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맹크>, 데이비드 핀처의 ‘로즈버드’를 찾아서
2020-12-04
글 : 송경원
<시민 케인>의 구조를 해체한 뒤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써내려간 <맹크> 리뷰
<맹크> 촬영현장.

“로즈버드.” 영화사를 바꾼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단어. 미국영화연구소 선정 위대한 미국영화 목록 1위에 꼽힌 영원한 걸작 <시민 케인>은 죽기 직전 케인이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로 시작된다.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쥔 권력자의 중얼거림은 남겨진 이들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마저 로즈버드라는 이름의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한참 헤매는 와중에도 우리는 이미 직감한다. 여기에 답이 없음을. 답을 찾지 못하는 건 애초에 엉뚱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현혹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영화가 아니다. 로즈버드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고찰하는 영화다. 1941년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 감독 오슨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여 현대 자본주의와 아메리칸드림의 신화를 해체해버렸다. 한참을 헤맨 끝에 로즈버드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권력의 끝에서 케인이 느꼈을 허망함의 한 자락을 짐작할 수 있다.

왕국을 건설했던 거인이 자신이 쌓아올린 성 안에 갇혀 얼마나 고립된 삶을 버텨왔는지를 들춰보는 것이 <시민 케인>의 속살이라면 ‘로즈버드’를 찾아가는 스릴러의 뼈대는 <시민 케인>의 동력이다. 이렇게 말하면 외피는 트릭일 뿐이고, 내피가 정답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약간 다르다. 뼈대가 없으면 살점이 형태를 유지할 수 없고, 동력이 없으면 이야기가 전진하지 못한다. <시민 케인>의 드라마는 셰익스피어는 물론 인류가 이야기를 발명한 이래 숱하게 반복해온,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더듬는 통찰이다. 훌륭하지만 보편적이다.

반면 오슨 웰스의 비범함은 출구에서 마주하는 답이 아니라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 즉 미로의 설계에 있다. 플래시백의 복잡한 내레이션은 물론 대담한 화면구도, 혁신적인 음향, 프레임 하나까지 허투루 찍은 장면이 하나 없는 역작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자들은 미로의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대신 미로의 벽면에 조각된 천재의 손길에 경탄해 마지않으며 <시민 케인>을 영화의 만신전에 올렸다. 그런 <시민 케인>이 만들어진 과정, 무대 뒤를 들춰본다는 것만으로도 <맹크>는 시작부터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케인이 외로운 왕이었던 것처럼 영화 <시민 케인> 역시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앗아갈 거인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로즈버드’도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맹크>

데이비드 핀처의 ‘로즈버드’를 찾아서

데이비드 핀처가 6년 만에 선보인 신작 <맹크>는 시나리오 작가 허먼 맹키위츠가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과정을 재구성한다. 데이비드 핀처의 아버지 잭 핀처가 각본을 쓴 것이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겠지만 <시민 케인>의 탄생 비화를 다루면서 감독인 오슨 웰스가 아닌 극작가 맹키위츠의 시점을 따라가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맹키위츠는 막스 브러더스 코미디부터 <오즈의 마법사>까지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베테랑 작가였지만 도박과 알코올중독에 빠진 기벽으로도 유명했다. 결함투성이인 인물이 역사에 남을 걸작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아이러니야말로 <맹크>의 핵심이다.

처음에는 <시민 케인>의 거대한 그림자와 이면에 숨겨진 흥미진진한 사실들을 기대하며 영화를 접하겠지만 실상 이 영화가 들춰내는 것은 193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경제 대공황을 맞이했던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예술 분야의 추악함이다. 다시 말해 <맹크>는 고전 할리우드 시기의 영광을 회상하고 거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리우드가 선봉에 서서 자아내온 미국이라는 환상에 대한 통렬한 반성문에 가깝다. 맹키위츠의 촌철살인을 빌리자면 “햇볕 드는 하수구”에 관한 이야기다.

