철도가 38선에서 멈추지 않아도 되던 시절, 만주까지 철도로 달릴 수 있던 시절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철도원을 포함한 노동 활동가들로, 한반도에서 어떻게 활동가들이 조직을 만들고 어떤 어려움을 딛고 투쟁했는지를 담았다. 그러니 고공농성장에서 이야기가 시작해야 했던 것이리라.
한국인의 삶
한국은 하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여기 일년이 다른 나라의 십년이라구 하지 않더냐. 여기 십년은 바깥의 백년 세월과도 같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들 수백살씩 먹은 게지.(5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