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과장> 제작 후반기프로덕션 / 감독 이봉래 / 상영시간 105분 / 제작연도 1961년
1960년대 초반은 서민가정을 그린 홈드라마가 유행했던 시기다. 1960년의 <로맨스 빠빠>(감독 신상옥)를 시작으로 <박서방>(감독 강대진), 1961년의 <해바라기 가족>(감독 박성복), <마부>(감독 강대진), <삼등과장>(감독 이봉래), <돼지꿈>(감독 한형모), <서울의 지붕밑>(감독 이형표), 1962년의 <골목 안 풍경>(감독 박종호), <월급쟁이>(감독 이봉래), 1963년의 <로맨스 그레이>(감독 신상옥) 등이 그 대표작으로, 지금 우리가 온라인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로맨스 빠빠>와 <박서방>의 흥행 성공으로 연이어 만들어진 이 영화들은 크게 ‘가족 드라마’라고 불리지만 장르적 성분은 조금씩 다르다. 코미디가 강조되는 영화가 있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부각되기도 하며, 두 요소를 고루 사용하는 영화들도 있다. 당시 ‘홈드라마’나 ‘소시민 코미디’로 명명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들을 묶어내는 가장 큰 특징은 소시민 가정의 아버지 역으로 배우 김승호가 출연한다는 점이다. 박봉의 샐러리맨 가장을 연기하든 하층민 가족의 아버지를 연기하든 그의 연기는 무척 특별한 것이었다.
홈드라마의 주역, 김승호와 이봉래
일제강점기 연극배우로 출발한 김승호(1918~68)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통해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양산도>(감독 김기영, 1955)에서다. 옥랑 아버지로 분한 그의 연기는 이후 그가 스크린에서 구축해간 연기 세계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시집가는 날>(감독 이병일, 1956)의 맹진사 역으로 주목받은 그는 1950년대 후반 특유의 연기 스타일을 정립하며 연기파 배우의 가장 앞자리를 점했다. 보험회사 사원으로 분한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소시민 가정의 인자한 아버지상을 만들어냈지만, 곧바로 연기 생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임화수의 반공예술인단에 참가하는 등 정권에 협력했던 일로 4·19 직후 영화배우협회에서 제명당한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공백기를 보냈을 뿐 김승호는 그해 8월 <박서방> 촬영 현장으로 돌아왔다. 최은희, 황정순, 김진규 같은 다른 유명 배우들도 3·15 부정선거에서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영화계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의 아버지 연기가 이때 한국 영화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60년을 제외한 1959년, 1961년, 1962년, 한해 30편 이상 주연급으로 출연하는 대배우였다. 영화사가 김종원의 표현을 빌리면 1963년 스타 신성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김승호의 시대’였다. 그는 조각 같은 외모의 청춘스타가 아니었다. 40대에 빛을 발해 오로지 연기력으로 관객의 지지를 받았던 배우다. 성우의 목소리에 의존하던 후시녹음 시대,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의 목소리 녹음을 고집하던 몇 안되는 배우이기도 했다.
이 시기 가족 드라마 장르를 논할 때 또 하나의 특징은,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정변이라는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제작된 점이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영화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관에 의한 검열제가 폐지되고 민간이 주도하는 영화윤리위원회가 설립된 것도 주효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부의 검열이 재개되면서 가족 드라마의 체질 역시 미묘하게 바뀌게 된다. 1961년 5월4일에 개봉한 <삼등과장>은 4월 혁명의 세례를 오롯이 받은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를 제작한 후반기프로덕션 역시 <오발탄>을 만든 대한영화사처럼 4·19 직후 영화인들이 주도하는 제작 흐름 속에 만들어진 영화사다.
