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도> 제작 서라벌영화공사 / 감독 김기영 / 상영시간 90분 / 제작연도 1955년
한국영화사에서 1950년대는, 전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60년대의 황금기를 향해 성장해간 도약과 부흥의 시기로 서술된다. 사극과 멜로드라마를 대표 장르로 내세운 한국영화가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하던 그때, 관객은 영화관으로 집결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상의 고단함을 씻어냈다. 한편 한국영화의 1950년대는 영화 스타일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시기로 인식된다. 어떤 내용을 영화에 담을 것인가의 문제, 즉 내러티브나 주제론적 고민만큼이나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하는 연출상의 방법론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영화는 해방 이전 직접 영향을 받았던 일본영화의 스타일이 잔존했던 동시에 오랫동안 이상적인 영화 모델로 상정해온 할리우드영화, 그리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유럽영화의 사조까지 여러 양식과 문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중이었다.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거장들의 1950년대
이같은 연출 방법론의 문제는, 1950년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감독들의 스타일적 지향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선배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연출 방식을 기본값으로 두고, 할리우드식 문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유럽 예술영화의 미학까지 실천해냈고, 이후 1960년대에는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해가게 된다. 예컨대 1952년 <악야>로 데뷔한 신상옥은 <지옥화>(1958)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에 와서야 액션과 멜로드라마라는 할리우드의 장르 화법을 자기 식으로 소화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영화들에는 유럽 예술영화의 정조를 덧붙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유현목 역시 연출 초기인 1950년대 중후반, 할리우드식 데쿠파주(영화적 시공간을 숏으로 구성하는 감독의 작업)를 실천하는 것에 열중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그의 1950년대 작품인 <그대와 영원히>(1958), <구름은 흘러도>(1959)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오발탄>(1961)에서 할리우드 갱스터 장르의 질감을 감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유현목의 치열한 스타일적 모색을 짐작게 한다. 한국영화사의 가장 독창적인 감독으로 공인된 김기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1950년대에 연출한 극영화 7편 중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 사운드 유실), 2회작 <양산도>(1955, 마지막 장면 유실), 3회작 <봉선화>(1956, 부분 보존) 단 세편이다. 각 필름은 크고 작은 문제로 불완전한 상태이긴 하지만, 데뷔 초기 김기영이 고전 할리우드 영화문법을 염두에 두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이후 김기영은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이 감지되는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 <슬픈 목가>(1960)로 이어지는 ‘범죄 집단 3부작’을 통해 전후의 사회적 이슈와 멜로드라마 장르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후, <하녀>(1960)와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를 변곡점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열어젖힌다. 김기영의 두 번째 연출작 <양산도>는 1950년대 작품 중 비교적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인데, 그의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본령과도 같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신분 구도와 동물적 본성이 빚어낸 비극
영화 <양산도>는 90분의 러닝타임을 정확히 삼등분한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 최고의 사냥꾼인 수동(조용수)은 옥랑(김삼화)과 태중 혼약한 사이인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던 김 진사의 아들 무령(박암)이 마을로 돌아와 옥랑을 탐한다. 옥랑을 겁탈하려는 무령과 격투한 수동이 김 진사에게 잡혀가 손가락을 잘리는 것까지 초반 30분에 할애된다. 수동 어머니(고선애)와 옥랑 아버지(김승호)는 들판에 냉수만 떠놓고 둘을 혼인시킨 뒤 서둘러 떠나보낸다. 열녀를 모신 사당에서 첫날밤을 보낸 수동과 옥랑은 무령이 보낸 하인들에게 붙잡히고, 그들은 절벽 아래로 수동을 떨어뜨린다. 옥랑 아버지는 수동이 죽었다는 옥랑의 말에 김 진사의 하인 점돌이를 죽이고, 딸과 같이 옥에 갇힌다. 수동을 찾아나선 수동 어머니가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던 수동을 발견하는 것까지가 2막에서 그려진다.
수동 어머니가 수레에 수동을 싣고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3막의 시작이다. 수동은 살아났지만, 옥랑은 아버지의 살인죄를 덮어주겠다는 말에 무령과의 혼인을 결심한다. 천둥, 번개가 치는 밤, 옥랑을 찾아간 수동은 다시 무령과 격투를 벌인다. 수동이 무령을 죽이려던 순간, 무령이 남편이라는 옥랑의 말에 그는 손을 멈춘다. 무령이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자 김 진사는 수동을 잡으러 나서지만, 이미 목을 매 세상을 떠난 후였다. 수동 어머니는 수동의 시체를 옥랑의 가마가 지나갈 언덕에 묻고, 혼인날 수동 어머니의 칼에 찔린 옥랑은 수동의 무덤까지 기어가 죽는다. 김기영 특유의 인장이 느껴지는 유실된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수동이 내려와 옥랑과 같이 하늘로 올라간다.”기술적 미숙함은 다소 눈에 띄지만, <양산도>는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 중에서 발군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 흘러나오는 3대 여류 명창 중 한명인 박초월의 판소리와 전통 가락은 화면의 리듬과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서양의 레코드판을 영화음악으로 무단 사용하던 시절이었음을 떠올린다면 대단한 성취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당패의 공연은 극중극으로 기능하며 영화 속 인물 구도를 압축해낸다. 연극적인 공간을 영화적으로 확장해내는 김기영 특유의 스타일 역시 주목해야 한다. 영화 초입, 환상적인 느낌의 깊은 산속에서 피리를 불던 수동이 토끼를 쫓아가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인물의 동선을 후경에서 전경으로 또 전경에서 후경으로 설계해 깊이를 만들어낸 화면은, 전통 가락과 완벽하게 합일하며 영화 전체의 미학적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김기영은 평양고보 시절부터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전 분야에 걸쳐 두각을 드러냈고, 1940년 졸업 후 일본 교토로 건너가 독학으로 연극과 영화를 공부하는 ‘문화방랑객’으로 살았다. 해방 후 경성대학 의학부에 진학해 이후 서울대 최초의 통합 연극반을 이끈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데뷔 초기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재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연극 연출 경험이 자산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얼핏 연극적인 무대로 보이는 인물 구도와 동선은, 화면의 깊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출 그리고 이와 연동된 카메라의 움직임이 정교하게 결합하며, 가장 경제적이면서 미학적으로도 효과적인 김기영 특유의 미장센으로 구축된다. 김기영 영화 세계의 장대한 서막인 것이다. 수동에게서 옥랑을 빼앗으려는 무령이 내뱉는 “사냥엔 먼저 쏘아 맞추는 놈이 비린 맛을 보는 거야” 같은 원초적인 대사도 김기영 고유의 세계관을 감지케 하며,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그리기 위해 노루, 닭 같은 동물을 프레임 속에 같이 배치하는 것도 이후 그의 영화가 나아갈 방향과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