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다. 20년을 함께한 중년의 동성 커플 샘(콜린 퍼스)과 터스커(스탠리 투치)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터스커가 치매에 걸린 것. 한번 시작된 관계의 균열은 점점 더 쪼개져 벌어질 일만 남았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터스커는 샘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을 제안한다. 작은 밴을 몰고 잉글랜드 북부를 여행하는 두 사람은 보통의 연인처럼 서로의 가족을 만나고 파티에 참석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터스커는 생기가 넘치고 치매에 걸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우주의 별이 폭발하기 직전에 가장 밝은 빛을 낸다는 ‘슈퍼노바’ 현상처럼.
그러나 병증은 점점 심해지고 두 사람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2021년 봄, 국내 개봉을 준비 중인 <슈퍼노바>는 배우 출신의 해리 매퀸 감독과 극중 인물처럼 20년 지기라는 콜린 퍼스, 스탠리 투치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세사람을 화상으로 만나 영화의 시작에 대해, 샘과 터스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터스커는 샘에게 마지막 여행을 제안한다. 작은 밴을 운전해 그들이 살고 있는 영국을 돌고 가족을 만나고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방문해 눈에 담는다. 먼저 운전대를 잡은 건 터스커였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샘이 운전대를 잡는 날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병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삶이 곧바로 끝나는 건 아니다. 삶은 얼마간 지속된다. 다가올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이전처럼 두 사람이 밝게 웃는 날들도 있었다.
샘과 터스커는 여행 중 내비게이션을 서툴게 작동시키다가 마거릿 대처 전 수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며 웃음을 터트린다(마거릿 대처 시절, 학교에서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동성애자는 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는 내용의 지방정부법 28조(Section28)가 발표된다. -편집자). 중년 영국인들의 인생을 책에 비유하자면 대처는 꽤 중요하고 긴 챕터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대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할 뿐 아니라, 삶과 사랑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들이다. 내가 기억하는 사랑 앞에서의 내 모습이 아니라, 연인이 기억하는 나를 전해 듣는 과정이 사랑의 기적적인 순간 중 하나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터스커의 질병은 두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영화의 제목인 <슈퍼노바>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빛나는 터스커를 은유한다. “터스커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한번 더 빛나길 바란다. 파티에 참석하기도 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영화 속 슈퍼노바 그 자체다.”(해리 매퀸) 어쩌면 제목의 별은 그들이 타고 있는 밴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로드무비로서 랜드스케이프 속을 달리는 작은 밴이 광활한 우주 속 작은 별과 같아 보인다. 동시에 이 영화가 거대하면서 말도 안되게 작은 이야기이길 바랐다. 잉글랜드 북부의 랜드스케이프는 정말 아름답고 거대하다. 그곳을 달리는 밴은 작디작다. 그리고 그 작은 밴 안에서 두 사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제목인 <슈퍼노바>는 이런 맥락을 담는 멋진 이중적 의미라고 생각했다.”(해리 매퀸) 감독의 설명처럼, 터스커는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본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덧없다. 삶이 저물고 있다는 걸 예감하는 터스커 역의 스탠리 투치의 눈빛이 더해지며 맑지만 쓸쓸한 무드는 더 진해진다.
배우 출신의 해리 매퀸 감독이 치매에 대한 시나리오를 쓴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2015년 동료가 치매로 직장을 잃은 지 6개월 뒤 사망했고, 또 다른 친구 한명은 60살이 된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면서 주돌봄자가 되어야 했다. 가까운 이들이 치매로 고통받는 모습을 본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로 마음먹었고, 런던대학교와 웰컴 트러스트 연구소 등 의료기관에서 3년간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가장 큰 도전은 치매라는 소재 자체였다. 사람들에게 감정을 전달할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 치매를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이 점이 가장 어려웠다.”(해리 매퀸 감독) 스탠리 투치는 이제 갓 첫 영화(<힌터랜드>)를 만든 신인감독의 시나리오에 매료됐다.
2018년 암으로 아내와 사별한 그는 가족을 잃는 경험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콜린 퍼스에게 건넨 것도 그였다. 두 사람은 극중 캐릭터처럼 20년 지기로, 영화 <컨스피러시>(2001) 때 만났다. 스탠리 투치와 콜린 퍼스는 각각 미국과 영국에 살면서도 긴 우정을 이어갔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터스커와 샘 역할을 정하지 않은 채 관록의 배우들이 신인감독의 시나리오를 택했고 감독과 배우가 모여 논의한 끝에 각각의 역할을 정했다. 해리 매퀸 감독은 “두 배우가 내 앞에서 역할을 바꿔가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많은 이유에서 터스커 역에 스탠리를, 샘 역에 콜린을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여행 중 소원이 무엇이냐는 터스커의 질문에 샘은 “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어쩌면 두 사람 앞에 닥친 질병을 생략하고도 이는 사랑을 요약하는 대사가 아닐까.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그 순간을 길게 늘리는 것. 유한한 삶에서 무한히 이어질 듯한 순간을 느끼고 그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것. 두 사람의 밴이 우주를 돌고 돌아 깨달은 건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고 단순한 진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