1940년 캘리포니아 사막 빅터빌의 어느 목장, 다친 허먼 맹키위츠(게리 올드먼)가 도착한다. 영화 제작사 RKO 라디오 픽처스는 수발을 들어줄 가정부와 비서 리타 알렉산더(릴리 콜린스)까지 고용하며 맹키위츠에게 단 하나의 의뢰를 청탁한다. 60일 안에 오슨 웰스(톰 버크)가 의뢰한 각본을 완성해줄 것. 업계에서 퇴출 직전 벼랑 끝에 몰린 맹키위츠는 돈을 벌기 위해 집필을 받아들인다.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술을 참으며 억지로 글을 짜내던 맹키위츠의 작업은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점점 옛 기억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맹키위츠는 점차 자신의 글에 빠져들어간다.

<맹크>는 <시민 케인>과 마찬가지로 플래시백의 뼈대로 구성된다. 1940년의 빅터빌 목장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짜내던 맹키위츠는 자신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30년대를 수시로 회상하고, 장면은 상당 분량 그때 그 시절의 기억 속에 머문다. MGM 스튜디오 대표인 루이스 B. 메이어(알리스 하워드), 어빙 솔버그(퍼디낸드 킹즐리)와의 갈등, 유명 스타인 매리언 데이비스(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친구가 되었던 시간, 매리언 데이비스의 애인이자 미디어 재벌이며 시궁창의 흑막이기도 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스 댄스)와의 만남 등 1930년대는 할리우드 황금기이자 미국 경제의 암흑기, 그리고 황색언론으로 인한 양심의 실종기다.

<맹크>

<시민 케인>이 셰익스피어 비극의 창조적 변용이었던 것처럼 데이비드 핀처는 <맹크>에서 <시민 케인>의 구조를 해체한 뒤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써내려간다. 외로운 왕의 내면을 더듬어갔던 <시민 케인>과 달리 <맹크>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하지만 최후의 순간 양심과 자존심까지 저버리진 않는 평범한 인간 맹키위츠의 망가져가는 외면을 섬세하게 뒤따른다. <소셜 네트워크>(2010)가 외로움을 키워드로 이야기를 짰듯이 인간의 내면(혹은 특정 감정)을 플롯화하는 건 핀처의 주특기 중 하나다. <맹크>의 키워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반성과 속죄, 그리고 발버둥이다. 지난 삶의 부끄러운 기억들이 자신을 덮쳐올 때마다 맹키위츠는 벗어나고 싶지만 돈 때문에(물리적으로는 목장에 갇힌 탓에) 그럴 수도 없다. 그렇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글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해야 하는 맹키위츠는 점점 자신의 삶과 경험을 글 안에 녹여내기 시작하고 그 경계가 희미해질 무렵 마침내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그렇게 영화는 시나리오의 완성을 기점으로 딱 절반으로 접혀 있다.

전반부 맹키위츠의 기억들이 수시로 들이닥치는 형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순서나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 할리우드 황금기인 1930년대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이러한 의도된 불친절함은 할리우드 황금기를 추억하는 이들에겐 경이로운 놀거리로 가득한 ‘숨은그림찾기’처럼 다가올지 몰라도 처음 접하는 이의 몰입을 방해하고 영화로부터 밀어낸다. 마주하기 싫은 기억을 수시로 침투시키는 초·중반의 호흡은 느리고 갈등은 완만하며 이야기는 대체로 지루하다. 종국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왜 봐야 하는지조차 회의가 들 지경이지만 그 혼란과 산만함이야말로 핀처의 의도라 해도 무방하다. 이것은 걸작의 탄생에 관한 비화가 아니다.

우연히 미국의 망가진 시스템과 시대의 초상을 포착했던 어느 하찮은 인물의 이야기다. 하찮은 인간이기에 감지할 수 있었던 기득권층의 부끄러운 실체. 때로는 자존심을 지키고 간혹 굴복했으며 끝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망가져갔던 맹키위츠의 궤적이 생존자로서의 지식인, 소시민의 초상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 케인>의 거대한 그림자, 할리우드 황금기의 매혹이라는 ‘로즈버드’를 걷어내고 나면 진짜 로즈버드가 보인다.

