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직원들의 출근길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그 장면이 비슷한 구도에서 변주되는 후반의 어떤 신을 같은 날, 첫 촬영때 찍었다. “눈빛부터 발걸음까지,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먼저 간 느낌이었다. 덕분에 이후 촬영에서 그 중간 과정도 방향을 잘 잡아 연기할 수 있었다.” 특히 박혜수가 연기하는 보람은 첫 촬영날 느꼈을 변화값이 가장 극적인 인물이다. 보람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친구들과 함께 페놀 유출 사건을 해결하는 수학 천재이면서, 무기력했던 그가 자신이 좋아했던 선배에게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한 단계 성장하는 독립적인 서사를 책임진다.
-포스터가 공개됐을 때 박혜수인지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 반응이 너무 뿌듯했다. (웃음) 실제 머리를 자른 건 지난해 9월쯤인데, 개봉하기 전까지 비주얼을 철저하게 숨기고 영화가 공개됐을 때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 청룡영화상 신인상 후보로 초청받았을 때도 가발을 썼다. 외적으로 강렬한 변신을 시도한 건 보람 캐릭터가 처음이다.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
-어떻게 보면 너드 캐릭터 계보에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걸음걸이나 손동작, 표정 같은 디테일을 많이 고민했다. 페놀 방류량을 계산할 때 주판 올리고 내리는 액션도 자연스럽고 빠르게, 실제 숫자에 맞게 연습했다. 아는 사람이 봤을 때 손동작이 틀리면 안되니까. 이런 너드 캐릭터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좋은 매력적인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허공에 붕 뜬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귀엽고 너드미도 있지만 현실감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 얘기 같다고 느껴 위로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보람에게 너드 같은 모습을 몇 퍼센트의 농도로 입혀야 하는가, 그런데 여성이 너드인 경우가 많지는 않더라. 레퍼런스로 찾아본 인물들이 대부분 남자였다. 아무래도 보람은 무성에 가까운 캐릭터 같다고 생각해서 소년 캐릭터를 위주로, 특히 <문라이즈 킹덤>의 샘 캐릭터를 제일 많이 참고했다.
-90년대 여상 출신 여직원과 <스윙키즈>의 양판례는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스윙키즈>의 판례가 살았던 한국전쟁 시대의 성차별이 훨씬 심했다. 판례가 더 강한 압박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면, 보람은 그 시기보다는 잔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을 겪는다.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할 때는 지금 모습처럼 주눅 들지는 않았을 텐데, 분노하기 보다 체념하고 포기한 상태가 됐다. 자영(고아성)이 페놀 유출 사건을 직접 해결하고 싶다고 할 때 보람은 적극적이었다기보다 그냥 친구가 하니까 끌려간 것이다. 그러다 이 일을 하며 자신이 진정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자기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고아성, 이솜과 한 숙소에서 모여 잘 만큼 가깝게 지낸 듯한데.
=내가 기대했던 게 100이라면 실제로 얻은 게 1000 정도다. 요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항상 운다. 완전 주책바가지다. (웃음) 일을 하며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언니들이 더 애틋하고 소중하다. 또래 여성이라 그런 것 같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도 언니들이 겪어봤을 아픔이고,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언니들 역시 해봤을 고민이다. 그런 부분에서 내가 얻는 위로가 너무 많다.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게, 현장에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고 나니 그 기운을 관객도 느끼는 것 같다. 영화 홍보 활동도 셋이 놀러다니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하니까 그 모습을 보고 영화가 궁금해졌다는 분들도 있었다. 2019~20년에 내가 얻은 게 있다면 언니들이다.
-국문과 출신이고, 지금도 시나 가사를 쓰는 것을 보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연기와 맞닿은 부분도 있나.
=예전에는 꿈이 많았다. 내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연기도 내가 남기는 기록 중 하나지만 음악이나 글쓰기쪽이 좀더 개인적이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글을 쓰고 싶다,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내가 쓴 글을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엄청난 무게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글은 계속 쓴다. 현장에 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날의 감흥을 일기로만 적는 게 아니라 시의 형태로 기록할 때도 있다. <K팝스타> 이후 연기를 하느라 마음 한켠에 숨겨두고 있던 노래에 대한 꿈도 다시 꾸고있다.
-드라마 <용팔이>로 배우 데뷔를 한 후 <청춘시대> <내성적인 보스> 등으로 빠르게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이후 행보를 보면, 신인배우들이 다양한 필모그래피로 노출 빈도를 높일 시기에 공백기가 있었다.
=시작할 때 엄청 바쁘게 휘몰아치듯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뚝, 끊기고 일을 쉰 적이 있다. 아마 회사에서 엄청 골치가 아팠을 거다. (웃음)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지는 많은 기회와 운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했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현장에 가도 자신감이 부족했고, 일을 쉬지 않고 하다보니 내 자신을 칭찬해줄 시간 없이 스스로를 다시 몰아세워야만 했는데, 어느 순간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진짜 아무것도 안 해봤다. 오늘은 밥 먹고 설거지만 해야지, 오늘은 책만 읽어야지. 그렇게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을 보냈다. 내 안에 쌓여 있던 찌꺼기가 빠져나가면서 마음에 디톡스가 되더라. 시기적으로는 더 많은 작품을 하며 나를 알리는 게 좋았을 수도 있다. 휴식 후 만난 작품은 온전히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작품을 천천히 만나면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연기에 대한 고민은 늘 어렵고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행복감이 더 커야 오래오래 연기할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다. 나에겐 옳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