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는 1995년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젊은 만화가 정훈이는 <씨네21>과의 인터뷰를 인연으로 영화에 대한 2쪽짜리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1996년에 시작한 연재는 10년을 넘겨 계속되다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독자들의 성원으로 다시 <씨네21> 지면에 복귀했다. “동철이 형(남동철 기자)이 연락을 해와서는, 다시 연재하면 안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정훈이 만화 때문에 정기구독 그만둔 사람도 있다고.” <씨네21>에서 편집장까지 지낸 남동철 기자를 ‘동철이 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창간 초기 밤샘이 일상 같던 주간지에서 연재 만화가와 기자들은 동고동락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웹하드로 원고를 주고받으면서는 연재 작가와 편집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만화판의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갔다. 매체 역시 거센 변화의 파고를 어렵사리 넘는 중이다.
2020년 12월 송년호를 끝으로 정훈이 만화의 연재가 종료된다. <씨네21>의 많은 독자들에게도 편집부에도, 해학 넘치는 친구였던 남기남, 씨네박 같은 캐릭터를 더이상 지면에서 만날 수 없게 된다. 정훈이 작가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오랜 마감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들었다. 남선우 기자가 역대 정훈이 만화 중에 재미있는 작품을 10편 선정해 함께 소개한다.
*만화 모티브가 된 영화명 / 만화 제목
<취화선>(2002) / 조선시대 만화가 닷냥 정승업
작가가 숨겨둔 이스터 에그가 빛나는, 정훈이 만화 연재 10주년을 맞아 작가가 직접 꼽은 최고작 리스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작품. “<취화선>을 보는 내내 장승업의 삶에 공감이 가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그의 삶과 내 생활을 자꾸 비교”했다는 작가는 오원 장승업의 만화계 진출에 위기감을 느끼고 새 만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닷냥 정승업의 절치부심을 재치 있게 풀어냈다. 이때 닷냥이 완성한 작품으로 언급되는 <신기전>이 바로 정훈이 작가의 실제 작품.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 그가 돌아왔다
김혜리 기자로부터 “<씨네21>편집팀의 열광을 산 내부자 유머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은 이 만화의 배경은 “모 영화 잡지”의 사무실. 주인공은 “허문영(가명)씨”. 편집장으로 복귀한 그는 혁신적인 기사 작성 시스템을 도입해 기자들의 마감 시간 준수를 촉진하려 애쓴다. 그러나 마감 미준수의 오명을 쓰게된 이는 바로 그 자신! 마감 시간 3시간17분3초 경과 시점. 기자들이 그를 찾는 마지막 컷이 클라이맥스.
<올드보이>(2003) / 이유도 모른 채 감금된 남기남
정훈이 만화의 영원한 주인공 남기남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결정적 에피소드.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처럼 폭음 후 밀실에 갇혀버린 기남은 엄청난 적응력으로 1인실에 정착한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강금실 장관이 나오는 뉴스를 보며 “히히~ 여기는 감금실인데”라며 농치고, “취업도 안되는데 매일 먹고, 자고, TV 보고, 참 좋다”라며 세태 풍자까지 완수하는 그야말로 ‘힘들 때 웃는 일류’가 아닌가 싶다.
<수면의 과학>(2006) / 수면은 잠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각 잡고 웃기는 스타일로는 최강이다.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듯, 수면도 잠이 아니라 과학”이라며 사뭇 진지하게 시작해 멘델의 유전법칙, 주기율표, 상대성이론 등을 이용해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들, 이동 중 몰아서 자는 직장인들의 수면 법칙을 총망라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미친 망아지처럼 뛰어놀 수 있는 것은 ‘에너지보존법칙’ 때문입니다.”
<업>(2009) / 집이 이사를 가는 남기남군 가족
정훈이 만화 역사상 가장 컬러풀한 색감을 자랑하는 해학적 에피소드. “건물은 있지만 토지가 없”어 철마다 이사를 다니는 남기남 부자는“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집이 이사”를 간다. 어떻게? 영화 <업>처럼 집에 풍선을 가득 달고! 그러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이들은 풍선에 편지를 매달아 SOS를 청하는데, 이게 북한의 대남 삐라 취급을 받아 뉴스에 나오는 결말이 압권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2013) / 세상은 돌고 돈다
이명박 정권 5년을 한편의 만화로 정리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씨 성을 가진 명박왕이 즉위한 후 부시왕의 마차를 몰다 민심을 잃고, 성난 무리의 농성이 펼쳐진다. 즉위 3년째에는 북왕의 수군이 우리 배를 깨뜨리고, 4년째에는 사대강을 살리기 위해 보를 쌓는다. 5년째, 정희왕의 장녀 근혜왕이 즉위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각 컷에 대한 해설부터 다가올 5년을 향한 탄식까지, 댓글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나를 찾아줘>(2014) / 아내가 사라졌다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는 잠시 잊어도 좋다. 영화와 전혀 다른 결로 부부 이야기를 그린 역대급 새드 정훈이 만화. 실종된 아내를 찾아 나선 할아버지 앞에 3년 전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독백이 눈물을 자아낸다. 특히 “덕분에 임자랑 삼년 더 살았다”는 마지막 대사가 여운을 남긴다.
<동주>(2016) / 자화상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점장의 시점으로 재구성.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아르바이트생과 딸을 잘 키워야 하는 점장은 화장실 거울을 보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거울을 쳐다보고 기운을 차린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통기한을 앞둔 도시락을 꼭꼭 씹어 먹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리다.
<나쁜 녀석들: 더 무비>(2019) / 범죄자 XX들 입 다물어!
2016년부터 집계된 정훈이 만화 온라인 조회수 순위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에피소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회자된 작품으로 2019년 늦가을에 불거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논란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세계관 속에서 풍자했다. 표창장 위조를 입증해달라는 검찰을 상대하느라 짜증이 폭발한 위조전문가 남기남 선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 아무리 복도 없다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라는 2020년의 구호를 가장 잘 표현한 명작. 이 만화의 주인공은 영화 프로듀서 찬실이. 일자리도 잃고, 사촌동생 결혼식도 가기 싫어 뻗어버린 그에게 보건소로부터 연락이 온다. 코로나19 확진자와의 밀접 접촉으로 자가격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그의 방문 앞에 이웃, 친구, 동료들이 찾아와 마음을 남기고 간다. “끝방 처녀는 참, 복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