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초입부터 일찌감치 한국영화 기대작으로 꼽혔던 <콜>이 코로나19와의 사투 끝에 넷플릭스로 향했다. 11월 27일 공개된 이충현 감독의 데뷔작 <콜>은 감독을 비롯해 배우 박신혜, 전종서가 이끄는 1990년대생의 영화이자 여자들의 과격한 스릴러로서 한국장르영화에 청량한 활력을 돋운다. 전화기를 매개로 연결된 두 여자가 1999년 세기말과 2019년의 우중충한 현재를 오가면서 서로의 삶을 주무르는 이야기 속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건 여성배우들의 역량이다. 박신혜가 특유의 차분함으로 드라마의 중심을 다진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종서는 시종 처음 보는 얼굴로 나타나 비릿한 피냄새를 풍긴다. 두 배우를 서포트하는 김성령, 이엘의 스릴러적 얼굴도 적재적소의 쓰임새로 만족스럽다. 이들 배우의 매력을 타넘어 <콜>이라는 집의 음산한 실내로 진입해봤다. 영화를 뒤덮고 있는 심리 스릴러적 주제와 미장센을 소개하는 리뷰와 함께 이충현 감독의 인터뷰를 더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9년의 서태지 팬에게 2019년의 여자가 흐뭇한 얼굴로 <울트라맨이야>유튜브 링크를 보낸다. “서태지가 2000년에 귀국해서 <울트라맨이야>를 발표할 거야.” 예지하는 자와 미래를 알게 된 자의 쾌감이 기분 좋게 안테나를 타고 흐른다. 자신의 시간대에서 각각 28살 동갑내기인 1972년생 영숙(전종서)과 1992년생 서연(박신혜)의 우정이 돈독해지는 방식이란 게 이렇다. 두 사람은 낡은 전화기를 매개로 20년을 사이에 두고 한집에 살고 있다는 기이한 사실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책략이 뛰어난 인간이라면 곧장 갖가지 모략을 구상할 법도 한데, 삶의 조건이 열악한 두 여자는 그저 침대맡에 앉아 여자 친구들간의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다. 이렇듯 난데없는 친밀함은 막 집을 보러 온 8살 서연과 그녀의 부모를 영숙이 대면하면서 이상한 균열로 이어진다. 얼마 못 가 화재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서연의 사연을 들은 영숙이, 서연의 옛집을 몰래 방문해 아버지를 살려낸 것이 결정적 도화선이다. 영숙의 가벼운 호의는 가부장의 생존이 불러온 나비효과를 거쳐 서연의 현재에 중대한 행복을 불러온다.
고통의 균형이 대칭을 이루던 두 사람의 시소가 영숙쪽으로 덜컥 추락한 순간, <콜>의 스릴은 본격적으로 불꽃을 틔운다. 불행의 유대만큼 강렬한 것이 없고 그것이 깨어졌을 때 유치한 배신감이 솟구친대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지만, 영숙이 택한 방법론이 살인이라는 점에서 <콜>은 연민이 아니라 공포를 부른다. “내게 미쳤다고 그래 모두 그래… 난 더 미치고 싶어… 미친 매니아들의 세상 밝은 미친 세상”을 노래하는 <울트라맨이야>는 서태지 이전에 영숙을 먼저 경유하며 연쇄살인마의 주제가로 변모한다.
게임의 규칙
<콜>의 도입부는 망설임이 없다. 방치된 옛집에 혼자 당도한 주인공 서연에게 낡은 집 전화가 울리고, “엄마가 나를 죽이려 한다”라는 여자의 외침이 들린다. 그날 밤 주택 2층 구석에서 못질을 하던 서연은 가벽임을 알아채고 호기롭게 벽 전체를 파낸다. 기다렸다는 듯 깊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입을 벌리자 주인공은 안으로 유유히 걸어들어가고, 어둠 속에 버려진 상자 속에서 앞선 전화의 단서를 얻게 된다.
게임이 시작된 이상 펼쳐진 맵의 설계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적시에 꼭 필요한 아이템을 습득해야 하는 것처럼, <콜>은 호러 장르(그리고 게임)의 문법에 충실하되 생략이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플롯 감각을 선보인다. 이는 무당인 영숙의 새엄마(이엘)가 행하는 퇴마 의식과 초자연적 능력(<사바하>), 여자 살인마의 광기(<화차>)를 드러내는 부분에서도 오컬트, 살인 스릴러의 검증된 재현을 거리낌 없이 취합하는 태도로 드러난다. 요컨대 개성있는 세계관을 설명하고 드라마를 구축하는 전략이 아닌 매끈한 감각적 몰입의 추구다. 이충현 감독은 1999년의 여자와 2019년의 여자가 통화할 수 있고, 여자들이 폭주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현대 관객과 장르적 합의가 끝났다”고 말한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시간 지연이 없는 타임워프가 불러내는 이미지와 캐릭터의 선명함이다. 다중 세계의 드라마가 주로 어떤 장치나 구간을 통과해 새로운 기회를 다시 펼쳐내는 형태라면, 콜은 눈앞에서 지금의 세계가 곧장 재창조되는 끊임없는 리빌딩의 스펙터클을 추구한다. 게다가 삶의 여러 가능성을 점치는 과정에 녹아든 이데올로기가 다분히 노골적이라 섬뜩함을 자아낸다. 과거의 영숙이 서연의 아버지를 살려내는 순간, 서연은 순식간에 부유하고 화사한 주거 형태와 외양을 갖춘다. 가부장의 회생이 곧 안락을 불러낸다는 점에서 공들인 CG의 향연보다 행복 그 자체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효과는 <콜>의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은 현실의 반영일지 모른다.
