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대만 뉴웨이브를 추억하는 90년대생 신인 감독들 , 윤단비·신동민·김소형의 대화 ①
2020-09-17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감수성으로…

2019년 한국영화의 성취로 기억될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에드워드 양 영화에 비견하는 아름다운 순간들로 한국 독립영화에 성마른 시큰둥함을 표했던 이들의 허리조차 곧추세우게 만들었다. 신인감독의 출현과 함께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한국영화들이 그 영화적 내연을 보다 섬세하게 확장해가고 있다는 인상은 그로부터 멀지 않아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을 통해서도 증명됐다. 이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로 대상을 수상한 신동민 감독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최우수상과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의 낮과 밤>의 김소형 감독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씨네21>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가줄지어 한국 극장가에서 개봉하는 기현상과, 최근 1~2년 사이 영화제 수상작과 개봉작에서 90년대생 연출자가 두각을 드러내는 변화 속에 공교롭게도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극장의 미래를 염려하는 2020년의 서울에서, 1980년대의 타이베이를 추억하는 일에 윤단비·신동민·김소형 감독이 기꺼이 동참했다. 지면의 한계상 절반도 채 담지 못한 이 긴긴 대화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에 부치는 90년대생 한국 감독들의 연서이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다짐이다.

신동민 감독 | 용인대 영화영상학과 출신으로 어머니의 삶을 응시한 첫 장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 감독의 실제 어머니와 배우가 2인1역을 맡아 한 인물의 콜라주를 완성해나간다. 2020년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김소형 감독 | 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의 한일 국제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인 할머니와 일본인 손녀의 만남을 그린 영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가 2020년 미쟝센단편영화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최우수상을, 일하는 시간대가 달라 좀처럼 교류할 수 없는 젊은 연인의 동거를 담은 <우리의 낮과 밤>이 심사위원특별상과 연기상을 수상했다.

윤단비 감독 |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할아버지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어린 남매의 한때를 담은 <남매의 여름밤>을 만들었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2020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밝은미래상,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등을 수상한 올해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8월 20일 극장 개봉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대만 뉴웨이브 감독을 한명씩 꼽아본다면. 1세대, 2세대 등 구분 짓지 말고 너르게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윤단비 허우샤오시엔도 좋아하지만 에드워드 양의 정서가 내게 더 잘 맞는다. 이야기를 좀더 세심한 구조로 건져올려서 현대적인 인상을 준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향수를 자아낸다면 에드워드 양은 현재를 보여준다는 인상이랄까.

신동민 차이밍량의 <너의 얼굴>을 정말 좋아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영화를 찍고 싶냐고 물어온다면 에드워드 양의 영화와 닮고 싶다고 대답할 것 같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마음이 담긴 영화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보고 있으면 영화가 나를 친구로 대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그 영화 속 인물 중 하나가 된 느낌이 든다. 차이밍량은 마음을 투영한다기보다 조금 더 떨어져서 관찰하는 사람, 실험하는 사람 같다.

김소형 나도 가장 좋아하는 건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다가는 종종 졸기도 하는데(웃음)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는 차마 쉽게 잠들 수가 없는 어떤 밀도가 있다. 어느 정도 관객과의 접점을 배려하는 측면, 이를테면 유머도 뛰어나다. 그중에서도 <하나 그리고 둘>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가 삶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싹틔우기 때문이다.

-대만 자국에서는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영화적 흐름이 왜 한국 영화학도들에게, 특히 그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90년대생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제각기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

윤단비 에드워드 양이나 허우샤오시엔뿐 아니라 오즈 야스지로, 지아장커처럼 자신만의 일관된 미학이 뚜렷한 감독들 위주로 작가성의 감각을 익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 자기만의 형식을 굳혀가고, 흐름을 만들고, 또 꾸준히 작업하는가에 대한 탐구였다.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란 이전까지 대만영화계를 채웠던 천편일률적인 선전영화나 오락영화의 산업적 흐름에서 벗어나 이를 위배하는 작업들이었다. 자서전적 서사, 담담하고 사실적인 묘사, 비전문 배우나 로케이션을 적극 활용하는 등의 면모가 산업으로부터 독립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또 최근의 한국영화계 상황에 대입하자면 평균 입봉 시점이 빨라져 감독들의 나이가 어려지면서, 내밀한 자기표현으로 관심사가 이동하다보니 대만 뉴웨이브를 향한 취향이 겹치는 것 같기도 하다.

김소형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은 당대 시대상 때문인지 변하는 것, 불확실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데, 그게 곧 나의 감정이자 내 친구들의 감정이라고 느꼈다. 또 한번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창동·고레에다 히로카즈·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대담을 보러 갔다. 너무나 동경하는 감독님들이기에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세분 다 어쩜 그렇게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던지…. (일동 웃음) 그때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직업 영화인으로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떻게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업하는지, 동시에 어떻게 자기 것을 지켜나가는지. 영화학도 입장에서 산업적인 이야기가 제대로 피부에 와닿았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쭉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인상 깊었다.

신동민 나는 동시대 차이밍량의 활동에서 큰 감흥을 받았다. <애정만세>를 접한 후 <하류> <구멍> <흔들리는 구름> 등 차이밍량의 영화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영화의 스펙트럼에 대한 생각을 넓힐 수 있었고, 그러다 2018년에 <너의 얼굴>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접하면서 얼굴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그동안 단순히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거리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 안에 실은 무척 많은 변수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달까. 차이밍량은 영화가 아니라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이토록 오래 관찰하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의 한가운데에 선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은 서민의 생활과 애환, 현대 도시인의 우울이나 불안 등을 살핀다. 어느 한 가족이나 개인을 통해 도시 개발이나 전쟁 같은 현대사의 격동을 감지시키기도 한다. 살 곳을 잃고 할아버지의 양옥집에서 잠시 여름을 보내는 아버지와 남매(<남매의 여름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홀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의 끈질긴 삶(<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일하느라 만나지 못하는 연인(<우리의 낮과 밤>) 등 세 감독의 영화에도 주제적으로 비슷한 결의 관심사가 느껴진다.

윤단비 사건이 아니라 가족 혹은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 미시적 풍경의 붕괴나 변화를 통해 사회를 드러내는 방식이 좋았다. 크고 작은 역사적 상황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줄 때 비로소 체감되는 것들이 있다.

김소형 영화 속 인물들은 결코 ‘내가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영화 바깥의 우리도 어떤 영향이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어렴풋하게 느끼며 살아가지 않나. 얼핏 보기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사실은 주어진 환경이나 역사의 한가운데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의 형국을 볼 때 마음이 동요한다.

신동민 나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흘러가는’ 사람들이라 좋아한다. 다들 한 자리에 충만하게 머물러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계속해서 떠다니는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 영화도 주인공이 어느 한곳에 있지 못하고 엄마를 찾으러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대만 뉴웨이브를 추억하는 90년대생 신인 감독들 , 윤단비 · 신동민 · 김소형의 대화 ②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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