후반기프로덕션을 만든 이봉래(1922~98)는 1951년 ‘후반기’ 동인으로 참가하는 등 시인으로 먼저 활동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영화평론을 시작했고, 1957년 각색과 각본을 맡으며 제작 현장으로 들어와 1959년 <행복의 조건>으로 감독까지 데뷔한다. 초기작들은 후반기프로덕션을 통해 직접 제작했는데, 정치 스릴러 <백주의 암흑>(1960), <삼등과장>뿐만 아니라 <마이동풍>(1961), <견습부부>(1962) 같은 소시민의 삶을 그린 코미디에서 제작과 연출을 겸했다. 그는 페이소스와 유머를 빚어내는 독보적인 감각으로 1960년대 내내 꾸준히 활동했던 감독이다.
풍자를 동력으로 삼은 세련된 코미디
영화 <삼등과장>은 이 시기 다른 가족 드라마들처럼 한 서민 가정의 아침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운수회사 영업소 소장으로 일하는 구준택(김승호)은 아버지, 어머니(복혜숙) 그리고 부인(황정순), 아들 영구(박성대), 딸 영희(도금봉)와 함께 살고 있다. 딸 영희가 구준택의 본사에 취직해 출근하는 아침, 그는 영희에게 몸가짐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는 회사의 중년 남성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다. 첫날부터 영희는 아버지가 송 전무(김희갑)에게 야단맞는 자리에 동석하며 샐러리맨의 비애를 목도한다.
그날 밤 송 전무는 준택을 내연녀 명옥(윤인자)의 집으로 초대해, 영업소 2층에 그녀를 위한 불법 댄스교습소를 만들라고 시킨다. 덕분에 그는 과장으로 승진하지만, 송 전무 말마따나 과장치곤 삼등 과장인 후생과장 자리다. 송 전무는 내연녀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고 그의 부인(석금성)에게 명옥을 구 과장의 여자라는 핑계를 대고, 오해가 쌓인 준택의 부인은 송 전무의 부인과 함께 술을 먹고 명옥 집으로 쳐들어간다. 마침 송전무는 그 집에서 목욕 중이었고,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준택의 부인은 오해를 풀고, 후생과의 신입사원 오철(방수일)과 티격태격 로맨틱 코미디 플롯을 담당하던 영희 역시 그와 화해해, 가족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4·19 전후의 한국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사들이 등장할 때다. 이를 복혜숙이 연기하는 할머니와 황정순이 분한 이 여사(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시나리오상의 호칭), 두 여성이 주도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4·19 혁명도 별수 없구나”라는 할머니의 대사와 함께, 차압을 하겠다는 세무서 직원에게 촌지를 준 후(이른바 ‘사바사바’) “이러니 나라가 잘될 게 뭐야”라고 일갈하는것도 이 여사의 몫이다. 송 전무가 구준택을 나무라는 장면에서 “전무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 같은 이승만 정권을 직접 겨냥하는 대사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한편 1960년대 고전영화들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넘어 기록적 가치로도 확장된다. 영희와 오철이 말다툼을 하는 옥상 신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이 영화가 개봉된 (그리고 1999년 철거된) 을지로의 국도극장이다.
김승호의 샐러리맨 시리즈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지만, 월급쟁이의 애환은 더욱 깊어진다. <골목 안 풍경>과 <월급쟁이>에서 그는 강직한 성격의 샐러리맨으로 분해 회사의 횡령 비리 같은 더 깊숙한 이야기에 연루된다. 두 영화는 희극만큼이나 비극적 요소가 전면으로 부각되고 멜로드라마적 구성 역시 강조된다. 김승호가 분한 세금공무원 고 주사와 경리계장 박중달은 유언을 쓰고 자살까지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이봉래가 연출한 <월급쟁이>의 경우, 감독의 연출력은 훨씬 좋아졌지만 이상한 균열이 감지된다. 가족들이 다시 모인 해피엔딩에서, 제트기가 날아가고 창공에 애드벌룬이 떠 있는 인서트숏이 차례로 삽입되는 것이 그렇다. 새로운 세대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군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