인물의 수를 제한하고 이들을 폐쇄된 장소(서연과 영숙의 집)에 몰아넣음으로써 표현적 스타일을 구축한 <콜>은, 시골의 대낮에 살인마가 활보하는 한국적 스릴러이면서도 다분히 공상적이라는 점에서 재미를 부른다. 바깥은 현실, 실내는 심연을 펼쳐내는 구도 속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과장된 양식미가 도드라지는데, 러닝타임이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인데도 스타일의 폭 넓은 스펙트럼을 명확히 체감시켰다는 데에서 성공적인 프로덕션이라 할만하다. 그 역동성 덕분인지 <콜>의 세 번째 주인공은 집 그리고 끊임없이 유기체처럼 바뀌는 삶의 가능성 그 자체로 보인다.
언캐니의 집
하우스 호러, 스릴러 장르의 한국영화들이 종종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건축물을 주요 배경으로 취해 왔다면 1990년대 양옥집과 모던하고 세련된 유럽풍 저택의 느낌 등을 다양하게 품은 <콜>은 “구한말 이후 선교사들이 지은 양옥 주택에서 영감을 얻었다”(배정윤 미술감독). 주거 공간이지만 “언캐니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극단적인 클로즈업 숏과 더불어 피사체를 프레이밍할 때 강박적일 정도로 정가운데에 위치시키는 시도도 더했다. “정중앙 배치는 보통 안정적이고 집중적인 구조로 여겨지지만 강박적일 정도로 숏들을 계속 반복해서 쌓아가다 보면 반대급부로 오히려 불안정한 심리가 표현될 것”(조영직 촬영감독)이라는 예상에서다. 공간이 반복되면서 감각적으로 쉽게 둔감해질 수 있다는 우려는 1999년과 2019년, 그리고 서연의 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시간대를 각각 “블루, 엠버, 마젠타 3가지 조명의 무드로 구분”했다.
<콜>은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모녀 관계의 히스테리를 향한다. 어린 시절 아빠가 화재로 죽고, 현재는 엄마도 병에 걸려 사망보험금을 운운하는 사정인 서연은 이상하게도 엄마쪽에 적대적이다. 관객은 그 이유를 가스불을 끄지 않고 외출한 엄마를 내심 힐난하는 심리인 줄로 알지만, 과거의 목격자인 영숙에 의해 발견된 진실은 사뭇 다르다. 오히려 죽음에 책임이 있는 쪽은 서연이고, 서연은 자신의 죄책감을 덮으려 투사의 대상이 필요한 것에 가깝다.
<콜>의 모든 판타지는 서연이 자기 내면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엄마에게 날 선 폭언을 하면서 시작된다(종국에 이 모든 죄의식은 극한 상황의 포효와 함께 토로된다). 표면적으로는 빌런 영숙에 맞서 자기 가족을 지키려는 서연의 투쟁처럼 보이지만 가족을 대하는 서연의 속내도 영숙 못지않게 어둡고 뒤숭숭하다. 엄마와 불화한 이후 옛집에 당도한 서연의 스토리가 끝내 모녀 드라마로 귀결되는 것도 (장르적 매력도는 떨어지지만) 심리극으로서는 제법 타당해 보인다. 반면 “네 엄마 꼴 나고 싶어?”라는 말을 새엄마에게 듣고 사는 영숙은 원래대로라면 무당인 새엄마의 그릇된 믿음 때문에 살해되었어야 했다. 영숙 하나쯤 사라져도 1970년대 베이비붐 세대 사회는 티끌만큼의 타격도 없었을 터, 소리 없이 사라질 뻔했던 여자는 서연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과거에는 불가능했을 웅장한 존재감을 선보인다(“오늘이 내 생일 같아!”).
가족과 세대의 히스테리 그리고 여자들
한편 여자들의 장르영화로서 <콜>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요소는 여자들의 공포를 건드릴 때 으레 등장할 법한 위협적인 남성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아빠(박호산), 딸기 농장의 순진한 삼촌(오정세), 성실한 경찰(이동휘)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남자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영숙이 주도하는 타임워프 무대의 장기 말로 충실히 기능한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놓고, 강력한 남성 빌런의 횡포에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결정적 위기인 양 제시하는 한국 스릴러들에 적잖이 당혹감을 느꼈던 관객에게 <콜>은 시의적절한 변용의 예로 다가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인 죽은 아빠는, 집 안에 불씨가 피어오르고 영숙이 침입하는 와중에도 내내 곤히 잠들어 있다. (스릴러적) 남성성을 이상하리만치 완전히 잠재워버린 영화로서, <콜>은 여자들의 활보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된 무대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녀들이 천지 분간 못하고 폭주를 멈출 줄 모른다면, 사태가 점점 더 흥미로워지지 않기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