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부력' 동남아시아 해상에 만연한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의 실체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
2020-06-23
글 : 송경원

수면 아래 잠긴 진실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바로 과정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 마트에 진열된 상품을 소비할 때 그 물건이 누군가의 부당한 처우와 착취의 산물은 아닌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때로 영화는 우리의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일들을 눈앞까지 끌어당겨 증명한다. <부력>은 동남아시아 해상에 만연한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의 실체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진실을 수면 위로 떠올리는 힘을 발휘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캄보디아에서 타이로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예선들이 난립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로드 라스젠 감독은 실제 인신매매로 팔려가 타이 해상에서 노예노동을 겪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노동현장을 고발한다.

캄보디아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14살 소년 차크라(삼 행)는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어릴 적부터 중노동에 시달린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현실에 지친 차크라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좇아 타이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브로커를 통해 공장에 취직하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이야기에 혹해 도착한 타이에서 차크라는 가족을 위해 건너온 유부남 케아(모니 로스)를 만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브로커에게 줄 돈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다른 공장으로 끌려가는데, 알고 보니 공장이 아닌 고기잡이배였다. 무자비한 선장 롬난(타나웃 카스로)이 지배하는 어선은 돈은커녕 제대로 된 음식과 휴식조차 주어지지 않는 지옥 같은 곳이다. 롬난은 말을 듣지 않는 노동자들을 마구 폭행하고 탈진한 노동자들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등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노동자들은 배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보이지 않는 경쟁을 시작하고 시간이 갈수록 육체는 물론 정신마저 황폐해져 간다.

<부력>은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유린의 현장을 그린다. 얼핏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이 어울릴 것 같은 이야기지만 로드 라스젠 감독은 의도적으로 장르적인 기법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영화는 대사를 줄이는 대신 육체노동의 고단함과 좁고 협소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분위기를 쌓아나간다.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표현하는 데도 공을 들이는데, 사건의 전모나 현장을 전부 보여주는 대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그리하여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인물들이 처음에는 괴로워하다가 점차 스스로 폭력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줌으로써 비인권적인 만행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부조리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렇다고 <부력>이 사회고발 문제를 그저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하는 건 아니다. 로드 라스젠 감독은 장르적인 미장센에 좀더 충실하지만 자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점에서 카메라를 숨고르기하고 거리를 둔다. 이 영화에서 드라마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고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낱낱이 보여주기보다 인물의 감정과 체험에 좀더 집중해 관객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이 비인권적이고 비현실적인 만행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일그러져가는지를 집중력 있게 그려내는 <부력>은 마침내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세계의 어두운 일면을 스크린 위로 끌어올린다. 단편에서 두각을 드러낸 로드 라스젠 감독은 장편 데뷔작에서 절제되면서도 선명한 고발영화를 완성했다.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 수상작.

CHECK POINT

살아 있는 연기

차크라 역을 맡은 삼 행은 연기 데뷔작인 <부력>을 통해 2019년 마카오국제영화제 최우수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캄보디아 어린이 보호단체 ‘그린 게코 프로젝트’(Green Gecko Project)에서 로드 라스젠 감독과 인연을 맺어 이번 작품에 출연한 삼 행은 “실제로 친구의 아버지가 어선에서 돌아가신 경험이 있다”며 다음 세대 아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밝혔다.

타이의 노예노동 문제

타이 수산업 종사자 중 절반가량이 미얀마,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이며 이들 중 상당수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부당한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배우들은 물론 실제 노예생활을 겪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배우와 엑스트라로 출연해 사실적인 묘사에 공을 들였다. 호주 개봉 당시 안전하고 윤리적인 어업 노동환경을 위한 #whocaughtmyfish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로드 라스젠 감독

로드 라스젠 감독은 일찌감치 검증된 실력파 감독이다. 단편

<타우 세루>(2013)로 2013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 청되었고, 차기작 <스웻>(2015)은 2015 멜버른국제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타이 어업실태를 다룬 기사를 접하고 충격을 받은 라스젠 감독은 실제 생존자들과 NGO단체를 만나 꼼꼼한 자료 조사를 한 뒤 직접 각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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