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아성 -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 없었으면 했다”
2020-10-29
글 : 조현나
사진 : 오계옥

북적이는 출근길, 인파를 뚫고 당찬 걸음으로 자영(고아성)이 걸어나온다. 곧게 편 어깨와 살짝 띤 미소 사이로 배어나오는 자신감. 8년차 베테랑 사원인 자영은 삼진그룹의 공장이 무단으로 폐수를 방출하는 것을 목격한 후 발로 뛰며 회사의 비리를 탐문한다.

배우 고아성은 그런 자영이 “히어로보단 작고 작은 존재”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평소보다 용감하게 나설 때 자영의 의외성이 잘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모든 증거가 폐기된 때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지를 다잡고, “유 아 롱!”이라며 당당히 상대의 잘못을 꼬집는 순간마다 말단 사원인 자영은 그 누구보다 크고 단단한 존재로 다가온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적확한 말을 골라 인터뷰를 이어가던 배우 고아성에게서도 자영에게 보였던 올곧은 심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던데 어떤 책인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을 읽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데 요즘엔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서 틈날 때 조금씩 읽는다.

-표지 촬영 때의 밝고 당찬 모습들이 영화 속 자영과 겹쳐 보이더라. 실제 성격도 자영과 비슷한가.

=나는 좀더 내성적인 편이다. 그래서 영화 촬영 초반엔 가진 에너지를 전부 끌어올리느라 힘들기도 했다. 그런데 촬영이 다 끝난 뒤 지인들을 만나니 다들 나보고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 작품과 자영에게서 밝은 에너지를 받은 것 같다.

-많은 여성들과 연대하고 함께 대항하는 작품이라 에너지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선 전작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가 떠오르기도 한다.

=확실히 <항거> 때 배우들끼리 느낀 뜨끈한 연대가 있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여럿이 함께하는 영화고, 그런 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했는데 <항거>가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된 이야기이라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밖으로 표출되는 이야기란 거다. 분위기도 더 명랑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우리만의 맵시 있는 느낌을 가지려고 했다.

-맵시 있는 느낌이란 어떤 건가.

=사실 이종필 감독님의 표현인데, 나는 인물의 마음가짐과 태도 역시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말단 사원이지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의 태도 같은 것 말이다.

-듣고 보니 자영의 첫 등장이 생각난다. 당당히 인파를 헤치고 나와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에서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장면을 가장 먼저 촬영했는데, 나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나니까 그 이후의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가더라. 하지만 그렇게 호기롭게 출근을 한 자영이 하는 일은 사무실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지 않나. 그런 식으로 상반되는 장면들이 영화에 계속 등장한다. 내가 할 일은 그 순간들마다 생겨나는 리듬을 최대한 파악하고 잘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영을 준비할 때 90년대에 실제 대기업 사원이었던 이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모한테 직접적으로 뭘 묻기보단 당시의 이모에 대한 잔상과 사진들을 참고했다. 예전엔 작품을 준비할 때 상황이 비슷한 인물에게 심층적으로 물어보곤 했는데, 이제는 주로 내가 분석한 걸 토대로 인물을 만든다. 그만큼 나름의 자신이 생겼다. 자영도 그동안 내가 만난 정의롭고 진심을 다하고, 선한데 뻔하지 않은 이들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담아 만들었다.

-자영의 뻔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 없었으면 했다. 자영이 작고 작은 존재로 보여야 대기업에 당당히 맞설 때 자영의 입체감이 더 부각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자영이 히어로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에서 윤나영 순경이 사용한 80년대 서울 사투리도 화제였다. 자영도 그렇고 디테일한 말맛을 잘 살리는 것 같다.

=촬영 전부터 자영의 대사를 전부 녹음해 듣고 다녔다. <라이프 온 마스>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언젠가부터 언어를 나 나름대로 보완하는 재미가 생겼다. 시대극을 연달아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윤나영 순경은 80년대 특유의 수줍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차용했다면 자영은 90년대의 당당하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런 식으로 시대적 차이를 드러내고 그걸 연기로 표현하는 것들이 재밌다.

-<오피스>의 미례, <자체발광 오피스>의 호원 등, 오피스물에 연이어 참여했다. 자영은 앞의 작품들과 어떤 차이가 있다고 봤나.

=자영은 내가 연기한 직장인 중 가장 이타적이다. 가령 폐수 보고에 관한 공을 최동수 대리(조현철)에게 돌리면서도 그런 상황을 속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척 작은 존재지만 동시에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이면들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작업실을 시정방(시간과 정신의 방)이라고 부르더라. 이 시정방에선 주로 무엇을 하나.

=원래는 연기 연습을 하고 싶어서 만든 작업실인데 이제는 집중이 필요한 일을 전부 거기서 한다. 나의 최후의 보루가 된 느낌. (웃음) 한번은 작업실에서 새벽까지 책을 읽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아, 나중에 내가 이런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내게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올해가 가기 전, 서른이 되기 전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사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하는 것. 그거 말고는 딱히 바라는 일이 없다. 이 영화가 현재 당면한 내 삶의 전부라 그런가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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