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동남아시아 디즈니 프린세스의 탄생
2021-02-20
글 : 안현진 (LA 통신원)

전사 라야와 성스러운 물의 드래곤 시수가 조각난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모험을 그린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 여러 면에서 최초를 선언한다. 동남아시아 지역과 문화를 소재로 선택한 최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디즈니가 극장으로 돌아가는 첫 영화다. 2021년 3월 5일(국내 개봉 3월) 전세계 개봉하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제작진과 버추얼로 진행한 인터뷰를 키워드로 정리해 전한다.

드래곤을 닮은 땅, 쿠만드라

쿠만드라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무대다. 드래곤의 형상을 닮은 땅으로, 하트(심장), 팽(송곳니), 스파인(척추), 탤런(발톱), 테일(꼬리)로 나뉜 다섯개의 땅에서 각 부족들이 어울려 살아간다. 라야의 아버지인 벤자가 부족장인 하트는 마법을 믿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비옥한 땅이고, 팽은 수자원이 풍족한 번성의 땅이다. 반면 반도인 스파인과 사막인 테일 사람들은 자원 부족으로 경쟁이 치열하며 불신의 골이 깊다. 탤런은 다섯 부족이 모이는 지역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드래곤과 사람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온 쿠만드라는 오래전 사악한 드룬의 습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드래곤의 희생을 통해 평화를 되찾은 역사가 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시간은 드룬의 최초 습격으로부터 500년이 지난 뒤를 그린다. 드래곤 젬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라야는 믿었던 친구에게 속아 상처받은 날, 또다시 쿠만드라를 찾아온 드룬에 의해 아버지를 잃는다. 아버지의 칼과 드래곤 젬 조각, 반려동물이자 사이드킥인 툭툭만 챙겨 도망치듯 하트를 떠나고, 그 뒤 라야는 쿠만드라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자 성스러운 물의 드래곤인 시수를 찾아 세상을 복원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주제는 ‘신뢰’

어린 시절 친구의 배신을 겪은 뒤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라야지만 시수를 찾아 조각난 쿠만드라를 복원하는 것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지만 세상을 구하는 일은 드래곤의 마법만으로 되진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하고, 그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신뢰이기 때문이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각본을 쓴 작가 아델 림은 “한번의 신뢰가 모든 걸 바꿀 수 없다. 지속적으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걸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게 어려운 일일지라도, 또다시 배신당할지라도, 한번 더 믿고 노력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영화의 메시지를 정리했다. 신뢰라는 주제를 짊어진 라야와 시수의 조합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라야가 유일하게 믿는 시수가 알고 보니 허당, 구멍투성이인 유머러스한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살아왔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드래곤으로서 자신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시작된 건 4년 전이다. “현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와 현실이 닮아가는 걸 보는 것은 감독으로서 신기한 경험이다.” <빅 히어로> <모아나>를 만든 돈 홀 감독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탐구하는 신뢰라는 주제에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시의성이 있다고 말한다. 오스넛 슈러 프로듀서 역시 “이야기가 구체적일수록 관객은 보편성을 찾아낸다”고 덧붙였다.

디즈니 애니 최초로 동남아시아를 선택한 이유

작가 아델 림

디즈니가 아시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선택한 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처음이다. 오스넛 슈러 프로듀서에 따르면 처음부터 동남아시아를 정해놓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고대의 전사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때 알게 된 동남아시아 문화에 매력을 느껴 방향을 설정하게 됐다고. 방대한 양의 사전조사로 정평이나 있는 디즈니 제작팀이 동남아시아 지역의 문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꼽은 부분은 커뮤니티 문화였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커뮤니티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켜가는 문화가 인상 깊었고, 그를 위해 이 지역 문화에 익숙한 아티스트를 제작팀의 주요 멤버로 꾸렸다.

각본을 쓴 아델 림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의 후손으로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으며, 공동 각본가인 퀴 응우옌은 베트남계 미국인이다. 동남아시아와 할리우드, 두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각본을 집필함으로써 영화는 지역색과 보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켈리 마리 트랜. 사진제공 SHUTTERSTOCK

아시아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를 만들면서 제작진이 고심한 부분은 더 있다. 보이스 캐스팅의 90% 이상이 모두 아시아 배경을 가진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2019년 8월 열린 D23 행사에서는 라야의 보이스 캐스트로 캐나다 가수이자 배우인 캐시 스틸이 소개됐지만, 추후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로즈 티코를 연기한 켈리 마리 트랜으로 바뀌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어린 소녀에서부터 여전사로 성장하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로 트랜이 적합했다고 부연됐지만 할리우드에 불거졌던 인종차별 논란에서도 자유롭진 않았을 것이다. 돈 홀 감독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시안 캐릭터가 스크린에 나온다면 보이스 액터도 아시안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켈리 마리 트랜 외에도 아콰피나가 시수 목소리를 연기했고, <크레이지리치 아시안>의 제마 챈이 라야의 숙적 나마리, 샌드라 오가 나마리의 어머니인 비라나 목소리를 연기했다. 대니얼 대 김은 라야의 아버지이자 하트의 부족장인 벤자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멋진 여성들의 세계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언뜻 보기에도 이전까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가 문화적 배경이 된 이유도 있겠지만 뮤지컬 장르에서 벗어나 마셜아트와 액션에 포커스를 두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라야와 시수도 여성 캐릭터이며, 라야와 대결을 펼치는 나마리도 여성이다. 라야와 모험을 함께하는 무리의 나머지는 남성들이지만 조연으로서 라야와 시수를 돋보이게 한다. 이처럼 여성이 중심에 놓인 서사 역시 동남아시아 문화가 배경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각본을 쓴 아델 림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전설에 여성이 주인공인 특별한 경우는 없지만 오히려 역사 속에서 여성 리더와 여전사의 존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설화 속 상상의 동물인 나가(시수의 원형) 역시 여성으로 묘사된다고.

공동 각본가 퀴 응우옌도 베트남에서 여전사로 유명한 트렁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고 덧붙였다. 비록 분위기는 다를지라도 라야 역시 “디즈니 프린세스”라고 아델 림은 말한다. 디즈니 프린세스의 위대한 유산이 라야에게도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여성이 중심이 되어 그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거울에 실제 세상을 비춰온 디즈니는 21세기에 걸맞게 프린세스를 리더이자 전사로 업그레이드했다.

목소리 녹음은 옷장에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시작된 건 4년 전이지만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시기는 2020년 초반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할리우드가 난항을 겪던 시기였다. 다행스럽게도 원격으로 작업이 가능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 덕분에 팬데믹이 선언된 첫 주말 3일 동안 415명의 제작 인력이 모두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2020년 하반기로 잡혔던 개봉일이 바뀌기는 했지만 코로나19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완성된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보이스 캐스트가 녹음을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정확하게는 워크인 옷장(드레스룸)에서 진행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기술지원팀이 장비를 집으로 보내주고 원격으로 소프트웨어 설치를 도움으로써 집 안에 녹음실을 마련한 캐스트들은 편안하고 즐거운 환경에서 녹음했고, 오히려 마음을 졸인 쪽은 제작진이었다고 한다. 녹음 버튼을 누르지 못해 생기는 실수와 재녹음도 즐거운 에피소드로 남았다. 돈홀 감독과 연출의 짐을 나눠진 카를로스 로페즈 에스트라다 감독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복잡한 일이 많은 방법이었다. 특히 음질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파이널 편집본에서 확인한 결과 극장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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