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영화 '새해전야' 이연희·유연석…내일을 위한 시간
2021-06-24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힘들고 지칠 때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낯선 공간은 그 자체로 일상에서 얻기 힘든 활력과 자극을 준다. 그저 새로운 만남과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나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사회가 바라는 역할, 주변 지인들의 기대, 주어진 레일에서 벗어난 것들을 허락하지 않는 시선 등 나도 모르는 사이 덧씌워진, 내게서 오지 않은 것들. 진짜 나를 가리고 자존감을 위축시키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끔 필요한 것이 바로 낯선 공간과 새로운 만남이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말하기 힘든 고민을 의외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새해전야>의 재헌(유연석)과 진아(이연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나 마음을 나눈다. 먼 타향에서 아무런 인연도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몇번의 스침을 반복한 끝에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일주일의 마법 같은 시간이 설득력을 얻는 건 유연석, 이연희 두 배우의 살가운 호흡 덕분이다.

여기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있다. 모범적인 인생의 레일 위를 달리던 재헌은 문득 찾아온 번아웃에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유연석은 재헌의 입장을 대변하며 설명했다. “어쩌면 그날부터 재헌의 시계는 느리게 흘러가는 남미의 이국적인 시간에 맞춰졌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현지 와인 배달원으로 일하며 반현지인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냥 도망쳤다기보다는 살기 위해서 떠나온 사람이다. 인생의 비수기, 재정비를 위한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재헌이 어느 날 한국에서 막 여행 온 진아를 만나고, 이야기는 삶에 배신당한 한 여자의 사연으로 이어진다. 진아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는다. 비정규직이라 변변한 휴가도 한번 못 썼던 진아는 남자 친구와 함께 모았던 데이트 통장을 털어 한국에서 최대한 먼 곳,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훌쩍 떠나왔다. “진아는 힘든 시기를 보내는 청년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뭘 해도 안되는 벽을 만났을 때 잠시 쉼표를 찍기 위해 찾아온 곳에서 재헌을 만난다.”(이연희) 닥쳐온 고난 앞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 청춘의 얼굴은 이연희의 맞춤옷처럼 빛을 발한다.

20여일간의 아르헨티나 로케이션으로 완성된 장면들은 현실에서 쉽게 시도하지 못할 것들을 예쁘게 모아 보여준다. 이연희 배우는 “2019년 여름에 촬영했는데 그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겨울이라 쉽진 않았다. 하지만 이국적인 풍광을 눈에 새기면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도착한 아르헨티나는 아는 곳이 없어 흑백사진 같았다. 그런데 탱고를 추는 곳을 갔더니 붓으로 터치한 것처럼 화려한 컬러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새해전야>에서도 서로 어색한 재헌과 진아를 이어주는 건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문화적 유산, 탱고다. “한국에서 한달 정도 연습하고 현지에 가서 다시 배웠는데 현지에서 배운 것들이 남달랐다. 기교적인 부분이 아니라 남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 문화적인 에너지 같은 것들이 있다.”(유연석)

유연석 배우는 그간 배움의 시간을 떠올리며 탱고를 교감과 호흡의 춤이라고 표현했다. “감정과 에너지의 교류를 통해 나오는 정서적인 유대”가 동작마다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이연희 배우는 재헌과 진아의 관계 역시 탱고를 닮았다고 설명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만의 문제, 힘듦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위로의 마음이 한층 짙어지고 농축되는 게 탱고랑 비슷한 것 같다.” 위로와 교감의 시간은 두 배우 사이의 눈빛에서도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서로 제대로 된 극영화 상대역은 처음이라 낯설기도 했는데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고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춰졌다.”(유연석)

두 배우는 이번 아르헨티나 촬영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비행기에서 내려 시차 적응을 하는 이틀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길가에 테이블을 놓고 와인을 함께 마셨던 시간. 낯선 공간이 선사하는 묘한 해방감. 모든 익숙한 것들에서 한발짝 떨어진 채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경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탱고와 와인과 함께 무르익어간 재점검의 시간. 그렇게 우리는 어제의 나를 용서하고 오늘의 나를 발견한 후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맑고 진솔한 연기를 펼친 두 배우의 숨 고르기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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