<맹크>

핀처가 <시민 케인>을 필요로 한 이유

<맹크>는 <시민 케인> 시나리오 탈고를 중심으로 데칼코마니처럼 접혀 있다. 100페이지도 쓰지 못해 지지부진했던 시나리오 작업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완성된다. 이후 영화는 완성된 대본을 놓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맹키위츠의 지인들로 채워진다. 기득권의 정점이랄 수 있는 허스트를 대놓고 풍자, 저격하는 내용을 보고 누군가는 맹키위츠의 앞날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왜 이제 와서 그러냐며 만류하고, 누군가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전반부가 할리우드 황금기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채 관객을 밀어내는 척력(또는 영화사에 대한 지적 유희)을 에너지로 삼았다면, 후반부는 맹키위츠의 입장에 서서 그가 반성문을 쓸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대변하며 심리적으로 동조하고 끌어당기는 인력의 서사를 선보인다.

전반부가 이리저리 쏟아지는 언어유희로 정신을 뺏는다면 <시민 케인>의 완성을 기점으로 말은 담백해지고 인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전반부가 핵심은 없고 산만했다면 중반 이후는 리액션으로서의 구조에 집중하며 가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인물의 내면(불안)을 플롯화하는 핀처의 장기가 발휘되는 것이다. 좋게 말해 종횡무진, 솔직히 맥락을 알 수 없었던 플래시백의 박동은 점차 빨라져, 1934년 열린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후 허스트의 축하 파티 자리에서 난동을 피우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거의 현재(1940년)와 과거(1930년)가 하나의 시간으로 겹치기에 이른다. 맹키위츠의 과거가 현재를 따라 잡았다고 해도 좋겠다. 그리하여 맹키위츠는 이야기꾼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비겁함을 고백하는 용기와 지성을 회복한다. “나는 갈수록 내가 만든 덫에 걸린 쥐 같네. 덫에 틈이라도 생길까 자주 손을 보지. 내가 도망갈까 두렵거든.”

<맹크>

데이비드 핀처가 이 시점에 새삼 <시민 케인>을 리메이크한(다소 과장되지만 사실상 이건 고전에 대한 비평이자 창조적 변주, 다시 말해 리메이크에 가깝다. 일찍이 오슨 웰스가 말했듯 비평은 창조의 원천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의 각도를 살짝 틀자면, 오늘날 데이비드 핀처에게 <시민 케인>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데이비드 핀처는 20세기 말 이미 <맹크>를 영화화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엔 흑백영화를 찍을 수 없어 무산된 바 있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철저히 비상업적인, 심지어 OTT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핀처에게 흑백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전제 조건이었다는 점이다. <맹크>에서 흑백은 단순한 질감이나 포멧이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거리이자 태도다. 단순히 그 시대의 정취를 재현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신의 스타일을 일정 부분 내려놓으면서까지 성취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물론 고전영화에 대한 향수나 애정도 듬뿍 묻어난다. 빛과 그림자의 콘트라스트가 주는 강렬한 낙차는 할리우드의 빛과 그림자를 한층 부각시키고, 거의 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집착으로 빚어낸 이미지들은 매 순간 우아하다.

하지만 <맹크>에는 장면 하나, 프레임 한구석에조차 단순한 존경과 헌사 이상의 고민들이 감지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맹크>는 1930년대 할리우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미국을 투사하는 거울처럼 보인다. 현재 미국의 뒤틀린 구조와 모순들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시공간을 고르다가 1930년대, 그리고 <시민 케인>을 발견한 거라고 봐도 좋겠다. 오슨 웰스라는 초인이 빚어낸 <시민 케인>의 위광을 해체하고 하찮은 인간의 시점으로 끌어내린 창조적 변주. 우리가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는 것처럼, 어쩌면 핀처의 눈에 비친 세계(미국)는 그날로부터 한뼘도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맹크>에 묻어나는 태도는 퍽 낙관적이다. 나는 거기서 사소한 희망을 마주한다. 권력의 부조리 앞에서 평범하고 하찮은 우리가 적당히 비겁해지면서 분열한다. 때론 타협하고, 간혹 분노하고, 양심에 무게에 괴로워하다 끝내 반성하는 몸부림. 중요한 건, 그 부질없어 보이는 소심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맹키위츠가 의도치 않게 도달한 <시민 케인>이라는 출구처럼, 어쩌면 그 끝에 시대의 초상이 영글어갈지도 모르겠다. 설사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방황하는 족적들은 그 자체로 시대의 지표가 된다.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흔적들을 함부로 결정짓지 않고 두루 시선을 건네는 ‘딥 포커스’ 정도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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